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존재 대산세계문학총서 146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지음, 윤병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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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년 발표한 장편. 원제는 L'Innocente. 이 작품을 통해 전 유럽에 유명세를 떨쳤다고 하지만 19세기 말 유럽의 열등국가 이탈리아의 작가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위하여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그게 1892년. L'Innocente를 위키피디어에서는 우리말로 ‘죄 없는 자’라고 번역을 했으나, 진짜 책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로 문학과지성에서 제목을 단 “무고한 존재”가 더 어울리겠다. 내가 또 읽어본 단눈치오로 말할 거 같으면 <무고한 존재> 몇 년 후에 발표한 <쾌락>이 있어서 독후감까지 쓴 바도 있다. <쾌락>에서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러했다.
 “그녀는 살짝 쉰 목소리로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같이 죽어요.’”
 아, 얼마나 기막히게 아름다운 퇴폐미이었던가. 그렇다. 19세기 말 적的인 퇴폐미. 지금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기가 막힌 예술지향의 퇴폐미가 작품 전체에 걸쳐 뚝뚝 떨어지는데, 그건 이 <무고한 존재>에서도 그러하다.
 이 책에선 주인공 ‘나’ 툴리오 헤르밀은 슬하에 딸 둘을 둔 유부남. 한때는 아름다운 아가씨 줄리아나를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에 이르고, 사이에서 아이도 둘 낳아 잘 길러왔으나, 언제부터인지 아내 줄리아나를 향한 사랑은 마치 어려서 죽은 누이 코스탄자와의 관계와 거의 비슷하게 ‘순수한 우정’의 관계로 접어들었다. 좋다. 오래 산 부부가 뭐 그럴 수 있지. 그리하여 혈육 같은 애정으로 보살피고, 다독거리고, 챙겨주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름다운 미덕을  죄다 베풀지만, 성적인 애정은 다른 여인에게서 찾는다. 그거, 문제다. 진실하고 순수한 우정으로 살기엔 아직 너무도 젊은 부부한테 이게 무슨 일이냔 말이지. 그런데 시기도 딱 맞추어 줄리아나의 생식기에 깊은 병이 들어 이제 한 번의 임신만으로도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룰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내의 깊은 병으로 순수한 우정에 발동이 걸린 남편 툴리오는 며칠 밤을 새우며 외과수술을 받은 아내를 정성껏 간호하지만, 욕정의 화신인 정부의 호출, “그래서 안 오겠다고? 좋아, 오늘이 아니라면 다시는 오지 마” 단 한 줄의 전보를 받고 기꺼이 아내 곁을 떠나 정부의 품으로 달려간다. 아내의 병은 거의 다 치료했고 그리하여 지극하고 순수한 우정의 행위도 거의 다 완료된 거 같으니까. (여기까지가 긴 서문의 형식으로 쓰여 있다.)
 하지만 정부와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는 거 보셨나? 드디어 사랑이 식어 서로 이별을 고하니, 이제 순수한 우정의 관계에 있던 아내를 행한 깊은 사랑, 진정한 사랑이며,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영원무궁하게 지속되어야 하는 사랑임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아내에게 새로이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게 몇 페이지나 계속될 만큼 구구절절, 사내가 참 말도 많다. 그 가운데 내 눈길을 끈 문장들을 소개한다.
 “(전략) 그래서 당신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야. 그래서 수년 동안 잔인하도록 방탕한 생활에 내 모든 기력을 탕진했던 거야. 얼마나 잔인했는지 마치 감옥에 갇혀 매일같이 조금씩 죽어가는 죄수의 두려움과 다를 바 없는 공포 속에서 살았지. 내 영혼 속에 이 빛이 비치기 전까지, 이 중요한 진실을 내가 깨닫기 전까지, 수년 동안 어둠 속을 헤매면서 살아왔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어. 당신뿐이야. 나한테 달콤하고 따뜻한 여자는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어. 내가 꿈꾸던 가장 착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이야. 당신은 내게 유일무이한 존재야. 당신이 집에 있는 동안 난 당신을 먼 곳에서 찾고 있었을 뿐이야…… 이해해? 이제 이해하겠어? 내가 당신을 멀리서 찾고 있는 동안 당신은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 거야. 아! 당신이 얘기해봐.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사실 아냐? 그런 사랑의 증거라면 차라리 눈물을 조금이라도 더 흘리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123쪽. 고딕체는 내가 강조목적으로 썼음)
 읽어보셨으면 얼마나 징그러운 남자인지 팍 이해가 되시리라. 정말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잘 한다. 여기 뿐 아니라 뒤쪽에서도 ‘나’ 툴리오가 아내에게 구라를 푸는 긴 장면이 또 등장하는데, 대사 하나만 보면 낭만적 퇴폐미 같은 걸 잘 감각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도 최고의 여인,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 바로 자기 아내임을 이제야 알았다니, 이거 참. 근데 잘 보시라. 본문만 410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에 이 장면이 123쪽. 그냥 여기서 말면 소설이 될 수 없는 일. 우리의 줄리아나 여사, 당대 부르주아 및 귀족 계급에선 가끔 그러기도 했듯이, ‘순수한 우정’의 관계만 갖고 있던 여사가 그만 임신을 해버렸다. 하지만 줄리아나 여사의 임신은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 그걸 알고 있던 툴리오가 정말 아내와 같은 침상을 썼을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의 여사님, “홧김에 서방질” 제대로 한 거다.
 인생에 단 한 번도 경제생활을 해보지 않은 귀족 출신의 도련님 툴리오의 기분이 어땠을까. 할 줄 아는 건 오직 하나, 여자 꼬드겨 자신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 물론 여기엔 애정 만들기에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생명을 건 결투와, 결투에서 상대에게 죽음이나 중상을 입히기 위한 검술훈련도 포함하지만, 하여간 그거 말고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나도 해본 적 없는 작자가, 그간 자신이 아내의 속을 무진장 썩인 것을 심사숙고하여 아내의 해산을 용인하기로 결정을 했으나,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남자의 질투’를 어쩔겨? 그리고 지금 딸만 둘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작위와 전 재산을 상속할 아들이 태어나면 그건 또? 좋다, 예비 독자가 읽어볼 수 있는 독후감이지만 밝혀버리겠다. 마나님이 아들을 생산하는데, 아내의 아들에 ‘나’ 툴리오의 친아버지 이름 ‘라이몬도’를 붙여주고,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게 하니, 세례를 받는 순간, 사생아 라이몬도가 바로 책의 제목 “무고한 존재”,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L'Innocente가 되는 것.
 궁금하시지? 그래서 사건은 바야흐로, 안 가르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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