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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우코와의 대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53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체사레 파베세, 이 양반이 1950년 8월 어느 날, 마흔 두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토리노에 있는 호텔 ‘로마’의 객실에서 수면제를 한 통 다 삼켜버려 자살에 성공했을 때, 침대 테이블에 수면제 포장지와 함께 놓여있던 책이 바로 이 <레우코와의 대화>라고 한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아니지만 가장 아꼈던 책이라는 증거라고 역자는 말한다. 혹시 자살하고 싶은 분이 파베세의 예를 따라 수면제를 먹고 실행을 하려 하신다면, 포기하시라. 요즘 수면유도제는 독성을 거의 제거해서, 수면제 먹고 죽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많이 먹어 배 터져 죽는 일이라니까. 우리나라 여성주의 작가 누구의 책에서 읽었지만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어떤 책을 읽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예로 들어서였다. 지금은 작가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유럽이나 아메리카 작가였을 것이다. 서양 소설책을 읽자면 숱하게, 유럽인들이 태내적 지식 비슷하게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유하고는 한다. 파베세는 이런 신화의 주인공, 신이 됐건 반신반인이 됐건, 그냥 인간이건, 또는 님프 요정이건 간에, 그들을 등장시켜 해당 오브젝트에 관한 대화를 수록하면서 기존의 신화를 사정없이 비틀어댄다.
한 예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비명횡사하자 슬픔을 못 이겨 온 숲을 돌아다니면서 리라를 켜며 자신의 비통함을 노래하는 통에 숲 속의 모든 동물들까지 다 절통해하는 참극을 발생시킨다. 너무도 죽은 아내가 보고 싶었던 오르페우스는 땅속나라에 들어가 저승에서도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는 바람에 하데스마저 감동하게 만들어, 저승의 왕 하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로 약속을 한다. 단, 하늘을 보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리하여 에우리디케의 영혼 또는 그림자를 이끌고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데 오르페우스의 뒤에서 졸랑졸랑 따라오던 에우리디케가, 아니 여보, 날 사랑한다면서 내 모습을 어찌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거야? 너 혹시 마음에도 없는데 그냥 의무감에서 나를 다시 살리려는 거 아냐? 뭐 이딴 식으로 바가지 득득 긁어 어쩔 수 없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순간, 마누라님은 한 줄기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는 거. 다들 아시지? 애초에 에우리디케가 죽었을 때, 죽은 마누라를 품에 안고 얼마나 오열을 했던가. 한 번 들어보시라.
저렇게 누워 있는 사람 품에 안고 노래하면, 오르페우스 역을 하는 가수 쟈넷 베이커의 침이 얼마나 많이 튈까? 세수한 거 같지 않을까?
그런데 파베세의 오르페우스는 좀 다르다. 절통한 마음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 코키토스와 스틱스 강의 배를 타 저승에까지 간 건 맞다. 하데스를 감동시켜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 것도 맞다. 계단을 오르며 등 뒤에서 아내의 가벼운 발소리가 나고,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직 지하세계의 차가움에 휩싸여 있으면서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이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것뿐임을 자각한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뼈와 피와 살과 골수를 가진 몸으로 완성되고, 입을 통해 무엇인가를 위장으로 쉬지 않고 집어넣어야 하며, 하루에 한 번씩 먹은 양과 비례하여 일정량의 물질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하물며 다시 이 차가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린다. “이제 끝내자.” 단호하게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끊어준다. 파베세의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훨씬 깔끔하지 않나? 우화적이기도 하다. 보리슬라프 페키치가 쓴 <기적의 시대>에서 예수가 지나다가 눈먼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줬더니 눈 뜬 바로 전까지의 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 이런 오지랖하고는! 누가 당신더러 내 눈 뜨게 해달라고 했어? 너나 잘 하세요! 그러고 스스로 다시 자신의 눈을 파내더라는 것. 어째 좀 비슷하지 않나? 우리의 오르페우스, 기껏 에우리디케를 지상에까지 문제없이 이끌어 다시 부활하게 만들었더니 에우리디케 하시는 말씀이, 어째 너는 한 번도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네 맘대로 일을 벌이니, 하며 다시 목매달아 죽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사는 것만 힘든 게 아니다. 죽은 다음에도 힘든 인간 또는 영혼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신화를 비튼 것이 총 27편의 대화 가운데 26편이나 된다. 여기에 들어있지 않은 그리스 신화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몇 개의 서사가 다 이리저리 얽혀있기 때문에. 문제는 나도 우리나라의 보통 독자들과 비교해서 그리스 신화 또는 고전을 많이 알고 있는 편이기는 한데, 태생적으로 신화를 습득하고 있는 유럽인과 비교할 수준은 도무지 안 된다는 거. 그리하여 해당 대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신화의 어느 장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더군다나 기존의 것과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차이를 단박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익시온과 네펠레의 대화. 이걸 알려면 익시온, 네펠레가 누구인지, 어떤 사고를 친 인물/신/반신반인/반인반수인지 알아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익시온? 이름은 기억난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가 사르페돈과 히폴로코스의 대화. 이하동문. 세 번째는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화. 그래, 이건 알겠다.
역자도 한국의 독자가 이 책을 읽을 때의 곤란함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13개의 각주를 달았는데, 아주 간략한 각주만 읽고 어떻게 26편의 대화를 제대로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쉬엄쉬엄 인터넷 검색해가며 꼼꼼히 읽을 수 있는 독자에게 재미있는 시간, 날들을 줄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시간이 넉넉한 분들이 이 책을 잡으면, 한 서너 달은 훌쩍 지나갈 거 같다.
한 번 시도해보시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