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장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5
샤오홍 지음, 오수경 옮김, 티엔친신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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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한 티엔친신. 한문으로 쓰면, 전심흠田沁鑫. 옥편 찾았다. 심沁. 스며든다는 뜻. 흠鑫은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 동네의 중국음식점 이름에 같은 한자가 있어 벌써 전에 옥편 찾아본 글자. 기쁘다는 뜻. 그래 ‘전심흠’은 기쁨이 스며든다는 이름이다. 발음은 모르겠고 뜻이 참 좋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다.
 제목부터 생사장. 나고 죽는 마당이다. 1930년대 초,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의 농촌을 무대로 해서 지주와 소작인, 소작인끼리의 서열과 충돌, 거기다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의 기치를 올린 일본군과 앞잡이, 이들이 만들어내는 생로병사의 한 판 마당이다. 원작소설의 번역본은 <생사의 장>이란 제목으로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서 벌써 간행했으며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조삼과 억척네 (자오싼과 왕씨), 그리고 어여쁜 딸 금지(진즈) 가족은 동네에 딱 한 마리 있는 소를 가진 집으로, 그 덕에 형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푼이(얼리반)와 곰보댁, 건장한 아들 성업(청예) 가족은 부모의 정신상태와 외모로 가장 낮은 서열의 소작인(괄호 안은 샤오홍의 작품을 번역한 책에서의 이름이다). 성업은 금지를 자빠뜨리는 데만 열심을 쏟아 드디어 딱 두 번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덜컥 애가 들어선 상황. 조삼과 억척네한테 얘기했다간 금지의 다리몽둥이가 부러져나가고, 잘못했다간 성업이 골로 갈 수도 있어서 진퇴양난의 벼랑에 서 있다.
 별개로 지주 ‘둘째나리’가 소작료를 심하게 올리려 눈알을 벌겋게 물들이고, 결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소작인들을 대표해, 조삼이 둘째나리를 죽여 버리려 낫을 들고 침입해 그를 향해 내리쳤건만, 죽은 건 둘째나리가 아니라 때마침 담을 넘은 도둑. 다시 등장한 나리 하시는 말씀이, 내 집 담을 넘은 도둑을 때려죽인 건 참으로 장한 일이지만 사람을 죽인 것 또한 사실이니 너도 죄를 목숨으로 갚아야 하리라. 이에 처음엔 나리를 죽이려 했건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 알게 된 조삼이 나리에게 무릎을 꿇더니 당국에 선처를 빌어달라고 싹싹 빈다. 남편의 못난 모습을 보고 가슴에 천불이 난 억척네는 농약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시고 죽어버린다.
 와중에 태를 품은 금지와 성업은 타지에 나가 돈을 벌기로 하고 가출을 해버렸지만 토굴 속에서 몇 밤을 지내지도 못한 채, 성업은 항일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금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산을 한다. 여기에 또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와 밥을 얻어먹고 곰보댁을 윤간하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국 현대사, 그것도 일본군의 가장 앞에 섰던 만주국 일원의 한 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이다.
 각색자는 제목처럼 생사, 낳고 죽음. 여기에 늙어감과 병듦은 포함해 생로병사를 곳곳에 배치했다. 생로병사, 어느 하나 쉽고 가벼운 것이 있겠는가만, 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생. 하느님이 밀가루 반죽 주물러서, 켜켜이 부풀린 찐빵처럼 한 시루 두 시루 쪄서 세상에 내보내는 거지.
 로. 뻣뻣한 밀가루떡 같고, 늙은 황소 힘줄 같아, 염라대왕 외엔 아무도 씹어 먹을 수가 없다는 거지.
 병. 몸뚱이는 망가져 가는데, 마음만 살아가지구, 짐은 남한테 떠넘기구 이부자리만 지고 있는 거지.
 사. 눈 허옇게 뒤집고 다리 벌렁 들고 나자빠지는 거지, 저승에 가면 아무것도 들추지 마셔, 허 참, 확실히 죽었지?

 

 극의 전반은 이런 생로병사의 한 평생을 중심으로 하다, 후반엔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워 죽고 죽이는 것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초토화된 중국 북방의 한 모습.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대륙의 만주족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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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 시집선 2
조인선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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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의 앞날개에 시인의 약력이 쓰여 있다. 딱 세 줄. 짧으니 그냥 옮긴다.


 196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시집 다섯 권을 냈다.
 안성에서 소를 키워 팔고 있다.


 약력을 읽은 독자는 이이가 소 축산업자로 일하고 있어서 다분히 직업과 관련한 시를 쓸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송아지, 어미 소, 구제역, 집단 살처분, 형장으로의 행렬 등등. 그럼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전문이다.



 청춘



 책 살 돈으로 그 짓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간신히 졸업하고 폐인이 됐다
 시를 쓰고 또 썼다
 소도 키웠다
 마흔이 가까워
 아내를 만나기 전 배운 베트남 첫 말은
 안녕이었다



 그림이 그려진다. 시인이 1966년생. 운동권 출신. 그러나 스물네 살 한참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난데없이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가 무너지는 걸 눈뜨고 번히 바라본 세대. 부모가 안성에서 소를 팔아 등록금과 용돈을 부쳐주면 시인은 책을 사는 대신 단골 색시집을 일차 왕림하던 민주투사. 어찌어찌 간신히 졸업을 하고 시를 썼다. 당시 남자들 제대하고 졸업하면 대략 스물일곱 살. 시인지망생 즉 폐인으로 일 년 동안 열라 시를 쓰고 바로 다음 해, 스물여덟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낸다. 이만하면 시인으로는 성공한 경우. 하지만 시인이면 뭐하나. 배고파 죽겠는데. 그래 아버지 어머니가 소 키우는 안성 고향집으로 귀향해 조금씩 소 키우는 일을 떠맡은 거, 아냐? 잘했다. 근데 늙은 농촌 총각한테 시집오려는 아가씨가 있어야 말이지.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는 현수막,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전화 123-4567"을 보고 거의 1기 다문화가정을 이루어 딸 둘을 두고 오순도순 잘 살고 있다. 처음엔 부모에게 비벼 살기 위해 내려왔다가 이젠 부모가 시인한테 비벼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찍이 내가 말했잖아. 시를 쓰며 평생을 살고 싶으면 부모한테 비비든지,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든지, 아니면 배우자를 최저시급 주는 알바로라도 보내버리라고. 이 시인은 제대로 시인의 첫 발을 뗀 거다(이 말, 즐거워서 하는 거 절대 아니다).
 시인이 소를 키워 팔아 사니 시집 속에도 당연히 시인의 삶으로서 직업이 드러나긴 한다. 그러나 시인의 유일한 직업은 “시를 쓰는 일.” 그의 가장 중요한 숙명은 “시”가 과연 무엇인지, 시를 쓰는 행위가 진짜 구원을 위한 것이지, 그렇다면 누구의 구원을 위한 것인지, 뭐 이 비슷한 것 아닐까. 이 질문은 비단 조인선 혼자의 것이 아니어서 숱한 시인들이 끝까지 부여안고 삶을 마감한 거대 화두였다. 그리하여 이 시집 《시》에서도 작품 <시> 다섯 편을 실었다. 무작위로 한 편을 읽어보자. 아니, 제일 앞에 실린 <시>를 읽어보자. 전문이다.



 그대 눈동자에 구리 나팔이 들어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린 여자가 가르쳐 준 하비오란 말이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지
 돌아선 모습에 그림자 한 줄 새겨져 있다



 “하비오”를 검색해봤다. 서울 송파에 있는 아파트 이름. 하비오 워터파크, 파크 하비오, 하비오 쿠팡 등등. 사전검색해보니 그런 단어는 없다. 하비오가 무슨 뜻일까? 베트남 말 아닐까? 눈동자에 들어 있는 구리 나팔은? 흠. 모르겠다. 그럼! 무슨 수로 시인이 ‘시’라는 걸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었겠나. 이 시를 이해하는 거, 포기했다. 예컨대,



 녹는 물고기

  ― 앙드레 브르통에게



 수음하는 남자의 손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거울 속 책장에는 피 묻은 해골이 빼곡히 쌓여 있고
 선풍기가 구석에 둥지를 틀어 알을 낳았다
 빛은 사방에서 오는데 주인은 쉴 곳이 없어 참혹하게 웃고 있다
 벌거벗은 여자가 길게 누운 소파가 절벽 쪽으로 기울어져 웃음소리에 타들어간다
 오월이었던가 물고기 비늘이 눈처럼 날리던
 잘려 있던 남자의 손이 구두 속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전문)



 제목 ‘녹는 물고기’는 브르통의 산문시란다. 앙드레 브르통이 누군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세계 대표선수.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는 분께 만원 드림. 시인은 책 살 돈으로 여자의 몸 일부를 사고 자유와 해방을 외칠 때부터 시를 썼던 사람이다. 그러니 소 키우는 남자로 시인을 국한하여 이 시집 <시>를 읽으면 좀 난감할 것.
 그렇다고 이런 쪽의 시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삶의 형태이니 당연히 소 키우는 일, 소 죽이는 일, 병든 소를 땅에 묻는 일, 묻으면서도 머리를 굴려 조금이라도 더 보상금을 받으려 하는 일, 어린 딸들, 노부모들 같은 삶의 모습도 등장하고,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경건한 묵념도 올리며, 21세기 거대한 자본주의의 질주 속에 찌든 현대인의 그림도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새bird.” 그리고 혁명, 자본, 그짓 등. 다양한 시가 실려 있다. 고백하거니와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래서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시가 더 좋다. 가령, 이런 거.



 장날


 

팥 서 말 팔러 어머니와 장호원 장에 갔습니다. 한 말에 3만에서 4천 원을 준다기에 그냥 왔습니다. 어제는 막내 딸 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하도 조르기에 큰 맘 먹고 사줬습니다. 10만 원이 조금 넘었지요. 아버지가 얼마냐고 하도 묻기에 딸들에게 방안으로 들어가 놀라고 했습니다. 머리 허연 아버지 어머니 밥상 위에 신문지 깔고 메주콩, 검은콩 나누시고 작은 돌멩이 고르시고 아이들은 엄마 기다리며 멋진 집과 배를 만들다 잠들었습니다. 5천 원으로 순대 한 접시와 선지국물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넉넉한 하루였습니다. (전문)



 그림이 팍 그려진다. 막내 딸 아이한테 사준 장난감이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고 가져간 팥 서 말 값하고 비슷하다. 하필이면 늙은 아버지가 장난감이 얼마냐고 묻는 바람에 대답도 못하고 딸들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노부모 둘이 상을 펴고 다시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는지 아니면 메주를 쑤거나 밥에 두어 자식들 먹이려고 콩을 고르고 있는 하루. 시인은 싸게 순대를 먹은 날의 모습. 그러나 읽기 좋다는 것일 뿐.
 시집을 한 권 사면, 적어도 한 편의 시는, 이거 통째로 외워버릴까, 하는 약한 충동, 그런 시, 독자하고 궁합이 딱 맞는 시 하나는 발견해야 본전 뽑은 거 같은 기분. 이해하셔? <장날>은 그런 시까지는 아니다. 그럼 이 시집에서는 없었느냐. 아니다. 있었다. 웬만하면 그런 시는 소개하지 않는데 오늘은 큰마음 먹고 한 번 올려본다. 짧기까지 하니 정말 한 번 외워봐?



 묵화



 죽산 칠장사
 법당은 닫혀 있고
 감나무마다 얼어붙은 수많은 감들 너머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검은 개 한 마리 밥그릇 앞에 놓고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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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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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에 이어 네 번째 읽은 페렉. 여태까지 읽은 페렉과 조금 다르다. 2인창 소설이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 젊은이의 미분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1960년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누보로망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조재룡이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보니 첫 마디 비슷한 자리에다, “조르주 페렉은 필경 사르트르와 누보로망, 이렇게 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 썼다. 사르트르는 모르겠고, 다만 하여튼 글의 여러 부분이 로그브리예나 뷔토스의 것들과 “문장 간 유사성”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포스트’를 누보로망 앞에 붙인 것은 페렉이 <잠자는 남자>를 쓴 시기가 누보로망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1967년이라서 이었을 뿐이다. 괜히 잘난 척 더 하다가 나중에 코피날 거 같다. 난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있지도 않고 그냥 주워들었을 뿐이며, 몇 작품을 읽다보니 페렉의 선배작가들과 유사성을 느낀 수준, 즉 진정한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설 하나를 읽는데 지식이 뭐가 중헌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내 주장대로 이 작품을 누보로망(비슷한 것)이라 가정하면, 그것도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잘게 쪼개 현미경을 통해 본 것을 기록했다면, 일단 지독하게 드라이한 작품이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은 또한 타당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서간체가 아닌 2인칭 소설이란, 화자가 ‘다중의 독자’가 아니라 오직 ‘너’에게만 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화자가 관찰한 ‘너’의 행동 또는 행위를 묘사하는데 국한한다. 화자는 결코 ‘너’의 대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까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지 책의 처음 두 문장을 인용해보자.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방의 저 익숙한 박명薄明에, 세세하게 나뉜 어두운 체적이, 네가 수천 번을 지나다녔기에, 힘들이지 않고서도 네 기억만으로 길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불투명한 사각 창으로부터 그 길들을 되짚어내고, 반사광으로부터 세면대를, 조금 더 명료한 책 한 권의 그림자로부터, 선반을 되살려내면서, 이보다 더 검은, 걸려 있는 옷가지의 뭉텅이가 또렷이 확인되는 그곳에서 이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네 콧등 위로, 온전한 직각은 아닌 것 같은, 네 두 눈의 두덩 위로 아주 작은 일각一角을 드리울, 또렷한 테두리도 없는 어떤 그림 한 점과도 같은, 얼핏 보아 일률적으로 회색이거나, 색깔도 형태도 없어, 네게는 오히려 무채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그러나, 재빠르게 형성될 것이 또한 분명한 그런 그림과도 같이, 이차원의 공간 하나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니면서 나타난다: 첫째는, 네가 다소 힘을 주어 네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정도에 따라, 보다 정확히 말해, 네가 눈을 감을 때 네 눈썹 위에서 행해지는 근육의 수축이 네 몸 전반에 평면의 기울기를 변형시키는 것 같은 효과를, 마치 네 눈썹이 네 몸에서 접점을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같이,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니, 이 귀결이 자명하다는 것 말고는 증명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네가 지각할 어둠의, 밀도 혹은 특질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공간이 다소 흐려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하 하략. 아직 반도 안 썼다)”


 파리에서 “하녀의 골방”이라 일컫는 방. 대개 건물의 꼭대기에 있으며 20세기 초반까지 주로 하녀들이 기거하던 작은 방. <라 보엠>의 미미가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을 수놓으며 살았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드니즈 보뒤 양이 숱한 백화점 점원 아가씨와 함께 산 곳. 이제 하녀들이 없어져 방은 가난한 빈민들의 차지가 됐고, 파자마 하의만 입고 침대로 사용하는 장의자長椅子 위에 앉아 112쪽이 펼쳐진 책 <산업사회 강론>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너’는 오늘도 누구와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한 채, 옆방의 누군가가 기침을 내뱉고, 발을 질질 끌고, 가구를 옮기고, 서랍을 열고, 층계참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는 소음이 들린다. ‘너’가 세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는 신호이며 책의 결말부로 가면 자신의 신호 역시 옆방의 기숙인이 느끼고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소통의 가능성’으로의 소음이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다. ‘너’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하게 무시하고, 아무 때나 파리의 모든 곳을 탐색하고, 하루에 15프랑을 사용하는 것만 허용하는 삶을 산다. 매일 똑같이. 골루아즈 담배 한 갑, 성냥 한 통, 식사 한 끼, 영화 한 편, 영화관 안내인한테 주는 돈, <르 몽드>신문, 커피 한 잔. 나머지 돈으로 건포도 빵 하나 또는 바게트 반 조각으로 때울 두 번째 끼니와 두 번째 커피 한 잔, 교통비, 치약, 세탁비 등등.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누보 로망으로도 읽을 수 있는 현미경적 묘사와 이에 따른 건조한 문장. 소통을 거부하며 사는 젊은이의 행위 묘사로만 채워지고, 나중엔 옆방 남자와의 신호로 소통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 심지어, 세상과의 화해? 그건 직접 읽어보시고 해결하시기 바람.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는데, 이 의견을 덜컥 믿고 쉽게 구입하지는 마시라. 고백하거니와, 쇤네는 20대 초반부터 잘난 척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읽히지도 않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을 읽었으며, 읽다가보니 20대 초반이라는 시절이 특별히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감수성 또는 흡수력이 있는 시대여서 그랬는지, 별 내용 없는 건조한 책들을 매우 심각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이퍼 레알리즘 적인 묘사로 일관한 이런 책에 여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페렉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경우일 뿐이라는 걸 딱 꼬집어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 정말 책을 사서 읽고 후회하신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책 뒤의 “역자 해설”마저 읽어보시면, 내가 지금 쓴 독후감이 얼마나 엉터리인줄 단박에 알아채실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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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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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잉에보르크 바흐만이 쓴 <말리나>를 읽은 다음, 다시는 바흐만을 읽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말리나>를 감상하면서 제대로 발휘한 인내력을 망각하고, 바흐만의 위명威名에 혹해서 이이가 쓴 첫 번째 산문집 <삼십세>를 구해 읽게 됐다.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당연히 바흐만의 이름값이었지만, 중고 책이 싼 가격으로 나와 있던 것도 그에 못지않은 이유였을 걸?
 역자 차경아는 책을 “산문집”이라 표현했다. 읽어보니 <삼십세>,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에서>,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 등등은 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긴, 소설도 산문이란 큰 범위 안에 포함되니까 산문집이라 한들 틀린 말은 아니겠다. 일곱 편의 이야기 가운데 표제작 <삼십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무엇보다, 작가 바흐만과 독자인 내가 궁합이 극적으로 맞지 않는 상극 정도 된다는 걸 감안하시면 좋겠다.
 <삼십세>는 바흐만이 서른다섯 살 되는 해에 29세 생일부터 30세가 되는 날까지 ‘그’의 행적을 따라간 단편이다. 첫 두 문단을 인용한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곧 잊어버리게 될 어느 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문득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다. 잔인한 햇빛을 받으면, 새로운 날을 위한 무기와 용기를 몽땅 빼앗긴 채.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감으면, 살아온 모든 순간과 함께, 그는 다시금 가라앉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간다. 그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고함을 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고함 역시 그는 빼앗긴 것이다. 일체를 그는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는 바닥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다. 마침내 그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소멸되어 무(無)로 환원해버린다.



 위 두 문단을 읽자마자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함을 즉각 알아차렸다. 두 번째 문단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그냥 보통의 어느 날, 잠에서 깬 ‘그’가 일어나지 않고(못하고) 그냥 누워 있는 장면이다. 그거 하나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기재들을 보면, 잔인한 햇빛, 빼앗긴 무기와 용기, 살아온 모든 순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감, 가라앉음, 고함, 그러나 소리 나지 않음, 바닥없는 심연, 추락, 사라지는 감각, 해체, 소멸, 무. 등등. 구체적인 물체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거의 추상단어들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위의 두 문단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단편 <삼십세> 전부에 대한 감상은 이렇다.
 “‘화려하고 강건한 문체로’ 처음 맞닿은 전환점(30대 진입)을 건너 새로운 전환으로 계속 걸음을 옮기는 변곡점을 그리고 있다.”
 정말이다. 문장들은 화려하고 강건하다.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을 이루고 있는 단어들은 좋게 얘기해서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을 읽다가 눈은 글자를 따라가고 있건만, 머릿속에선 곱창구이가 좋은지, 곱창전골이 좋은지 고민하는 갈림길에서 헤매는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같은 문단을 또다시 읽어야하는 비능률을 겪었는데, 어쩜 그렇게 <말리나> 때와 같았는지. 물론 <말리나>가 훨씬 더 심하긴 했지만.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들이 한 시절 형성했던 “47 그룹” 작가들 가운데 몇몇이 이런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바흐만은 좀 심하다. 바흐만과 연애했던 프리쉬도 간혹 비슷한데 이이와 비교하면 약하다.
 삼십 세. 참 갑갑한 시절이다. 이젠 작품 속 나이 삼십이나, 작품을 썼던 당시 작가의 나이 서른다섯이나 그게 그거인 때를 맞았지만, 바흐만은 그래도 기특하게 서른 살 즈음에서 “생기에 넘쳐 닥쳐올 것과 손을 잡”는 결론을 내린다.
 김광석은 나이 서른에, “조금씩 잊혀져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궁상을 떨었고,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던가 하여간 서른을 맞으며 이제 청춘도 물러간 것을 인식했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은 온다. / 시큰거리는 치통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노래하면서 독한 배갈 한 병 나발을 불었고, 최영미는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파장난 잔치의 뒷설거지를 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건강하긴 하다.
 30세로 접어드는 건 정말 특별한 사건이다. 역자 차경아가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서른 살의 문턱을 넘어선 것을 깨닫는 날, 목구멍으로 무턱대고 차오르는 언어의 발효를 막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게 되고, “그것이 후회이든, 변명이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관조이든 개안(開眼)이든 간에 서른 살이라는 에폭(epoch)에 매달려, 무작정 호소하고 싶은 충동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기막힌 표현이다. 차경아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 사실 바흐만의 <삼십세>는 읽으나마나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삼십세> 역시 “에폭에 매달려 호소하는 충동의 순간"의 이어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 번 읽어볼 만하지만 권하지는 않겠다. 누군들 서른 즈음해서 한 번의 곡절이야 없었겠느냐만, 자신의 곡절이 유난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는 좋을 수도 있겠다. 큰 아이가 내년에 서른. 다음 주에 집에 온다니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오랜만에 꼰대 티 한 번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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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8-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말리나> 읽고 난 뒤로는..(아니 저는 <말리나>를 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어요. ㅋㅋ 절반쯤 읽다가 포기.) 바하만의 책을 다시는 안 읽고 있습니다. <말리나> 읽기 전에 <삼십세> 읽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죠. -_-;;

Falstaff 2018-08-08 12: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인내력 테스트를 했던 작품이 <말리나>였습지요. 게다가 두껍기까지 해서요.
하여간 47그룹 멤버들, 좀 지긋지긋한 듯하더라고요. ㅋㅋ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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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소재의 마샤 블레인 여학교. 19세기 중반 에든버러에 제본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놓고 죽은 남자의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로 말할 거 같으면 가리발디를 열렬하게 추종하는 민족주의자로, 스코틀랜드의 여성교육을 위하여 거금을 쾌척해 학교를 설립한 거였다. 학교의 중앙 복도에 여사의 늠름한 초상이 걸려 있어 해마다 창립자의 날(이라 표현했다. 개교기념일인지 여사님의 제삿날인지는 모르겠다)이 되면 초상화 아래에 있는 성서대에 꽂아놔도 오래가는 국화, 달리아가 놓였고, 바로 옆에 성서가 펼쳐 있어서 한 구절에 붉은 밑줄이 쳐져 있었으니, 바로 이랬다.
 “누가 어진 아내를 얻을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쉽게 얘기해서 마샤 블레인 여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고루한 보수주의적 학교라는 뜻이다. 지금은 바꿨는지 모르지만 나 대학 다닐 때도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일을 대학의 교훈에 집어넣은 여자대학이 몇 곳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정말이라니까!
 소설의 시대적 무대가 1930년대이니 그럴 수 있다. 이 점은 양해하고 지나가자. 하지만 그래도 완고하고, 보수적이고, 이른바 왕당파 비슷한 그런 분위기의 학교라는 점.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여 완고한 보수적 여학교에, 저학년을 담당하는 진 브로디 선생이라는 좀 진보 성향인 교사가 있었다. 이이는 예술이 모든 학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아랫단에 철학, 제일 말단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것이 과학이라 믿는 한편, 교과를 진행하는 방식 등을 감안하면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얼핏 생각하게 만드는 교사였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참 재미있고, 매력 있어서 존경할 교사로 보이기 십상이며, 교사 역시 자기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따로 몇 명 모아 고학년으로 올라가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쉬운 얘기로 자기 병사들을 길렀단 것이지. 물론 우리의 진 브로디 선생과는 달리 의도가 조금은 순수하지 않은 교사로 탁월한 학생들을 자신이 관리하고자 하는 인물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한 명 알고 있다. 누구인가 하면,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시작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기어이 살아남는 순수혈통의 마법사 호레이스 슬러그혼. 가물가물하신가본데, 사진 한 번 보시면 기억날 듯.

 

 

 슬러그혼 교수는 사람이 좀 띨빵해 학생들에게 따돌림도 받고 그러지만, 브로디 선생은 학과 시간에 마치 정상 수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책을 반듯이 들고 있으라 하고,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휴전 1주일 전에 전사한 첫사랑 ‘휴’ 이야기, 작년에 휴가차 다녀온 이집트 여행, 가장 감명 깊었던 유적지로 이탈리아 이야기 등등. 지식주입을 강요하는 학교 정책에 반기를 드는 거 자체가 열 살 먹은 소녀들에겐 참신한 매력이고,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정한 금과옥조인 걸 어찌하나.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팔로 단 몇 명의 학생만 거둔다. 소설은 몇 명의 ‘브로디 학생들’ 중에서 작은 눈 때문에 나중에 미술교사로부터 자신이 여태까지 본 가장 못생긴 여자 가운데 한 명이란 극언까지 듣는 ‘샌디’의 시선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다.
 샌디. 이름이 Sandy, 어째 좀 모래알처럼 서걱거릴 거 같지 않은가? 근데 총명한 학생이다. 이 학생이 만 8년 동안 브로디 무리의 우두머리 비슷하게 있으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가며 동시에 브로디 선생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독자는 선생에 대한 진짜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된다. 선생으로부터 거의 습관적으로 질책과 무시를 당하던 메리는 불이 난 건물 복도에서 매우 당황한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질식해 불에 타 죽고, 관능적 외모로 천부적인 모델이랄 수 있는 예술 감각이 뛰어난 로즈는 돈 많은 평범한 남자와 숫처녀로 결혼해버리고, 선생이 가장 의지했던 샌디는 난데없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더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돼버렸다. 와중에 보수적인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서 미운털이 박혀 계속 해고의 위협 속에서 끝까지 견뎌내던 선생은, 자신의 군대 중 배신자 한 명의 고발로 인해 학교로부터 해고당하고 만다. 지극히 정당한 사유로.
 좀 이상하시지? 극히 보수적인 학교에 재직하며 총명한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진보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고상한 의식을 가진 교사가 해고라니. 그것도 정당한 사유라니. 진 브로디 선생도 사람이었던 것. 그도 사랑을 했고, 애인이 전사를 했고, 유부남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한테 (줄 듯 말 듯?)애를 먹이다가 기어이 다른 여자하고 결혼해버리게 만들고, 하필이면 전체주의를 사랑하게 되는 반면에 (걸스카우트의 전신인) 걸 가이드의 줄맞춘 행진은 경멸하고, 자신의 소망을 무리의 일원으로 하여금 대신 충족시키게 하고 싶어 하는, 그냥 인간의 모습도 분명히 있었던 것. 나는 지금 여기서 한 마디도 삐끗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힌트를 주면, 재미있는 이 책을 정말로 읽으실 분에게 김을 확 빼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서. 주인공 진 브로디 선생을 정의내릴 수 있는 딱 한 단어가 있는데, 차마 밝히지 못하겠으니, 궁금하신 분은 비밀 댓글 쓰시라. 그러면 가르쳐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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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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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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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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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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