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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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1년 9월 11일 아침,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의 민간여객기 두 대가 뉴욕의 랜드마크인 110층의 세계무역회관 쌍둥이 건물을 각각 들이받는 모습은, 그런 화면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뉴스 시간에 나온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여객기가 대형건물을 들이 받은 것도 충격적이었고, 이어서 110층 건물이 거의 동시에 그 자리에 가라앉는 것도 내 사고 능력을 초월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진짜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화면을 지금 생각해보면 TV를 통해 한 달 정도 하루도 빼지 않고 연속 상영됐다고 기억한다. 21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지구 상 유일한 경찰국가임을 자임해 온 미국 땅에서 타국인이 미국의 재산과 인명을 살상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던 거다. 인명과 재산은 차치하고, 정말로 여객기가 건물과 부딪히고, 이어서 그렇게 거대한 건물이 폭삭 무너지는 건, 비록 사건 자체는 어마어마한 비극이며 결코 발생해서는 되지 않을 극악한 짓이었지만, 사건 장면을 보는 행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아 내가 언젠가는 이 감정에 대해 벌을 받지), 일종의 쾌감, 물론 적절한 단어는 아니지만 쾌감의 다른 형태였던 것, 아니면 화면을 보는 시각 행위 속에 이런 감정에 비슷한 것이 끼어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하도 숱하게 봐서, 영화를 만든 바로 그 미국 스스로가 피해 당사자가 됐다는 아이러니도 터무니없는 감정의 아주 중요한 매개 또는 이유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제일 중요한 건 1945년 이후 세계의 모든 방면에 패권을 잡고 아무거나, 아무 나라나 쥐고 흔들어대던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누구한테도 테러 장면을 보면서 은근한 쾌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는 얘기 대신 야, 그거 정말 대단하더라. 말도 나오지 않더라고, 등등의 수사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쾌감 운운하는 건 정말 천벌을 받을 일이다. 돌아보면, 내 주위의 많은 또래 한국인들도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면서, 영화에서나 볼 일이 진짜 일어났다거나, 내 말하고 아주 똑같이, 대단하다,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 굉장하다, 라는 수사에서 말을 멈추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도 모르긴 모르지만 나하고 비슷한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드러낼 수 없는 참담한 일이었다는데 동의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 빌어먹고 사는 직장의 911 테러 당시 미국 본사 회장이 파키스탄 출신 미국인이었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남자들은 모두 군대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숱하게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무차별 테러를 경험했(다고 구라를 풀)고, 일찍이 영국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거의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봐서 파키스탄의 중산층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이 자가 일찌감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 대학을 졸업한 나이가, 놀라지 마시라, 열네 살. 열여섯 살에 회사를 만들어 키워 팔아먹고, 서른다섯 살도 되지 않아 내가 '아직도' 빌어먹고 사는 다국적 기업의 회장 자리에 등극했는바,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책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주인공 화자 ‘찬게즈’가 스물한 살에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파키스탄 인이고, 소설의 작가 모신 하미드(비록 소설의 주인공보다 약 열 살 가량 많지만) 역시 열여덟 살 때 프린스턴으로 날아가 <빌러비드>, <재즈>, <술라>를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을 사사했기 때문이다. 작가 또는 책의 화자 찬게즈에 의하면 제삼세계 출신의 유학생이 미국 본토 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월등하게 높은 이유는, 정말로 소수 정예만 골라, 골라서 유학을 보내기 때문이라지만, 난 예전의 파키스탄 출신 전ex 회장새끼 때문에 아직도 파키스탄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영 고쳐지지 않는다.
 파키스탄 출신의 똑똑한 영재 하나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개츠비하고 동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망하며 대졸 초임으로 2001년 당시 8만 달러 더하기 성과급을 주는 기업 평가 컨설팅 회사 ‘언더우드샘슨’에 입사를 하며 160쪽의 짧은 소설은 시작한다. 꿈의 직장에 취직을 하고, 여섯 명 입사한 가운데 1등을 차지하여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달리는 찬게즈. 거기다가 회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짐에게 살뜰한 지원을 받고 있는 찬게즈는 언더우드샘슨에 취직하며 먼저 받은 돈으로 그리스 여행을 떠난 프린스턴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에리카와 사랑에 빠진다. 짧은 소설이라 구체적 상황은 소개하지 않겠는데, 하여간 입사해서 스물두 살짜리가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필리핀으로 업무출장을 가는 도중에 911이 터지고, 사랑은 생각대로 되지 않고(생각대로 되면 그게 사랑이냐, 바보같이!), 911 이후 미국에서 이슬람을 믿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은근히 삐딱해지는 거 같고, 그러면서 같은 종교를 믿는 이웃국가 아프가니스탄을 맹렬하게 폭격해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조국 파키스탄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인도와 일촉즉발의 핵전쟁 가까이 근접해있는 가운데 미국은 나 몰라라 뒷짐만 지고 있는 걸 깨닳는 찬게즈. 과연 찬게즈는 어떤 장단에 춤을 출까? 미국 내에서도 꿈의 직장에 근무하면서 (내 엑스회장새끼처럼) 승승장구하여 일신 상 영달을 도모하고 아름다운 미국여자를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딴 거 다 때려치우고(1960년대 아랍권과 이스라엘 전쟁당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아랍권의 있는 집 아들들이 다 유학길에 오른 것과 대비해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와 총을 잡은 일과 비교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조국과 종교를 위해 군화를 신을 것인가, 이건 직접 알아보시라.
 다만 한 가지. 이보 안드리치의 걸작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예니체리’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다가 뒷부분에서 난데없이 이 ‘예니체리’를 거론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예니체리에 관하여 두산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오스만투르크 제목에 정복된 유럽 속령 내의 그리스도교도 중에서 장정을 징용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엄격한 훈련을 실실한 다음 술탄의 상비친위군에 편입시켰다. 결혼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시켰으나 고봉(高俸:high salary)을 받고 고위, 고관에 영전하는 등용문이었으므로 자기 자식을 지원시키는 그리스도교도도 있었다.”
 이건 사전적 설명이고, 오스만투르크가 이웃한 그리스,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을 침략해 현지의 소년들을 거의 납치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 자신의 친위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예니체리 출신의 터키 장군이 석조 다리를 드리나 강에 건조하고, 다리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을 그린 것이 <드리나 강의 다리>다. 왜 장황하게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가 하면, 미국을 필두로 하고, 일본이 뒤를 이어, 주로 제삼세계 국가 출신의 청년 학생들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박사 등의 학위를 수여하고, 정말 인재라 생각하는 재원은 미국 시민권을 주어 미국인으로 살게 하고, 아니면 다시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 제삼세계의 핵심 지도부의 성원이 되게 지원한다. 그들은 각기 자기 조국에서 대표적 친미파로 행위 하는데, 이걸 보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작가 모신 하미드는 주인공 찬게즈를 예니체리와 비교하려 했던 것이다.
 책은 모처에서 찬게즈가 건장한 미국인과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미국인이 묶은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장면까지, 전적으로 찬게즈가 미국인에게 하는 대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스스로는 자신을 찬게즈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미국이란 말 대신에 ‘당신네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다. 미국의 군사자산에 의지하여 영토를 방위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완전히 동의하기 힘들지만, 미국과 제삼세계, 특히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잠깐의 숙고를 요구받을 것임을 알고 책을 선택하시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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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있다고 하는데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모신 하미드의 신간은 언제나 나오려
는지 궁금하네요.

예니체리는 미군에서도 이름만 달리 해서 채택
하고 있는 시스템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Falstaff 2018-03-22 15:13   좋아요 0 | URL
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 같아요. 개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신 아미드는 지금 검색해보니까 ˝모신 하미드˝란 이름으로 문학수첩에서 한 권이 나와 있더군요. 책 소개글 보니 <...근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2인칭 소설인 모양입니다.

레삭매냐 2018-03-22 15:26   좋아요 0 | URL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도 상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신간은 제목이 <Exit West>네요.

영화 <Reluctant Fundamentalist>는 2012년
에 만들어졌네요. 케이트 헛슨과 리브 슈라
이버 그리고 리즈 아메드가 주연으로 나왔
네요.

Falstaff 2018-03-22 16:1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고 보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