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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에밀 졸라가 1891년에 발표한 작품. 필생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20편의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두 번째 작인 <쟁탈전>이 끝난 바로 다음해부터 4년 여 간을 그렸다. <쟁탈전>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티드 루공이었다가 ‘사카르’라고 성姓을 바꾼 탁월하지만 탐욕과 광기의 인물이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내가 읽은 여덟 편의 총서에서 사카르가 유일하게 두 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사카르 말고 다른 인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쟁탈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부동산 투기사업에서 파산한 사카르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젊은 아내는 죽고, 3백만 프랑이란 거액의 지참금을 가져온 며느리가 일찍 죽어 졸부가 된 외아들과도 거의 완벽하게 절연한 상태이며, 나폴레옹 3세 제정 정부의 장관에 오른 둘째 형 위젠 루공은 친동생이 파산했기 때문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오히려 그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쟁탈전>에서 사카르는 지중해 항구 다수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회사를 사기꾼 집단으로 치부하고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으며, 해운회사는 정말로 허위의 유령회사임이 밝혀지는 일이 생겼었다. 그러나 <돈>에서는 다년간 소아시아에서 지내면서 ① 지중해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포함한)해상운송 회사, ② 리비아 지역의 거대한 은 광산을 개발하는 회사, ③ 소아시아 일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철도 회사가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이 회사들의 건설과 분명한 성공을 통해 교황은 로마에서 베이루트로 안전하게 모셔와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가톨릭 세계주의자 자매 아믈랭과 카롤린 부인이 등장해, 사카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 이태리와 유럽은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를 이탈리아 영토로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결론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리하여 아믈랭 자매는 시끄러운 로마에서 예수의 고향인 베이루트로 교황청을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 또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사카르는 위 세 가지 사업 아이템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을 만들고 스스로 이 ‘만국 은행’의 사장에 취임한다. 문제는 회사 창설에 필요한 주식발행을 하면서 진짜 돈을 내고 주식을 손에 쥐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거. 일단 회사를 먼저 만들어놓고 수익이 발생하면 배당을 통해 자신들의 주식대금을 지불하는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행각이다.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이사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믈랭을 이사회의 대표로 추대하였으나 아믈랭은 엔지니어로서 회사를 설립한 다음 거의 모든 시간을 소아시아와 로마에서 지낸다. 그리하여 만국 은행에 남은 이사들이라고는 거의 전부 사기꾼. 이들은 두 번에 걸친 증자로 거액을 모으고, 구름 높이만큼, 거의 성층권을 뚫을 기세로 주식가격을 올려놓는데 전력을 다한다. 여기에 사카르가 하는 짓이란 바로 자사주 매입. 나는 아직까지 주식투자를 해보지 않아 잘 모른다(그래서 여태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식에 관해 많이 아시는 분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여간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일확천금의 꿈속을 헤매게 하다가 결국 한 방에 파산에 이르게 하고 만다는 내용. 내가 여간해서는 이렇게 작품의 결말을 소개하지 않지만, <돈>의 경우 졸라 특유의 질주, 최고가까지 주가를 몰아 올려칠 때부터 결국 이런 결말이 등장할 것이란 건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여러 행태들. 아믈랭과 카를린 부인처럼 정직하지 않게 번 돈에 관해선 애정이 없는 사람, 남편이 부도덕하게 벌어들인 수억 프랑의 상속재산을 모두 빈민구휼이나 고급스런 고아원, 양로원, 학교 등을 위한 사업에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쏟아 부은 다음 애초 예정처럼 카르멜회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대공부인, 평생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우연히 손에 넣은 증권 덕에 30년 간 번 돈보다 한 시간 만에 오른 주식으로 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눈이 돌아가 전 재산을 날리는 풍경, 투기에 유리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슴없이 몸을 허락하는 남작부인 등, 돈에 얽힌 숱한 일화가 담겨있다.
이 정도면 책에 대한 소개는 다 했다고 본다. 곁가지 몇 개만 더 얘기하면 되겠다.
작 중 두 명의 거대 악당이 등장한다. 주인공 사카르와 그의 필생의 적 군데르만. 군데르만은 가까운 시기에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프러시아가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하리라는 걸 예언하는 냉정한 유대인 승부사다. 당연히 사카르는 군데르만에 대한 악감정에 싸여있다. 그리하여 사카르는 이렇게 선언한다.
“아! 더러운 유대인 같으니라고! 개가 고기 뼈를 으스러뜨려 먹어치우듯 그자를 이빨로 으스러뜨려 먹어치워야 직성이 플릴 것 같아! (중략) 스스로 향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몰락시키기 전에 그 이론의 여지 없는 왕부터 처치하는 거야.” (131쪽)
이 책을 간행한 것이 1891년. 드레퓌스 사건이 1894년. 나는 혹시 사카르의 입을 통해 졸라가 자신의 생각을 발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고, 그리하여 책 읽다가 드레퓌스 사건의 시기를 검색해봤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평소에 반유대인 의식이 있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자신의 의식을 바꾸었을 계기로 작용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 544쪽에 여주인공 카롤린 부인이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갇힌 사카를 찾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이 워낙 유명해 굳이 감옥의 이름까지 썼다. 왜 유명한지는 직접 검색해보시라. 나 기특하지?)
“정말 유별난 생각을 하시네요! (중략) 저한테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에요. 만약 그들이 별도의 인간들이라면, 그건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이죠.“
그렇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생을 산 에밀 졸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종적인 편견을 가졌을 리가 없다.
두 번째는 역시 졸라의 총서에서 거의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질주’가, 이 책에선 정말로 구체적인 단어로 나온다.
“특히 그녀(카롤린 부인)를 괴롭힌 것은 만국 은행을 몰고 가는 그 끔찍한 속도, 그 멈추지 않는 질주였던바, 만국 은행은 모든 것이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302쪽)
이 문장에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는 이미 졸라의 앞선 작품에서 마지막의 결정적 장면으로 뜨겁게 묘사를 해놓았었다. <인간 짐승>. 술 취한 수천 명의 병사를 태우고 죽음이 기다리는 전선으로 무한질주를 하는 석탄을 가득 채운 열차. 다른 문제는 이 문장이 나쁜 문장의 대표적인 예라는 점. 3인칭 대명사나 지시 대명사가 아닌 관형사로의 “그”를 역자는 한 문장에서 두 번이나 쓰고 있다. “그 끔찍한 속도”와 “그 멈추지 않는 질주.” 위 문장에서 이 두 개의 “그”를 빼고 읽어보시라. 훨씬 부드러울 걸? 만일 역자가 이 독후감을 읽는다면, 원작을 원형대로 번역하기 위해서 그랬다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생각하는 이 역자의 문제는, 일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갈 때에는 자연스럽게 읽히던 문장이, 사색적 기술이나, 졸라가 나름의 철학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칭 책 좀 읽는 독자 중의 한 명인 나도, 같은 문장을 대여섯 번씩 읽어야 했으며,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는 거. 직역을 하든, 의역을 하든, 번역을 하든, 오역을 하든, 한국의 일반적 독자는 프랑스 언어로 된 원본을 대조해가며 읽지 못하고 오직 역자가 다시 쓴 책을 읽는다. (내가 프랑스 소설을 원어로 읽을 줄 알아도, 미쳤다고 그걸 대조해가며 읽을까, 그냥 원서를 보고 말지!) 그럼 돈을 내고 책을 산 독자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을 편하고 알기 쉽게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욕심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문장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뒤져볼 생각은 없다.
세 번째로, 사카르는 감옥에서, 자신의 그릇된 행위 때문에 졸지에 파산상태에 이른 숱한 개미 투자자들의 비참함을 토로하고 있는 카롤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승리할 수 없었다고, 말도 안 돼! 내겐 돈이 모자랐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십만 명의 군사만 더 있었다면 그는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지도는 바뀌었을 것이오. 내게 몇억 프랑만 더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거요.” (542쪽)
사카르의 돈은 나폴레옹에겐 군사와 같다. 워털루 전쟁에서 스러져간 많은 인간들은 역사에서 거의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는 군사, 즉 개미 투자자들을 위해서는 조금도 애정이 없다. 나는 왜 여기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렸을까.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을 떠올릴 때마다 진땀을 흘리며 한 누추한 개인의 무의미함, 이蝨 같은 존재인 개인의 사소함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과, 사카르가 개미 투자자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조금은 닮은 듯해서 그랬나 싶다.
마지막으로 루공 가문 특유의 탐욕과 광기라는 측면에서 사카르의 돈에 대한 집착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쟁탈전> 독후감에 써놓았으니 여기에선 사카르의 아들 막심이 그의 아버지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만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접겠다.
“오! 그렇지만 분명히 해둡시다. 아버지(사카르)가 수전노로서, 돈을 태산처럼 쌓아 지하실에 감춰두기 위해 돈을 사랑하는 건 아녜요. 정말 그건 아녜요! 아버지가 도처에서 돈이 쏟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떤 샘에서도 돈을 퍼올린다면, 그것은 돈이 자기 집에서 격류처럼 흘러다니는 걸 보기 위해서이고, 돈이 가져다주는 사치, 쾌락, 권력을 즐기기 위해서죠.... 정말 그렇다니까, 아버지는 핏속에 그런 게 있어요.” (306~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