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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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심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울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신파”라고 부른다. 자신의 문화적 소양에 대하여 약간은 과장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이들은 신파 알기를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파야말로 사람이 문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한 이후 단 한 시기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뭇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왔던 분야다.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의 진실한 사랑과 부모님의 강압을 등에 업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 사이에서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심순애부터, 하필이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는 원수 집안의 자제들이 서로 눈이 맞아 열세 살의 줄리엣과 이 아이의 열댓 살 먹은 애인 로미오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각각 자살을 해버리는 것. 같은 신파임에도 불구하고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원조 신파 <장한몽>이 감히 셰익스피어한테 비비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를 한 마디로 하면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소위 문학성이라 함은 작품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과 그것들이 조합을 이루어 얼마나 섬세하게 심금을 울릴 수 있는가, 즉 측정할 수 없는 작가와 독자의 공명이라 할 수 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요즘 읽은 최고의 신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이 이런 신파가 1940년대 초의 터키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게다가 원작이 그런지 번역을 한 이난아의 대단한 한국어 실력에서 비롯했는지 모르겠지만, 문장의 나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바하틴 알리’는 1907년 출생해서 국가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한 작가. 이이가 글을 써서 1932년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자 흔히 ‘케말 파샤’라 일컫는 국민영웅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욕했다는 죄로 1년간 옥살이를 한 후부터 쓰는 글마다 족족 검열관에게 걸리는 걸 참지 못하고 1948년에 조국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해, 계획을 진짜 실행하다가 불가리아 국경에서 경비대원에게 총 맞아 죽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무려 두 달 반만에 발견된 참으로 험한 팔자의 소유자였다(책 앞날개의 작가소개 참고했음).
 작가 본인은 이렇듯 적극적인 글쓰기 및 표현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선 아무 이유 없이 해고당해 대학 동창에게 박봉의 사무원 자리를 얻은 별 볼일 없는 인텔리 ‘나’와 별 볼일 없는 직장에서 만난 ‘라이프Raif 선생’이란 의미의 라이프 에펜디, 두 명을 등장시킨다. 화자 ‘나’에 대한 설명은 이쯤이면 충분하고, 문제는 라이프 에펜디인데, 그건 이 책이 전적으로 라이프 선생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터키 부르주아 슬하의 세 남매 가운데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처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사색적이며, 탐미성향이 강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 터키 남성들이 원하는 아들’하고 완벽하게 반대쪽에 있는 존재였다. 저것이 나중에 커서 진짜 사내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라이프를 불러, 내 소유 가운데 비누공장이 두 개 있으니 너는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해 물가가 싼 독일에 가서 비누공장에 취직해 향내 나는 비누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 나중에 내 비누공장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지긋지긋한 남성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유럽문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너무 황홀해 곧바로 터키를 떠나버린다.
 문제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벌어진다. 독일 현대 화가들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 자화상 한 점이 눈이 부시게 확 들어온다. 모피를 입은 여인. 한 눈에 그림에 빠져버린 라이프. 평론가들은 이 자화상의 여인이 15~16세기 피렌체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르피에의 성모>를 닮았다고 신문에다 기고를 했다. 그래서 자화상의 여인과, 자화상을 그린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여성 마리아 푸데르가 표제 “모피를 입은 마돈나(성모)”가 되는 것.
 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이제 소설이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설명했으니 이것으로 됐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어지고, 무슨 과정을 거쳐 부르주아의 외아들 라이프 에펜디가 월 40리라의 박봉을 받는 찌질한 가장이 됐는지는 직접 읽고 밝히시라.
 단 하나.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읽는 당신, 후회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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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다 일단
읽기는 시작했었는데, 미처 다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도전을...

Falstaff 2018-07-23 12:43   좋아요 0 | URL
옙. 참 심금을 울리는 소설입니다.
제가 별을 하나 뺀 이유는, 결말 부근에 가서 독자가 예상하고 있었던 등장인물이 한 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거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만점을 주겠는데요.
진짜 궁금한 건, 사바하틴 알리의 문장이 원래 좋은 건지, 아니면 역자 이난아가 글을 아름답게 번역을 한 건지....였습니다. ^^

잠자냥 2018-07-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별 하나 뺀 그 이유에 저도 좀.. 공감합니다. ㅎㅎ 그렇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저는 별 다섯 개를 준 작품입니다. 정말로 문장이 참 좋죠? 터키어로도 그랬을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8-07-24 08: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20세기 중반임을 감안해도 조금 그렇더라고요.
역자 이난아씨가 번역가들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풍문으로 들었습죠.)
그리하여 혹시 이난아 씨의 번역체를 거치면서 문장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조금 궁금하더란 겁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엔 원문 좋고 번역 좋은 좋은 합작일 확률이 더 높을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