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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7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손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0월
평점 :
“윌 브랑웬의 두 딸? <무지개> 확인할 것.”
책을 읽다가 포스트잇에 위 문장을 메모했다. 책의 첫 문장에 두 명의 여주인공 어슐라와 구드룬을 언급하지만 <무지개>에서 톰의 손녀 어슐라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책 뒤편의 후주를 보면 어슐라는 “쾰른 근방에서 훈족에 의해 만천여명의 처녀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성녀”라고 했고, 구드룬은 “게르만 전설. 니벨룽의 딸. 지그루프를 사랑하고, 남편 아들리를 살해”했다고 썼다. 구드룬, 아하, 구트루네의 영어식 발음이구나. 게르만 전설 <니벨룽겐의 노래>하고 우리가 하는 <니벨룽의 반지>하고는 많이 다르다. 근데 왜 주인공 자매 이름을 고색창연하게 지었을까. 책을 읽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하여간 독후감을 쓰기에 앞서 <무지개>를 다시 훑어보았다. 분명 톰 브랑웬의 양녀 애나가 낳은 딸이 어슐라. 그런데 어떻게 가족이름이 할아버지와 같을 수 있을까. 맞아, 맞아. 톰 브랑웬이 지극하게 아꼈던 양녀 애나 렌스키는 톰의 조카인 윌 브랑웬에게 시집가 똑똑한 첫째 딸 어슐라 브랑웬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 <사랑에 빠진 여인들: Women in Love>은 분명하게 <무지개>의 후속 작으로, 어슐라는 일찍이 폴란드 귀족 안톤 스크레벤스키의 사생아를 임신하기까지 했던 첫사랑에 실패하고 부모가 사는 집에 돌아와, 동네 학교 교사로 일하며 어느덧 스물여섯 살을 먹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때 런던에서 소품 조각을 해서 나름대로 신진 예술가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한 살 아래 동생 구드룬 역시 당분간이란 단서를 단 채 집으로 돌아와 자매가 오랜만의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것. 그러니 이 책을 읽으실 분은 먼저 <무지개>를 보신 다음에 선택을 하는 편이 좋겠다.
D.H. 로렌스의 초기 히트작인 <아들과 연인>도, <무지개>도 무대가 영국 중부지방에 있는 탄광촌인데, 로렌스 자신이 탄광촌인 이스트우드 출신이란다. 어려서 숱하게 보고 들은 것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봐야겠다. 이 책에서도 주된 무대 벨도버 역시 탄광촌이긴 하다. 그러나 <무지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인들’의 아버지 윌은 레이스 도안을 하다가 나이 들어 어슐라가 재직하는 학교의 시간제 공예교사를 하고 있고, 딸들이 교사와 예술가 직업을 가지고 있어 시골 중산층 계급 정도의 인물들이다. 이 가족은 벨도버 지방이 유지들이 여는 파티에 ‘머리수 채울 요량의’ 초대를 받는 정도이지만 구드룬의 놀라운 외모 덕에 인근에 그래도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다. 로렌스, 하면 연애소설. 맞지? 그렇다. 이 책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스물여섯, 스물다섯, 두 여성이 등장하며, 소설의 무대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봐서 20세기 초반으로 봐야겠다. 벨도버에서 가장 큰 탄광 사장의 맏아들 제럴드와 그의 절친한 친구 버킨. 이렇게 두 명이 이 ‘여인들’하고 맺어지게 된다.
후주後註까지 합쳐 80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어찌 한 마디로 소개할 수 있을까. 분명하게 연애소설이고, 사랑을 다루는 작품답게 4,783번 정도 ‘사랑’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의 탈고 시기(1917년)가 시기인 만큼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주인공들도 당시 기준으로 봐서 이미 푹 곰삭은 노처녀들이며, 중요한 남자 주인공 버킨은 시도 때도 없이 비극적 세계관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는 소설을 시작해서, 어슐라와 결혼을 하고, 주인공 네 명이 함께 떠난 인스부르크로의 겨울여행을 즐길 때까지, 초지일관하게, 인류는 지구를 떠나거나 멸종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설파하고 있다. 전형적인 우거지 죽상인데 우리의 어슐라는 뭐 때문에 이런 맛이 좀 간 남자가 좋았을까. 큰 탄광회사의 사장 아들이자 실질적인 경영자인 제럴드는 20세기 초에 벌써 탄광회사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감안했으며, 오랜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아버지의 방을 아침마다 열어보며 오늘 아침엔 틀림없이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항을 점검한다. 그러다 정작 아버지가 죽어버린 비 오는 밤, 진흙길을 정처 없이 걸어 열린 브랑웬 댁에 침입해 구드룬의 방문을 열고 동침해버린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기 15페이지 전, 또 한 번의 죽음을 앞두고 이번엔 눈 쌓인 인스부르크의 산등성이로 또 한 번 무작정 길고 긴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거 정말 연애소설 맞아? 하는 것. 연애소설이기는커녕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처한 인류와 영국, 국가들, 문화 등에 대한 비판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이건 주로 버킨이 유도하는 대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역자 해설에서 손영주는 “등장인물들의 토론을 통해 민족과 국민, 국가 등에 관한 당시의 민감한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룰 뿐 아니라, 전시에 한층 보수화하게 마련인 정치 담론 및 여론에 상당히 도전적인 반애국적인 시각과 정서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맞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정확한 단어로 설명해주었다. 이럴 때 역자의 해설이 참 반갑다.
아, 역자 손영주 이야기가 나왔으니, 웬만하면 말 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정말?), 한 마디 해야겠다. 현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손영주는 이 책을 번역해서 제9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단다. 유영번역상은 영어로 된 원작을 한국말로 잘 번역한 책의 역자에게, 1년에 한 명한테 주는 상이다. 원서 복사본 1권과 해당 원서를 번역한 책 한 권을 제출해 상을 신청하면 그걸 심사해서 대상자를 뽑고, 수상자에겐 상패와 세금 포함해 1천만 원을 준단다. 실 수령금액은 989만 원가량 될 거다. 기타소득의 세율 1%, 여기에 주민세 1%에 대한 10%. 그런데 유영번역상. 이거 혹시 교수들 아니면 일부 이름난 번역가들이 서로 돌려 먹는 거 아냐? 나는 지금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오역이 물결처럼 넘치는지,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하는 거 아니다. 전에 본고사 보던 시절, 본고사 문제로 한 번도 빠지지 않던 것. “다음 글을 우리말로 옮기시오.” 이에 대한 답안지를 읽는 거 같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3인칭 대명사, 지시대명사, 관형사 “그”와 “이”. 그리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마구 적용하는 단어, “사악하다.” 하다못해 조금 되바라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착한 심성을 지닌 10대 초반의 아가씨가 행동하는 걸 보고도 거침없이 “사악하다”라는 단어를 던져준다. “사랑”이 4,783번 나온다면 “사악하다”는 말은 726번 정도 나온다. 아무한테, 아무 행동에 대고 그냥 편하게 “사악하다”는 말을 쓴다. 사악하다는 단어가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사악하다”를 그냥 샘플로 얘기한 것이지, 다른 표현에서도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노력을 덜 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 그런 거 있잖은가. 읽어나가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듯한 단어가 ‘딱’ 꽂혀있으면 ‘팍’ 와 닿는 불편함. 요즘 읽은 다른 책들과 비교해 유난히 많았다는 건 좀 밝혀야 될 듯.
그러나 진짜 나를 미치게 만든 건 사악할 정도로 무수하게 쏟아지는 주격대명사 “그”, “그녀”, “그들”, 소유격대명사 “그의”, “그녀의”, “그들의”, 목적격대명사 “그를”, “그녀를”, “그들을”, “그것을”, “그것들을”, 지시대명사 “그”, “이”, 관형사 “그”, “이”들. 좋다, 좋아. 원문을 정확하게 한글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 본고사 시험 치루는 기분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분수대도 아니고 폭포 수준으로 남발하니 읽는 사람은 정말 돌아버린다. 근데 또 일정 페이지를 넘기면 아주 좋은 문장이 한동안 등장한다. 이거 왜 이런 거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을유문화사 편집자들이 책을 부분부분 쪼개서 교정, 교열, 편집한 건가? 아니면 역자 손영주의 대학원 다니는 제자들이 책을 부분부분 쪼개서 번역한 걸 지도교수 이름으로 출판사에 가져다 준 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죄 받는다, 죄 받아. 그렇지? 죄 받겠지? 진짜 궁금한 건, 역자가 자신이 번역한 결과물을 정말 읽어봤을까? 하는 점. 읽어봤겠지. 안 읽어봤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죄 받는다, 죄 받아. 우리나라 영어번역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유영번역상 수상작 가지고 말이야. 그렇지? 내 말 맞지? 정말 맞겠지? 맞고 싶으냐고? 어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