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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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명색,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풍성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의 321번째 발간한 책이다. 스무 살에 죽은 한 프랑스 청년이 열일곱 살 먹었을 때 탈고한 작품 <육체의 악마>가 이중 한 자리를 채웠으니 대단하다 할밖에. 심지어 졸라, 뒤 가르, 그레이브스도 자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시리즈 목록에 말씀이야. 작가 라디게가 1903년생. 이 또래가 어떤 의미인가하면, 1차 세계대전엔 나이가 어려 참전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는 스스로 지원하지만 않으면 싸우기에 늙어서 참전하지 못하는 면피 세대라는 거. 1차 대전이 1914년 8월에 발발해 1918년 빼빼로 날, 11월 11일에 끝난다. 당대 숱하게 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거덜낸 전쟁은 이 세대들에게 “그것은 말하자면 사 년 동안의 긴 여름방학이었던 것이다.”(7쪽)
 소설은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사건은 전쟁 중인 1917년에서 18년 종전 때까지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주인공 화자 ‘나’의 나이 16세이던 시기의 만 1년. 자기보다 서너 살 많은 마르트란 아가씨를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한다. 남자 나이 16세, 고 1 정도가 되면 오래전 이순원의 <19세> 독후감에 썼다시피 투시력이 생기는 특별한 나이. 여자가 아무리 두터운 외투를 입었다 해도 척 보면 속살을 훤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얘기, 기억하시려나? ‘나’의 눈이 마르트를 발견한 순간 숙명적인 사랑을 발견하며 당연히 사랑의 허리하학적 최종 목표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뿔싸. 19세 아가씨 마르트는 이미 ‘자크’라는 참전 군인과 약혼을 한 상태이며, 조금 후 자크가 1주일 휴가를 받아 온 틈을 타 정식으로 결혼해버린다.
 이렇게 순진하게 끝낼 거 같으면 소설이 되지 않을뿐더러, 전쟁이 “사 년 동안의 긴 여름방학”이 되지도 않는다. 총사망자 2천만 명, 부상자 2천2백만 명의 참사가 생긴 긴 여름방학 동안 ‘나’는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으로 마르트에게 접근하건만, 마르트 생각엔 자신이 ‘나’에 비하면 할머니 같아 보인다. 16세와 19세의 차이는 그만큼 큰 거다. 게다가 당시 유럽(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까지 지역불문하고)에선 대강 나이 차가 근 스무 살 가까이 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16세 남자아이가 사람 같기나 했겠어? 마르트의 남편 자크도 서른을 훌쩍 넘겼으니 마르트의 생각도 그리 많이 어긋나는 건 아닐 터. 하지만 ‘나’는 죽음의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낸 마르트를 유혹하는 데 기어이 성공하여, 주인 없는, 아니, 주인은 죽음의 사육제를 향해 떠나 비어버린 신혼의 침상을 탈취한다.
 비록 16세지만 ‘나’는 한 번도 전쟁과 희생자와, 잠재적 희생자인 마르트의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벌이고 있는 (16세에 불륜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애정행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불륜행각이 벌어지는 장소가 마른 강가 부근의 작은 도시. 마른이 어딘가. 파리 외곽의 마른 전투, 1차 세계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으며 그만큼 사상자를 많이 발생시킨 악명 높은 전쟁터가 바로 마른 아닌가. 라디게 또는 ‘나’ 속에는 그러나 전쟁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다. 그냥 남의 눈에 띄면 좋을 거 없는 연애상태. 그러면서도 쉼 없이 마르트의 몸을 갈급하게 구하는 충동과, 남녀 사이에 당연하게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과 질투. 이런 것들을 그냥 죽죽 써내려간다.
 작품을 발간한 것이 1923년 3월. 작가는 그해 연말에 파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 <육체의 악마>는 대박을 터뜨린 모양이다. 책 뒤편의 작품해설을 보면, “갑자기 얻은 높은 명성을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문학적 공백 덕분이라고 보는 평자도 적지 않았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릇된 견해였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단다. 그러나 내가 읽어보니 이 책이야말로 전쟁 후 문학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서구적으로 대두된 “잃어버린 세대”적 측면을 빼면 남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나야 완전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하지만 문화 진공 시대에 맞춤하게 불어온 냉담과 혼돈, 그리고 조금의 자유, 그것도 책임이 결여된 자유 말고는 별로 발견할 것이 없지 않은가 싶다. 물론 해설에는 문장의 간결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걸 번역문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결론은, 양심이 있는 관계로, 일독을 권하지 못하겠음. 단, 이 의견이 문학적으로 무식한 한 아마추어의 한계이기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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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1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읽고 나서 할 말도 별로 없더라고요. 장 콕토 <앙팡 테리블>도 비슷한 느낌이었고요.

Falstaff 2018-07-11 10:36   좋아요 1 | URL
앗! 멋진 답글입니다. 잠자냥님 말씀 믿고 <앙팡 테리블>은 그냥 패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저 이런 답글 무척 좋아합니다. 추천 말고 비추 도서 소개요!! ㅋㅋㅋ

따오리 2023-05-0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교과서를 기대하면..
 
사랑에 빠진 여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손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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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 브랑웬의 두 딸? <무지개> 확인할 것.”
 책을 읽다가 포스트잇에 위 문장을 메모했다. 책의 첫 문장에 두 명의 여주인공 어슐라와 구드룬을 언급하지만 <무지개>에서 톰의 손녀 어슐라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책 뒤편의 후주를 보면 어슐라는 “쾰른 근방에서 훈족에 의해 만천여명의 처녀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성녀”라고 했고, 구드룬은 “게르만 전설. 니벨룽의 딸. 지그루프를 사랑하고, 남편 아들리를 살해”했다고 썼다. 구드룬, 아하, 구트루네의 영어식 발음이구나. 게르만 전설 <니벨룽겐의 노래>하고 우리가 하는 <니벨룽의 반지>하고는 많이 다르다. 근데 왜 주인공 자매 이름을 고색창연하게 지었을까. 책을 읽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하여간 독후감을 쓰기에 앞서 <무지개>를 다시 훑어보았다. 분명 톰 브랑웬의 양녀 애나가 낳은 딸이 어슐라. 그런데 어떻게 가족이름이 할아버지와 같을 수 있을까. 맞아, 맞아. 톰 브랑웬이 지극하게 아꼈던 양녀 애나 렌스키는 톰의 조카인 윌 브랑웬에게 시집가 똑똑한 첫째 딸 어슐라 브랑웬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 <사랑에 빠진 여인들: Women in Love>은 분명하게 <무지개>의 후속 작으로, 어슐라는 일찍이 폴란드 귀족 안톤 스크레벤스키의 사생아를 임신하기까지 했던 첫사랑에 실패하고 부모가 사는 집에 돌아와, 동네 학교 교사로 일하며 어느덧 스물여섯 살을 먹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때 런던에서 소품 조각을 해서 나름대로 신진 예술가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한 살 아래 동생 구드룬 역시 당분간이란 단서를 단 채 집으로 돌아와 자매가 오랜만의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것. 그러니 이 책을 읽으실 분은 먼저 <무지개>를 보신 다음에 선택을 하는 편이 좋겠다.
 D.H. 로렌스의 초기 히트작인 <아들과 연인>도, <무지개>도 무대가 영국 중부지방에 있는 탄광촌인데, 로렌스 자신이 탄광촌인 이스트우드 출신이란다. 어려서 숱하게 보고 들은 것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봐야겠다. 이 책에서도 주된 무대 벨도버 역시 탄광촌이긴 하다. 그러나 <무지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인들’의 아버지 윌은 레이스 도안을 하다가 나이 들어 어슐라가 재직하는 학교의 시간제 공예교사를 하고 있고, 딸들이 교사와 예술가 직업을 가지고 있어 시골 중산층 계급 정도의 인물들이다. 이 가족은 벨도버 지방이 유지들이 여는 파티에 ‘머리수 채울 요량의’ 초대를 받는 정도이지만 구드룬의 놀라운 외모 덕에 인근에 그래도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다. 로렌스, 하면 연애소설. 맞지? 그렇다. 이 책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스물여섯, 스물다섯, 두 여성이 등장하며, 소설의 무대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봐서 20세기 초반으로 봐야겠다. 벨도버에서 가장 큰 탄광 사장의 맏아들 제럴드와 그의 절친한 친구 버킨. 이렇게 두 명이 이 ‘여인들’하고 맺어지게 된다.
 후주後註까지 합쳐 80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어찌 한 마디로 소개할 수 있을까. 분명하게 연애소설이고, 사랑을 다루는 작품답게 4,783번 정도 ‘사랑’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의 탈고 시기(1917년)가 시기인 만큼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주인공들도 당시 기준으로 봐서 이미 푹 곰삭은 노처녀들이며, 중요한 남자 주인공 버킨은 시도 때도 없이 비극적 세계관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는 소설을 시작해서, 어슐라와 결혼을 하고, 주인공 네 명이 함께 떠난 인스부르크로의 겨울여행을 즐길 때까지, 초지일관하게, 인류는 지구를 떠나거나 멸종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설파하고 있다. 전형적인 우거지 죽상인데 우리의 어슐라는 뭐 때문에 이런 맛이 좀 간 남자가 좋았을까. 큰 탄광회사의 사장 아들이자 실질적인 경영자인 제럴드는 20세기 초에 벌써 탄광회사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감안했으며, 오랜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아버지의 방을 아침마다 열어보며 오늘 아침엔 틀림없이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항을 점검한다. 그러다 정작 아버지가 죽어버린 비 오는 밤, 진흙길을 정처 없이 걸어 열린 브랑웬 댁에 침입해 구드룬의 방문을 열고 동침해버린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기 15페이지 전, 또 한 번의 죽음을 앞두고 이번엔 눈 쌓인 인스부르크의 산등성이로 또 한 번 무작정 길고 긴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거 정말 연애소설 맞아? 하는 것. 연애소설이기는커녕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처한 인류와 영국, 국가들, 문화 등에 대한 비판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이건 주로 버킨이 유도하는 대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역자 해설에서 손영주는 “등장인물들의 토론을 통해 민족과 국민, 국가 등에 관한 당시의 민감한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룰 뿐 아니라, 전시에 한층 보수화하게 마련인 정치 담론 및 여론에 상당히 도전적인 반애국적인 시각과 정서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맞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정확한 단어로 설명해주었다. 이럴 때 역자의 해설이 참 반갑다.
 아, 역자 손영주 이야기가 나왔으니, 웬만하면 말 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정말?), 한 마디 해야겠다. 현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손영주는 이 책을 번역해서 제9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단다. 유영번역상은 영어로 된 원작을 한국말로 잘 번역한 책의 역자에게, 1년에 한 명한테 주는 상이다. 원서 복사본 1권과 해당 원서를 번역한 책 한 권을 제출해 상을 신청하면 그걸 심사해서 대상자를 뽑고, 수상자에겐 상패와 세금 포함해 1천만 원을 준단다. 실 수령금액은 989만 원가량 될 거다. 기타소득의 세율 1%, 여기에 주민세 1%에 대한 10%. 그런데 유영번역상. 이거 혹시 교수들 아니면 일부 이름난 번역가들이 서로 돌려 먹는 거 아냐? 나는 지금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오역이 물결처럼 넘치는지,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하는 거 아니다. 전에 본고사 보던 시절, 본고사 문제로 한 번도 빠지지 않던 것. “다음 글을 우리말로 옮기시오.” 이에 대한 답안지를 읽는 거 같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3인칭 대명사, 지시대명사, 관형사 “그”와 “이”. 그리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마구 적용하는 단어, “사악하다.” 하다못해 조금 되바라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착한 심성을 지닌 10대 초반의 아가씨가 행동하는 걸 보고도 거침없이 “사악하다”라는 단어를 던져준다. “사랑”이 4,783번 나온다면 “사악하다”는 말은 726번 정도 나온다. 아무한테, 아무 행동에 대고 그냥 편하게 “사악하다”는 말을 쓴다. 사악하다는 단어가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사악하다”를 그냥 샘플로 얘기한 것이지, 다른 표현에서도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노력을 덜 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 그런 거 있잖은가. 읽어나가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듯한 단어가 ‘딱’ 꽂혀있으면 ‘팍’ 와 닿는 불편함. 요즘 읽은 다른 책들과 비교해 유난히 많았다는 건 좀 밝혀야 될 듯.
 그러나 진짜 나를 미치게 만든 건 사악할 정도로 무수하게 쏟아지는 주격대명사 “그”, “그녀”, “그들”, 소유격대명사 “그의”, “그녀의”, “그들의”, 목적격대명사 “그를”, “그녀를”, “그들을”, “그것을”, “그것들을”, 지시대명사 “그”, “이”, 관형사 “그”, “이”들. 좋다, 좋아. 원문을 정확하게 한글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 본고사 시험 치루는 기분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분수대도 아니고 폭포 수준으로 남발하니 읽는 사람은 정말 돌아버린다. 근데 또 일정 페이지를 넘기면 아주 좋은 문장이 한동안 등장한다. 이거 왜 이런 거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을유문화사 편집자들이 책을 부분부분 쪼개서 교정, 교열, 편집한 건가? 아니면 역자 손영주의 대학원 다니는 제자들이 책을 부분부분 쪼개서 번역한 걸 지도교수 이름으로 출판사에 가져다 준 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죄 받는다, 죄 받아. 그렇지? 죄 받겠지? 진짜 궁금한 건, 역자가 자신이 번역한 결과물을 정말 읽어봤을까? 하는 점. 읽어봤겠지. 안 읽어봤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죄 받는다, 죄 받아. 우리나라 영어번역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유영번역상 수상작 가지고 말이야. 그렇지? 내 말 맞지? 정말 맞겠지? 맞고 싶으냐고?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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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14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리커버 에디션도 나오고해서 어떤가 찾아보는 중에 Falstaff님이 번역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을 보고 일단 첨가로 했습니다. ㅋㅋ 저도 대명사 남발을 포함해서 기계번역처럼 한 작업들을 만나면 견디기 힘들것 같네요. ㅜㅜ

Falstaff 2021-08-14 09:49   좋아요 0 | URL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견디기 힘들 것 같˝은 걸 권할 수는 없고요, 뭐 물론 유영 번역상을 받았으니 제 의견이 틀렸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인연이 되면 이 책을 읽을 기회도, 다른 번역을 읽을 수도 있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무고한 존재 대산세계문학총서 146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지음, 윤병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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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년 발표한 장편. 원제는 L'Innocente. 이 작품을 통해 전 유럽에 유명세를 떨쳤다고 하지만 19세기 말 유럽의 열등국가 이탈리아의 작가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위하여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그게 1892년. L'Innocente를 위키피디어에서는 우리말로 ‘죄 없는 자’라고 번역을 했으나, 진짜 책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로 문학과지성에서 제목을 단 “무고한 존재”가 더 어울리겠다. 내가 또 읽어본 단눈치오로 말할 거 같으면 <무고한 존재> 몇 년 후에 발표한 <쾌락>이 있어서 독후감까지 쓴 바도 있다. <쾌락>에서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러했다.
 “그녀는 살짝 쉰 목소리로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같이 죽어요.’”
 아, 얼마나 기막히게 아름다운 퇴폐미이었던가. 그렇다. 19세기 말 적的인 퇴폐미. 지금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기가 막힌 예술지향의 퇴폐미가 작품 전체에 걸쳐 뚝뚝 떨어지는데, 그건 이 <무고한 존재>에서도 그러하다.
 이 책에선 주인공 ‘나’ 툴리오 헤르밀은 슬하에 딸 둘을 둔 유부남. 한때는 아름다운 아가씨 줄리아나를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에 이르고, 사이에서 아이도 둘 낳아 잘 길러왔으나, 언제부터인지 아내 줄리아나를 향한 사랑은 마치 어려서 죽은 누이 코스탄자와의 관계와 거의 비슷하게 ‘순수한 우정’의 관계로 접어들었다. 좋다. 오래 산 부부가 뭐 그럴 수 있지. 그리하여 혈육 같은 애정으로 보살피고, 다독거리고, 챙겨주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름다운 미덕을  죄다 베풀지만, 성적인 애정은 다른 여인에게서 찾는다. 그거, 문제다. 진실하고 순수한 우정으로 살기엔 아직 너무도 젊은 부부한테 이게 무슨 일이냔 말이지. 그런데 시기도 딱 맞추어 줄리아나의 생식기에 깊은 병이 들어 이제 한 번의 임신만으로도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룰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내의 깊은 병으로 순수한 우정에 발동이 걸린 남편 툴리오는 며칠 밤을 새우며 외과수술을 받은 아내를 정성껏 간호하지만, 욕정의 화신인 정부의 호출, “그래서 안 오겠다고? 좋아, 오늘이 아니라면 다시는 오지 마” 단 한 줄의 전보를 받고 기꺼이 아내 곁을 떠나 정부의 품으로 달려간다. 아내의 병은 거의 다 치료했고 그리하여 지극하고 순수한 우정의 행위도 거의 다 완료된 거 같으니까. (여기까지가 긴 서문의 형식으로 쓰여 있다.)
 하지만 정부와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는 거 보셨나? 드디어 사랑이 식어 서로 이별을 고하니, 이제 순수한 우정의 관계에 있던 아내를 행한 깊은 사랑, 진정한 사랑이며,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영원무궁하게 지속되어야 하는 사랑임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아내에게 새로이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게 몇 페이지나 계속될 만큼 구구절절, 사내가 참 말도 많다. 그 가운데 내 눈길을 끈 문장들을 소개한다.
 “(전략) 그래서 당신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야. 그래서 수년 동안 잔인하도록 방탕한 생활에 내 모든 기력을 탕진했던 거야. 얼마나 잔인했는지 마치 감옥에 갇혀 매일같이 조금씩 죽어가는 죄수의 두려움과 다를 바 없는 공포 속에서 살았지. 내 영혼 속에 이 빛이 비치기 전까지, 이 중요한 진실을 내가 깨닫기 전까지, 수년 동안 어둠 속을 헤매면서 살아왔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어. 당신뿐이야. 나한테 달콤하고 따뜻한 여자는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어. 내가 꿈꾸던 가장 착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이야. 당신은 내게 유일무이한 존재야. 당신이 집에 있는 동안 난 당신을 먼 곳에서 찾고 있었을 뿐이야…… 이해해? 이제 이해하겠어? 내가 당신을 멀리서 찾고 있는 동안 당신은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 거야. 아! 당신이 얘기해봐.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사실 아냐? 그런 사랑의 증거라면 차라리 눈물을 조금이라도 더 흘리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123쪽. 고딕체는 내가 강조목적으로 썼음)
 읽어보셨으면 얼마나 징그러운 남자인지 팍 이해가 되시리라. 정말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잘 한다. 여기 뿐 아니라 뒤쪽에서도 ‘나’ 툴리오가 아내에게 구라를 푸는 긴 장면이 또 등장하는데, 대사 하나만 보면 낭만적 퇴폐미 같은 걸 잘 감각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도 최고의 여인,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 바로 자기 아내임을 이제야 알았다니, 이거 참. 근데 잘 보시라. 본문만 410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에 이 장면이 123쪽. 그냥 여기서 말면 소설이 될 수 없는 일. 우리의 줄리아나 여사, 당대 부르주아 및 귀족 계급에선 가끔 그러기도 했듯이, ‘순수한 우정’의 관계만 갖고 있던 여사가 그만 임신을 해버렸다. 하지만 줄리아나 여사의 임신은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 그걸 알고 있던 툴리오가 정말 아내와 같은 침상을 썼을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의 여사님, “홧김에 서방질” 제대로 한 거다.
 인생에 단 한 번도 경제생활을 해보지 않은 귀족 출신의 도련님 툴리오의 기분이 어땠을까. 할 줄 아는 건 오직 하나, 여자 꼬드겨 자신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 물론 여기엔 애정 만들기에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생명을 건 결투와, 결투에서 상대에게 죽음이나 중상을 입히기 위한 검술훈련도 포함하지만, 하여간 그거 말고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나도 해본 적 없는 작자가, 그간 자신이 아내의 속을 무진장 썩인 것을 심사숙고하여 아내의 해산을 용인하기로 결정을 했으나,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남자의 질투’를 어쩔겨? 그리고 지금 딸만 둘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작위와 전 재산을 상속할 아들이 태어나면 그건 또? 좋다, 예비 독자가 읽어볼 수 있는 독후감이지만 밝혀버리겠다. 마나님이 아들을 생산하는데, 아내의 아들에 ‘나’ 툴리오의 친아버지 이름 ‘라이몬도’를 붙여주고,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게 하니, 세례를 받는 순간, 사생아 라이몬도가 바로 책의 제목 “무고한 존재”,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L'Innocente가 되는 것.
 궁금하시지? 그래서 사건은 바야흐로, 안 가르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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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영감의 열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
류진윈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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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류진원이 1938년생. 우연이겠지만 소설가 다이허우잉과 같은 해 출생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만 소설가 다이허우잉의 경우엔 그의 수작(나는 놀라운 작품이란 뜻으로 “경작”이라 하고 싶은) 세 편이 다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격랑 속을 어렵게 헤치며 부패하거나, 절망하여 파멸하거나, 극복하는 광경을 담았다면, 극작가 류진원은 <개똥영감의 열반>에서 소작농 출신의 전형적인 중국 평민이 굴곡 심한 역사에 휩쓸려 뒤집히고 자빠져 결국 제목처럼 열반에 드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류진원의 작품은 이것 하나만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북경대학 중문과를 수료한 후 당의 배치에 의하여 16년 동안의 농촌생활 경험을 지니게 된 작가가 비슷한 드라마를 여럿 만들었다니 그리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판 그리스 신화 같은 희곡 <뇌우>를 쓴 차오위가 이이를 아꼈다고 한다. 내가 알았던 중국인 희곡 작가가 차오위와 라오서, 가오싱젠, 딱 세 명이었는데, 이들이 이리저리 엮이는 걸 새롭게 아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독후감 본론으로 들어가, 열반을 한 개똥영감. 열반이라는 불교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것으로, 중이 죽는 거. 입적入寂과 같은 말. 그리고 다른 뜻으로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불교의 궁극적 실천 목적”이라 나와 있으며 비슷한 말로, “비르나바”, “대적정”, “멸도滅度”가 있단다. 저 오대산 중턱에 가면 적멸보궁이란 곳이 있다. 불교에선 그리도 열반에 대한 강박/갈망이 있는 걸까. 난 불교에 대해서도 완전 무식하다. 그래도 아무리 ‘열반’이 불교의 완벽한 실천 목적이라 하더라도, 산길을 가다가 중을 만나 두 손바닥을 붙여 합장한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며 “스님, 열반하세요.”라고 인사하면 귀싸대기 얻어터지겠다는 건 짐작할 만하다. 근데 뭐라 인사해야 하나? 소설책 보면 “성불하세요.” 대강 이렇게 말하는 거 같기는 한데. 중이나 신부, 목사들 만나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생까버리는 게 최고다. 그러면 적어도 나중에 지옥의 유황불엔 떨어지지 않을 듯해서. 근데 가만 생각하면, 불생불멸의 법칙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할 거 같다. 그렇지 않고 산 상태에서 열반에 드는 일은, 해당자가 미치면 되지 않을까? 죽은 상태나 선한 광인의 상태나 그게 그거니까.
 그럼 다시 개똥영감으로 돌아오면, 개똥영감이 죽었다는 얘길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불생불멸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일까. 결론은, 별로 두껍지 않으니 직접 읽어보시고 스스로 내시라는 거.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개똥영감은 미친 상태로 등장하니. 즉, 처음부터 열반의 상태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어찌하여 진짜 열반, 즉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이 희곡을 1985년 가을에 썼단다. 그럼 독자 혹은 연극의 관객이 작품을 읽거나 본 다음에 각자 알아서 결정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열린 결말이라는 장치. 이때 개똥영감의 나이가 75세 가량이니 어느 열반이든지 다 어색하지는 않다. 더구나 일찌감치 우리의 주인공 개똥영감은 이미 미친 상태, 즉 광인의 반열에 올라 벌써 죽은 공산주의에 의한 해방 전 지주 치융니엔의 귀신과 대화를 비롯한 접신도 가능하며 심지어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젊은 시절 치융니엔의 집에서 머슴을 살 때, 융니엔이 개똥이를 문루에 매달고 물에 적신 삼줄을 채찍삼아 등짝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때린 적이 있어 이 문루에 대한 애증이 대단하다. 일찍이 일본과의 전쟁과 이어진 내전 당시에 치씨 가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 때, 개똥이 혼자 남아 드넓은 평야의 익은 곡식을 추수했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개똥이 혼자 넓은 평야에 가득한 참깨를 털어 항아리란 항아리, 심지어 신발에까지 참기름을 그득하게 재워놓을 수 있었으며, 참기름에 튀긴 꽈배기를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였단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철수하고 백군을 지지하는 환향단還鄕團이 몰려와 졸지에 생사가 왔다 갔다 할 때, 개똥이가 득달같이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곳이 공산당 팔로군. 흠. 그러니 무대는 틀림없이 중국의 북쪽 어느 촌 동네렸다. 그렇게 공산당에 의해 해방이 되자, 치씨 집안은 동네 빈민들한테 균등하게 배분이 되고, 치씨는 당연히 마을의 가장 저급의 출신성분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때, 개똥이는 치씨 가문의 부동산 가운데 애증의 대상이었던 문루를 차지한다.
 전쟁 중에 땅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 작지만 좋은 땅을 구입한 개똥이는? 불행하게도 공산당에 의한 토지 몰수를 피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넋이 나가버린다. 광증이 생긴 것. 이때부터 개똥영감은 새로 얻은 젊은 아내도 못 알아보고, 대신 이미 최하급 출신성분인 치융니엔의 귀신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부지런하고 천생 농사꾼인 개똥영감을 미치게 만든 중국의 근대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화혁명을 준비하고, 이어서 개방과 현대화를 이루게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 이것들이 다 모여서 결국 결정적으로 이미 살짝 미쳐버린 개똥영감을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든다. 세상 어느 곳보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친 중국의 20세기를 관통해 삶을 산 개똥영감. 그리하여 영감은 기어이 문루에 불을 붙이려 성냥을 긋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치융니엔 귀신은 옆에서 쓸데없는 나발이나 불어대고……. 그게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농촌지역 보통의 중국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됐던 간에 열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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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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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졸라가 1891년에 발표한 작품. 필생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20편의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두 번째 작인 <쟁탈전>이 끝난 바로 다음해부터 4년 여 간을 그렸다. <쟁탈전>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티드 루공이었다가 ‘사카르’라고 성姓을 바꾼 탁월하지만 탐욕과 광기의 인물이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내가 읽은 여덟 편의 총서에서 사카르가 유일하게 두 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사카르 말고 다른 인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쟁탈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부동산 투기사업에서 파산한 사카르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젊은 아내는 죽고, 3백만 프랑이란 거액의 지참금을 가져온 며느리가 일찍 죽어 졸부가 된 외아들과도 거의 완벽하게 절연한 상태이며, 나폴레옹 3세 제정 정부의 장관에 오른 둘째 형 위젠 루공은 친동생이 파산했기 때문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오히려 그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쟁탈전>에서 사카르는 지중해 항구 다수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회사를 사기꾼 집단으로 치부하고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으며, 해운회사는 정말로 허위의 유령회사임이 밝혀지는 일이 생겼었다. 그러나 <돈>에서는 다년간 소아시아에서 지내면서 ① 지중해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포함한)해상운송 회사, ② 리비아 지역의 거대한 은 광산을 개발하는 회사, ③ 소아시아 일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철도 회사가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이 회사들의 건설과 분명한 성공을 통해 교황은 로마에서 베이루트로 안전하게 모셔와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가톨릭 세계주의자 자매 아믈랭과 카롤린 부인이 등장해, 사카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 이태리와 유럽은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를 이탈리아 영토로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결론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리하여 아믈랭 자매는 시끄러운 로마에서 예수의 고향인 베이루트로 교황청을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 또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사카르는 위 세 가지 사업 아이템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을 만들고 스스로 이 ‘만국 은행’의 사장에 취임한다. 문제는 회사 창설에 필요한 주식발행을 하면서 진짜 돈을 내고 주식을 손에 쥐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거. 일단 회사를 먼저 만들어놓고 수익이 발생하면 배당을 통해 자신들의 주식대금을 지불하는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행각이다.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이사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믈랭을 이사회의 대표로 추대하였으나 아믈랭은 엔지니어로서 회사를 설립한 다음 거의 모든 시간을 소아시아와 로마에서 지낸다. 그리하여 만국 은행에 남은 이사들이라고는 거의 전부 사기꾼. 이들은 두 번에 걸친 증자로 거액을 모으고, 구름 높이만큼, 거의 성층권을 뚫을 기세로 주식가격을 올려놓는데 전력을 다한다. 여기에 사카르가 하는 짓이란 바로 자사주 매입. 나는 아직까지 주식투자를 해보지 않아 잘 모른다(그래서 여태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식에 관해 많이 아시는 분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여간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일확천금의 꿈속을 헤매게 하다가 결국 한 방에 파산에 이르게 하고 만다는 내용. 내가 여간해서는 이렇게 작품의 결말을 소개하지 않지만, <돈>의 경우 졸라 특유의 질주, 최고가까지 주가를 몰아 올려칠 때부터 결국 이런 결말이 등장할 것이란 건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여러 행태들. 아믈랭과 카를린 부인처럼 정직하지 않게 번 돈에 관해선 애정이 없는 사람, 남편이 부도덕하게 벌어들인 수억 프랑의 상속재산을 모두 빈민구휼이나 고급스런 고아원, 양로원, 학교 등을 위한 사업에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쏟아 부은 다음 애초 예정처럼 카르멜회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대공부인, 평생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우연히 손에 넣은 증권 덕에 30년 간 번 돈보다 한 시간 만에 오른 주식으로 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눈이 돌아가 전 재산을 날리는 풍경, 투기에 유리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슴없이 몸을 허락하는 남작부인 등, 돈에 얽힌 숱한 일화가 담겨있다.
 이 정도면 책에 대한 소개는 다 했다고 본다. 곁가지 몇 개만 더 얘기하면 되겠다.
 작 중 두 명의 거대 악당이 등장한다. 주인공 사카르와 그의 필생의 적 군데르만. 군데르만은 가까운 시기에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프러시아가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하리라는 걸 예언하는 냉정한 유대인 승부사다. 당연히 사카르는 군데르만에 대한 악감정에 싸여있다. 그리하여 사카르는 이렇게 선언한다.
 “아! 더러운 유대인 같으니라고! 개가 고기 뼈를 으스러뜨려 먹어치우듯 그자를 이빨로 으스러뜨려 먹어치워야 직성이 플릴 것 같아! (중략) 스스로 향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몰락시키기 전에 그 이론의 여지 없는 왕부터 처치하는 거야.” (131쪽)
 이 책을 간행한 것이 1891년. 드레퓌스 사건이 1894년. 나는 혹시 사카르의 입을 통해 졸라가 자신의 생각을 발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고, 그리하여 책 읽다가 드레퓌스 사건의 시기를 검색해봤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평소에 반유대인 의식이 있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자신의 의식을 바꾸었을 계기로 작용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 544쪽에 여주인공 카롤린 부인이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갇힌 사카를 찾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이 워낙 유명해 굳이 감옥의 이름까지 썼다. 왜 유명한지는 직접 검색해보시라. 나 기특하지?)
 “정말 유별난 생각을 하시네요! (중략) 저한테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에요. 만약 그들이 별도의 인간들이라면, 그건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이죠.“
 그렇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생을 산 에밀 졸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종적인 편견을 가졌을 리가 없다.
 두 번째는 역시 졸라의 총서에서 거의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질주’가, 이 책에선 정말로 구체적인 단어로 나온다.

 

 “특히 그녀(카롤린 부인)를 괴롭힌 것은 만국 은행을 몰고 가는 그 끔찍한 속도, 그 멈추지 않는 질주였던바, 만국 은행은 모든 것이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302쪽)

 

 이 문장에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는 이미 졸라의 앞선 작품에서 마지막의 결정적 장면으로 뜨겁게 묘사를 해놓았었다. <인간 짐승>. 술 취한 수천 명의 병사를 태우고 죽음이 기다리는 전선으로 무한질주를 하는 석탄을 가득 채운 열차. 다른 문제는 이 문장이 나쁜 문장의 대표적인 예라는 점. 3인칭 대명사나 지시 대명사가 아닌 관형사로의 “그”를 역자는 한 문장에서 두 번이나 쓰고 있다. “그 끔찍한 속도”와 “그 멈추지 않는 질주.” 위 문장에서 이 두 개의 “그”를 빼고 읽어보시라. 훨씬 부드러울 걸? 만일 역자가 이 독후감을 읽는다면, 원작을 원형대로 번역하기 위해서 그랬다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생각하는 이 역자의 문제는, 일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갈 때에는 자연스럽게 읽히던 문장이, 사색적 기술이나, 졸라가 나름의 철학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칭 책 좀 읽는 독자 중의 한 명인 나도, 같은 문장을 대여섯 번씩 읽어야 했으며,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는 거. 직역을 하든, 의역을 하든, 번역을 하든, 오역을 하든, 한국의 일반적 독자는 프랑스 언어로 된 원본을 대조해가며 읽지 못하고 오직 역자가 다시 쓴 책을 읽는다. (내가 프랑스 소설을 원어로 읽을 줄 알아도, 미쳤다고 그걸 대조해가며 읽을까, 그냥 원서를 보고 말지!) 그럼 돈을 내고 책을 산 독자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을 편하고 알기 쉽게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욕심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문장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뒤져볼 생각은 없다.
 세 번째로, 사카르는 감옥에서, 자신의 그릇된 행위 때문에 졸지에 파산상태에 이른 숱한 개미 투자자들의 비참함을 토로하고 있는 카롤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승리할 수 없었다고, 말도 안 돼! 내겐 돈이 모자랐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십만 명의 군사만 더 있었다면 그는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지도는 바뀌었을 것이오. 내게 몇억 프랑만 더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거요.” (542쪽)
 사카르의 돈은 나폴레옹에겐 군사와 같다. 워털루 전쟁에서 스러져간 많은 인간들은 역사에서 거의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는 군사, 즉 개미 투자자들을 위해서는 조금도 애정이 없다. 나는 왜 여기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렸을까.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을 떠올릴 때마다 진땀을 흘리며 한 누추한 개인의 무의미함, 이蝨 같은 존재인 개인의 사소함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과, 사카르가 개미 투자자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조금은 닮은 듯해서 그랬나 싶다.
 마지막으로 루공 가문 특유의 탐욕과 광기라는 측면에서 사카르의 돈에 대한 집착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쟁탈전> 독후감에 써놓았으니 여기에선 사카르의 아들 막심이 그의 아버지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만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접겠다.
 “오! 그렇지만 분명히 해둡시다. 아버지(사카르)가 수전노로서, 돈을 태산처럼 쌓아 지하실에 감춰두기 위해 돈을 사랑하는 건 아녜요. 정말 그건 아녜요! 아버지가 도처에서 돈이 쏟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떤 샘에서도 돈을 퍼올린다면, 그것은 돈이 자기 집에서 격류처럼 흘러다니는 걸 보기 위해서이고, 돈이 가져다주는 사치, 쾌락, 권력을 즐기기 위해서죠.... 정말 그렇다니까, 아버지는 핏속에 그런 게 있어요.”  (306~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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