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우코와의 대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153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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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사레 파베세, 이 양반이 1950년 8월 어느 날, 마흔 두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토리노에 있는 호텔 ‘로마’의 객실에서 수면제를 한 통 다 삼켜버려 자살에 성공했을 때, 침대 테이블에 수면제 포장지와 함께 놓여있던 책이 바로 이 <레우코와의 대화>라고 한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아니지만 가장 아꼈던 책이라는 증거라고 역자는 말한다. 혹시 자살하고 싶은 분이 파베세의 예를 따라 수면제를 먹고 실행을 하려 하신다면, 포기하시라. 요즘 수면유도제는 독성을 거의 제거해서, 수면제 먹고 죽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많이 먹어 배 터져 죽는 일이라니까. 우리나라 여성주의 작가 누구의 책에서 읽었지만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어떤 책을 읽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예로 들어서였다. 지금은 작가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유럽이나 아메리카 작가였을 것이다. 서양 소설책을 읽자면 숱하게, 유럽인들이 태내적 지식 비슷하게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유하고는 한다. 파베세는 이런 신화의 주인공, 신이 됐건 반신반인이 됐건, 그냥 인간이건, 또는 님프 요정이건 간에, 그들을 등장시켜 해당 오브젝트에 관한 대화를 수록하면서 기존의 신화를 사정없이 비틀어댄다.
 한 예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비명횡사하자 슬픔을 못 이겨 온 숲을 돌아다니면서 리라를 켜며 자신의 비통함을 노래하는 통에 숲 속의 모든 동물들까지 다 절통해하는 참극을 발생시킨다. 너무도 죽은 아내가 보고 싶었던 오르페우스는 땅속나라에 들어가 저승에서도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는 바람에 하데스마저 감동하게 만들어, 저승의 왕 하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로 약속을 한다. 단, 하늘을 보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리하여 에우리디케의 영혼 또는 그림자를 이끌고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데 오르페우스의 뒤에서 졸랑졸랑 따라오던 에우리디케가, 아니 여보, 날 사랑한다면서 내 모습을 어찌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거야? 너 혹시 마음에도 없는데 그냥 의무감에서 나를 다시 살리려는 거 아냐? 뭐 이딴 식으로 바가지 득득 긁어 어쩔 수 없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순간, 마누라님은 한 줄기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는 거. 다들 아시지? 애초에 에우리디케가 죽었을 때, 죽은 마누라를 품에 안고 얼마나 오열을 했던가. 한 번 들어보시라. 

 

 저렇게 누워 있는 사람 품에 안고 노래하면, 오르페우스 역을 하는 가수 쟈넷 베이커의 침이 얼마나 많이 튈까? 세수한 거 같지 않을까?


 그런데 파베세의 오르페우스는 좀 다르다. 절통한 마음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 코키토스와 스틱스 강의 배를 타 저승에까지 간 건 맞다. 하데스를 감동시켜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 것도 맞다. 계단을 오르며 등 뒤에서 아내의 가벼운 발소리가 나고,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직 지하세계의 차가움에 휩싸여 있으면서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이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것뿐임을 자각한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뼈와 피와 살과 골수를 가진 몸으로 완성되고, 입을 통해 무엇인가를 위장으로 쉬지 않고 집어넣어야 하며, 하루에 한 번씩 먹은 양과 비례하여 일정량의 물질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하물며 다시 이 차가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린다. “이제 끝내자.” 단호하게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끊어준다. 파베세의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훨씬 깔끔하지 않나? 우화적이기도 하다. 보리슬라프 페키치가 쓴 <기적의 시대>에서 예수가 지나다가 눈먼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줬더니 눈 뜬 바로 전까지의 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 이런 오지랖하고는! 누가 당신더러 내 눈 뜨게 해달라고 했어? 너나 잘 하세요! 그러고 스스로 다시 자신의 눈을 파내더라는 것. 어째 좀 비슷하지 않나? 우리의 오르페우스, 기껏 에우리디케를 지상에까지 문제없이 이끌어 다시 부활하게 만들었더니 에우리디케 하시는 말씀이, 어째 너는 한 번도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네 맘대로 일을 벌이니, 하며 다시 목매달아 죽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사는 것만 힘든 게 아니다. 죽은 다음에도 힘든 인간 또는 영혼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신화를 비튼 것이 총 27편의 대화 가운데 26편이나 된다. 여기에 들어있지 않은 그리스 신화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몇 개의 서사가 다 이리저리 얽혀있기 때문에. 문제는 나도 우리나라의 보통 독자들과 비교해서 그리스 신화 또는 고전을 많이 알고 있는 편이기는 한데, 태생적으로 신화를 습득하고 있는 유럽인과 비교할 수준은 도무지 안 된다는 거. 그리하여 해당 대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신화의 어느 장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더군다나 기존의 것과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차이를 단박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익시온과 네펠레의 대화. 이걸 알려면 익시온, 네펠레가 누구인지, 어떤 사고를 친 인물/신/반신반인/반인반수인지 알아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익시온? 이름은 기억난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가 사르페돈과 히폴로코스의 대화. 이하동문. 세 번째는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화. 그래, 이건 알겠다.
 역자도 한국의 독자가 이 책을 읽을 때의 곤란함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13개의 각주를 달았는데, 아주 간략한 각주만 읽고 어떻게 26편의 대화를 제대로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쉬엄쉬엄 인터넷 검색해가며 꼼꼼히 읽을 수 있는 독자에게 재미있는 시간, 날들을 줄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시간이 넉넉한 분들이 이 책을 잡으면, 한 서너 달은 훌쩍 지나갈 거 같다.
 한 번 시도해보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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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인간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
궈스싱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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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극작가 궈스싱은 대대로 이름난 바둑 명인을 배출한 기가棋家에서 태어나 이것저것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결국 신문사 북경만보北京晩報에서 수습기자를 했는데, 이때 주어진 ‘업무’가 연극에 대해 취재하고 공연평을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궈스싱은 단기간에 수백편의 연극을 관람하면서 연극에 관한 모든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똑같은 직업 또는 업무를 한다고 해도 누구나 궈스싱처럼 단숨에 한 분야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궁합이 맞아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조금이라도 더 깊게 알고 싶어 하는 끊임없는 호기심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여기까지 이른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 확실한 관점, 이른바 일가견이란 것이 생긴다. 이쯤에서, 특정 노래를 자주 들으면 반드시 그 노래를 불러보는 것처럼, 이이도 어느 날 드디어 자신이 직접 희곡을 써보기에 이르렀다.
 사람에게 따라 간혹 주어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행운이 이런 사람을 맞이할 때,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인데, 연극과 희곡에 대한 궈스싱의 경우, 그가 맞이한 행운은 당대 중국 최고의 연출가 린자오화였다고 한다. 린자오화는 주로 프랑스로 망명한 극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오싱젠과 작업을 하다가 이젠 궈스싱과 작업하며 그를 독려하여 드라마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비록 나이차이가 16년이나 나지만 이 둘의 궁합은 저 춘추시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예를 좇을 정도였다고 역자는 말한다.
 고백하건데, 난 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을 대단히 재미없게 읽은 바 있다.


 (여기까지 쓴 시간이 2018년 7월 21일 오전 8시 조금 넘었었다. 이 날이 토요일. 더워도 너무 더워서, 이제 겨우 오전 8시 조금 넘어 아직도 한국방송에선 <남북의 창>이 한창인데, 그만 썼다. 엉덩이에 진물 날까 도무지 더는 못 앉아 있겠다. 책 읽는 방엔 에어컨이 없다. 여름 끝날 때까지 도무지 휴일엔 책을 읽지도, 독후감을 쓰지도 못하겠다! 지금이 23일 월요일 오전 열시.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계속한다. 얼마나 좋은 회사인가. 하늘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 쏟아지지, 하루 종일 놀다 퇴근하면, 내일 모레, 또 봉급날 돌아오지. 불평하지 말고 하여간 은퇴할 때까지 잘 다녀야겠다. 오해하지 마시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아 쫓아내기 좀 그런지 업무를 최소한으로 줄여주어 하루 종일 시간이 많은 거다. 만 32년 직장생활 중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나? 바로 ‘놀고먹는 거.’ 나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다. 웃어야 해, 말아야 해.)


 다시 이어 쓰자면, 문학적 소양이 별로 없는 내가 읽기에 (위대한 극작가)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보다 <물고기인간>을 포함한 중국현대희곡총서의 작품들이 훨씬 편하고, 쉬워 좋은데, 그게 <버스 정류장>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코드가 숨어있으나 그걸 찾아내지 못해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물고기인간 魚人>은 지극히 우화적이다. 가상의 호수 대청호에 ‘대청어’라는 신화적인 물고기가 산다. 일흔 살 먹은 노인 ‘낚시의 신’이 30년 전에 대청어를 잡다가 함께 낚시를 하던 큰아들이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 대청어란 영물이 대청호에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30년에 한 번 보이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30년 전, 낚시의 신이라 불리는 노인이 화제의 물고기를 거의 잡아채는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질러 물고기의 주위를 돌려버리는 바람에 대청어 대신 맏아들만 물에 빠져죽게 만든 위씨 영감도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이는 호수의 대청어에 대하여 애니미짐animism 비슷하게 숭앙하는 인물로, 대청어가 다시 나타나면 낚시의 신 영감도 돌아와 기어이 대청어를 죽일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30년 동안 호수에서 양어장을 운영하며 시기를 기다린 사람이다.
 물론 희곡에는 한 번도 대청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낚시의 신이라 일컫는 노인은 미끼 없는 빈 바늘과 자신이 직접 나일론 줄을 엮어 만든 낚싯대로 30년 만에 만나는 대청어와 자신의 인생 마지막 대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30년 만이라니까)세대의 대결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되는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다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우화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만 일러드릴 뿐.
 다른 문학작품 또는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희곡 또는 연극도, 읽고 보는 독자/관객이 어떻게 작품을 해석하는가, 느끼는가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극작가, 연출가의 의도도 있겠지만 그들도 독자/관객이 받아들이는 방식까지는 좌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 드라마를 다분히(또는 단순히) 우화적 관점에서 읽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내 독법을 권하지는 않는다. 현대화에 따라 희생하는 자연으로 읽을 수도 있겠고, 해설에서 나와 있듯이 부조리극으로 읽어도 좋으며, 심지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는 말장난만 따라가도 왜 안 되겠는가. 마지막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로 마감해버리는 건, 혹시 짓궂은 작가의 경쾌한 심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두 여덟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국현대희곡총서’를 읽어나가며, 내가 그동안 한국의 현대 희곡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최인훈 전집’에 실린 희곡집 <옛날 옛적의 훠어이 훠어이>에 실린 것들과 천승세의 <만선> 이후 단 한 편의 한국 현대 희곡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게 부끄럽다. 중국의 현대 희곡들을 읽는 일이, 앞으로 이쪽으로도 시야를 넓혀보리라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최인훈 전집에 있는 <옛날 옛적의 훠어이 훠어이>를 위에서 잠깐 얘기한 오늘, 최인훈 선생의 부고가 떴다. 나로하여금 소설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분 가운데 한 명이 또 저물었다. 아, 이런 날 소주 한 병 해야 하는데, 날이 너무 덥다. 아무쪼록 가시는 길, 평안하시라. (앞으로 줄창 삼복 더위에 제사 지낼 자손들이 조금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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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2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어떤 의미로든 이 나라에서 의미 있던 사람 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요. 최인훈 선생의 죽음이 그 바람에 너무 조용히 다뤄진 것 같아서 어떤 면에서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논문을 최인훈으로 썼었거든요. ㅎㅎ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 어제는 저도 술 좀 마셨습니다. 더워서 소주는 아니고 맥주로요. ㅎㅎ

Falstaff 2018-07-24 16:02   좋아요 1 | URL
저도 특정 마트에서만 파는 진로소주 사다가 한 병 깠습니다. 제 좌우명이 ˝진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여서 말입죠. 쿨럭.
저도 최인훈 선생의 전집을 싹 독파한 1인 가운데 한 명으로 당대 작가로 최인훈, 장용학을 최고로 아는 인종입지요. 다른 한 분은 (아, 죽긴 왜 죽어!) 거 참... 생각은 많지만 이야기하기는 좀, 그런 거 있잖아요. ㅠㅠ

잠자냥 2018-07-2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문지에서 나온 <한국 현대 희곡선>이 저는 좋았습니다. 시대별로 엮어놔서 그 흐름을 살펴보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고요.

Falstaff 2018-07-24 15:1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지금 희곡 책들 헌팅 중인데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고대 중세 편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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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8만원, 할인가 7만2천원
ㅎㅎㅎ 정가 80만원 하면 사서 읽겠습니다. 할인가 72만원 주고요.
번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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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강기 2018-07-2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다 합치면 100만원쯤 될 것 같네요..ㅎㄷㄷ 합니다..ㅎㅎㅎ

Falstaff 2018-07-23 22:14   좋아요 0 | URL
호호호...
세상이 너무 더워 다들 미쳐 돌아가요!

여백 2018-08-24 0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디 80만원 될 때 사서 읽을 수 있을 만큼 번창하시기를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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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심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울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신파”라고 부른다. 자신의 문화적 소양에 대하여 약간은 과장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이들은 신파 알기를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파야말로 사람이 문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한 이후 단 한 시기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뭇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왔던 분야다.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의 진실한 사랑과 부모님의 강압을 등에 업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 사이에서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심순애부터, 하필이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는 원수 집안의 자제들이 서로 눈이 맞아 열세 살의 줄리엣과 이 아이의 열댓 살 먹은 애인 로미오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각각 자살을 해버리는 것. 같은 신파임에도 불구하고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원조 신파 <장한몽>이 감히 셰익스피어한테 비비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를 한 마디로 하면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소위 문학성이라 함은 작품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과 그것들이 조합을 이루어 얼마나 섬세하게 심금을 울릴 수 있는가, 즉 측정할 수 없는 작가와 독자의 공명이라 할 수 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요즘 읽은 최고의 신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이 이런 신파가 1940년대 초의 터키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게다가 원작이 그런지 번역을 한 이난아의 대단한 한국어 실력에서 비롯했는지 모르겠지만, 문장의 나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바하틴 알리’는 1907년 출생해서 국가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한 작가. 이이가 글을 써서 1932년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자 흔히 ‘케말 파샤’라 일컫는 국민영웅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욕했다는 죄로 1년간 옥살이를 한 후부터 쓰는 글마다 족족 검열관에게 걸리는 걸 참지 못하고 1948년에 조국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해, 계획을 진짜 실행하다가 불가리아 국경에서 경비대원에게 총 맞아 죽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무려 두 달 반만에 발견된 참으로 험한 팔자의 소유자였다(책 앞날개의 작가소개 참고했음).
 작가 본인은 이렇듯 적극적인 글쓰기 및 표현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선 아무 이유 없이 해고당해 대학 동창에게 박봉의 사무원 자리를 얻은 별 볼일 없는 인텔리 ‘나’와 별 볼일 없는 직장에서 만난 ‘라이프Raif 선생’이란 의미의 라이프 에펜디, 두 명을 등장시킨다. 화자 ‘나’에 대한 설명은 이쯤이면 충분하고, 문제는 라이프 에펜디인데, 그건 이 책이 전적으로 라이프 선생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터키 부르주아 슬하의 세 남매 가운데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처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사색적이며, 탐미성향이 강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 터키 남성들이 원하는 아들’하고 완벽하게 반대쪽에 있는 존재였다. 저것이 나중에 커서 진짜 사내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라이프를 불러, 내 소유 가운데 비누공장이 두 개 있으니 너는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해 물가가 싼 독일에 가서 비누공장에 취직해 향내 나는 비누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 나중에 내 비누공장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지긋지긋한 남성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유럽문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너무 황홀해 곧바로 터키를 떠나버린다.
 문제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벌어진다. 독일 현대 화가들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 자화상 한 점이 눈이 부시게 확 들어온다. 모피를 입은 여인. 한 눈에 그림에 빠져버린 라이프. 평론가들은 이 자화상의 여인이 15~16세기 피렌체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르피에의 성모>를 닮았다고 신문에다 기고를 했다. 그래서 자화상의 여인과, 자화상을 그린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여성 마리아 푸데르가 표제 “모피를 입은 마돈나(성모)”가 되는 것.
 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이제 소설이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설명했으니 이것으로 됐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어지고, 무슨 과정을 거쳐 부르주아의 외아들 라이프 에펜디가 월 40리라의 박봉을 받는 찌질한 가장이 됐는지는 직접 읽고 밝히시라.
 단 하나.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읽는 당신, 후회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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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다 일단
읽기는 시작했었는데, 미처 다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도전을...

Falstaff 2018-07-23 12:43   좋아요 0 | URL
옙. 참 심금을 울리는 소설입니다.
제가 별을 하나 뺀 이유는, 결말 부근에 가서 독자가 예상하고 있었던 등장인물이 한 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거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만점을 주겠는데요.
진짜 궁금한 건, 사바하틴 알리의 문장이 원래 좋은 건지, 아니면 역자 이난아가 글을 아름답게 번역을 한 건지....였습니다. ^^

잠자냥 2018-07-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별 하나 뺀 그 이유에 저도 좀.. 공감합니다. ㅎㅎ 그렇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저는 별 다섯 개를 준 작품입니다. 정말로 문장이 참 좋죠? 터키어로도 그랬을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8-07-24 08: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20세기 중반임을 감안해도 조금 그렇더라고요.
역자 이난아씨가 번역가들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풍문으로 들었습죠.)
그리하여 혹시 이난아 씨의 번역체를 거치면서 문장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조금 궁금하더란 겁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엔 원문 좋고 번역 좋은 좋은 합작일 확률이 더 높을 거 같아요. ^^
 
인간 희극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9
윌리엄 사로얀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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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영어 제목이 <The Human Comedy>. 이걸 ‘인간희극’으로 번역하는 건 난센스라고, 이 책의 역자 안정효도 뒤편의 작품해설에서 분명히 했다. 안정효는 제목으로 <인간극장>이 어울린다고 단정하며 심지어 “《인간희극》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 굳어진 《인간극장》은 1943년에 발표되었고”라 운운하고, 이걸 굳이 ‘인간희극’으로 번역하는 것은 “단테의 《신곡》이 Divina Commedia라고 해서 ‘하나님의 희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꼬았다. 그럼 역자인 안선생이 출판사한테 딱 부러지게 주장해 <인간극장>으로 제목을 바꾸지 말이야, 자기주장을 작품해설 자리에서만 불평하듯 설파할 건 또 뭐야. 문학동네를 필두로 다른 출판사에선 그냥 <휴먼 코미디>로 제목을 다는 경우도 많다. 그냥 그렇다는 것. 굳이 시비하지는 않겠다. (시비할 거 다 해놓고 이런 말을 또 써놓는 심보는 뭐냐고? 내 맘이지.)
 작가 윌리엄 사로얀은 아르메니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단다. (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해외저자사전’에서 참고함) 세 살 때 작가인 아버지가 사망해 윌리엄과 동생들은 고아원에 맡겨져 5년 후에야 다시 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으며, 이때부터 윌리엄은 학업과 가정생활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단다. 이 모습은 방과 후에 전보배달원 일을 하는 주인공 호머 매콜리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또 작품 속에 아르메니아 이민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관계가 있을 듯. 아르메니아. 나는 아르메니아, 하면 위고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바르톨로메오가 떠오른다. 앙리 4세 시절에 가톨릭  교도에 의하여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이 아니라, 당시 터키 영토의 일부였던 아르메니아에서 예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다 죽은 기독교 성인. 물이라고는 큰 호수 하나 있고, 사방이 육지로 막혀 바다 구경을 할 수 없는 작은 땅. 딱 거기까지인데 허튼 소리한다고 산채로 사람의 가죽을 벗겨 죽인 종족의 후손들도 글을 쓰고 소설도 썼다. 물론 그들 탓이 아니다.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의 고문/사형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냥 해본 얘기다.
 작가 윌리엄 살로얀은 이 재미난 책을 타쿠히 살로얀이란 이름의 누군가에게 헌정한다. 헌정사를 보면 아르메니아에 있는 자신의 선대의, 또는 현재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누군가다. 영어로 된 책이 아르메니아 언어로 번역이 되어 그가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특히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해서 썼습니다. 당신이 이 작품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당신이나 우리 집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함과 경쾌함을 융화시키며 가능한 한 쉬운 글로 이 작품을 썼습니다. (중략) 당신에게는 분명히 만족스러울 터이니, 그것은 이 작품을 당신의 아들이 썼으며, 그토록 좋은 의도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일찍 작고한 아르메니아 이민자의 아들이 소설을 썼다. 아르메니아 출생일지도 모르는 작가의 아버지에게 헌정했을 수도 있고, 그곳에 사는 선조 또는 모든 아르메니아 사람을 대표하는 이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지칭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에서 작가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일요일 오후에 자동차를 타고 간 피크닉 장소에서 눈에 띄는 이탈리아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 세르비아 사람들, 아르메니아 사람들 모두가 미국인이라고.
 “미국인들이지!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멕시코인,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흑인, 유대인, 프랑스인,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에이레인, 다 꼽아보라구. 그게 우리 민족이니까.”
 이민자들로 구성된 위대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자신의 모국이라고 반듯하게 선을 긋는 가운데, 불행하게 아시아 사람은 반듯한 선 안에 들어온 종족이 하나도 없다. 전쟁 중이니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인은 빼더라도(사실 독일인을 포함시켰으니 일본만 빼는 것도 말이 안 된다만)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 그에 못지않은 인도인, 인구에 관한 한 아쉬울 거 없는 인도네시아인, 인도차이나 반도 사람들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이해하자, 이해해. 책을 낸 당시가 1943년. 사로얀의 입장에선 거기에 흑인을 집어넣는 것도 쉽지 않은 용기였을 수도 있다. 근데 도시에서 가장 험악한 우범지대로 차이나타운을 꼽은 건 뭐지?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 왜 이리 유별나게 까탈을 잡느냐 하면, 정말 특별하게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사람들만 등장시키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의 집합체인 <인간희극>에서 가장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를 믿는 미국인의 일반적 특성이기 때문.
 정말 읽어보시라. 유년, 소년, 청소년, 처녀총각, 결혼적령의 젊은 남녀, 기혼자, 중년, 장년, 노년 등 모든 등장인물이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착한 역할의 천사들이다. 악당 한 명조차 결국 다른 천사들에 의하여 용서를 받고, 강도로 등장하는 젊은이마저 삶의 곤고함에서 진짜로 믿을 만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그냥 시험을 해봤을 뿐. 부유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닌 젊은이와 가난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등장해 만들어내는 전쟁 중 미국의 지방도시 이야기.
 캘리포니아 한 구석에 이타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 도시 안의 아르메니아 출신 가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따뜻하고, 선량하고 그래서 눈물깨나 빼기도 하는 이야기. 근데 이런 소설은 청소년기에 읽어야 좋을 거 같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하기엔 내가 너무 낡았다.


 * 이타카. 어디서 들어보신 도시 이름일 걸? 책의 주인공이 호머 매콜리. 이 아이가 열네 살이고, 네 살 먹은 참 괜찮은 유년의 동생이 있는데 이름이 율리시스 매콜리인 거. 아이의 특기이자 가장 즐겨하는 일이 이타카에서 벌어지는 온갖 기이한 일, 구경거리를 쫓아다니며 관찰하는 것. 작명부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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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2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낡았는지 아닌지 조만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18-07-20 16: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분명한 건, 이 소설이 독자를 울린다는 겁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착한 소설이더군요.
전 착한 것들하고 좀 척이 져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