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 시집선 2
조인선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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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의 앞날개에 시인의 약력이 쓰여 있다. 딱 세 줄. 짧으니 그냥 옮긴다.


 196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시집 다섯 권을 냈다.
 안성에서 소를 키워 팔고 있다.


 약력을 읽은 독자는 이이가 소 축산업자로 일하고 있어서 다분히 직업과 관련한 시를 쓸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송아지, 어미 소, 구제역, 집단 살처분, 형장으로의 행렬 등등. 그럼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전문이다.



 청춘



 책 살 돈으로 그 짓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간신히 졸업하고 폐인이 됐다
 시를 쓰고 또 썼다
 소도 키웠다
 마흔이 가까워
 아내를 만나기 전 배운 베트남 첫 말은
 안녕이었다



 그림이 그려진다. 시인이 1966년생. 운동권 출신. 그러나 스물네 살 한참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난데없이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가 무너지는 걸 눈뜨고 번히 바라본 세대. 부모가 안성에서 소를 팔아 등록금과 용돈을 부쳐주면 시인은 책을 사는 대신 단골 색시집을 일차 왕림하던 민주투사. 어찌어찌 간신히 졸업을 하고 시를 썼다. 당시 남자들 제대하고 졸업하면 대략 스물일곱 살. 시인지망생 즉 폐인으로 일 년 동안 열라 시를 쓰고 바로 다음 해, 스물여덟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낸다. 이만하면 시인으로는 성공한 경우. 하지만 시인이면 뭐하나. 배고파 죽겠는데. 그래 아버지 어머니가 소 키우는 안성 고향집으로 귀향해 조금씩 소 키우는 일을 떠맡은 거, 아냐? 잘했다. 근데 늙은 농촌 총각한테 시집오려는 아가씨가 있어야 말이지.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는 현수막,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전화 123-4567"을 보고 거의 1기 다문화가정을 이루어 딸 둘을 두고 오순도순 잘 살고 있다. 처음엔 부모에게 비벼 살기 위해 내려왔다가 이젠 부모가 시인한테 비벼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찍이 내가 말했잖아. 시를 쓰며 평생을 살고 싶으면 부모한테 비비든지,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든지, 아니면 배우자를 최저시급 주는 알바로라도 보내버리라고. 이 시인은 제대로 시인의 첫 발을 뗀 거다(이 말, 즐거워서 하는 거 절대 아니다).
 시인이 소를 키워 팔아 사니 시집 속에도 당연히 시인의 삶으로서 직업이 드러나긴 한다. 그러나 시인의 유일한 직업은 “시를 쓰는 일.” 그의 가장 중요한 숙명은 “시”가 과연 무엇인지, 시를 쓰는 행위가 진짜 구원을 위한 것이지, 그렇다면 누구의 구원을 위한 것인지, 뭐 이 비슷한 것 아닐까. 이 질문은 비단 조인선 혼자의 것이 아니어서 숱한 시인들이 끝까지 부여안고 삶을 마감한 거대 화두였다. 그리하여 이 시집 《시》에서도 작품 <시> 다섯 편을 실었다. 무작위로 한 편을 읽어보자. 아니, 제일 앞에 실린 <시>를 읽어보자. 전문이다.



 그대 눈동자에 구리 나팔이 들어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린 여자가 가르쳐 준 하비오란 말이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지
 돌아선 모습에 그림자 한 줄 새겨져 있다



 “하비오”를 검색해봤다. 서울 송파에 있는 아파트 이름. 하비오 워터파크, 파크 하비오, 하비오 쿠팡 등등. 사전검색해보니 그런 단어는 없다. 하비오가 무슨 뜻일까? 베트남 말 아닐까? 눈동자에 들어 있는 구리 나팔은? 흠. 모르겠다. 그럼! 무슨 수로 시인이 ‘시’라는 걸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었겠나. 이 시를 이해하는 거, 포기했다. 예컨대,



 녹는 물고기

  ― 앙드레 브르통에게



 수음하는 남자의 손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거울 속 책장에는 피 묻은 해골이 빼곡히 쌓여 있고
 선풍기가 구석에 둥지를 틀어 알을 낳았다
 빛은 사방에서 오는데 주인은 쉴 곳이 없어 참혹하게 웃고 있다
 벌거벗은 여자가 길게 누운 소파가 절벽 쪽으로 기울어져 웃음소리에 타들어간다
 오월이었던가 물고기 비늘이 눈처럼 날리던
 잘려 있던 남자의 손이 구두 속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전문)



 제목 ‘녹는 물고기’는 브르통의 산문시란다. 앙드레 브르통이 누군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세계 대표선수.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는 분께 만원 드림. 시인은 책 살 돈으로 여자의 몸 일부를 사고 자유와 해방을 외칠 때부터 시를 썼던 사람이다. 그러니 소 키우는 남자로 시인을 국한하여 이 시집 <시>를 읽으면 좀 난감할 것.
 그렇다고 이런 쪽의 시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삶의 형태이니 당연히 소 키우는 일, 소 죽이는 일, 병든 소를 땅에 묻는 일, 묻으면서도 머리를 굴려 조금이라도 더 보상금을 받으려 하는 일, 어린 딸들, 노부모들 같은 삶의 모습도 등장하고,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경건한 묵념도 올리며, 21세기 거대한 자본주의의 질주 속에 찌든 현대인의 그림도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새bird.” 그리고 혁명, 자본, 그짓 등. 다양한 시가 실려 있다. 고백하거니와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래서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시가 더 좋다. 가령, 이런 거.



 장날


 

팥 서 말 팔러 어머니와 장호원 장에 갔습니다. 한 말에 3만에서 4천 원을 준다기에 그냥 왔습니다. 어제는 막내 딸 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하도 조르기에 큰 맘 먹고 사줬습니다. 10만 원이 조금 넘었지요. 아버지가 얼마냐고 하도 묻기에 딸들에게 방안으로 들어가 놀라고 했습니다. 머리 허연 아버지 어머니 밥상 위에 신문지 깔고 메주콩, 검은콩 나누시고 작은 돌멩이 고르시고 아이들은 엄마 기다리며 멋진 집과 배를 만들다 잠들었습니다. 5천 원으로 순대 한 접시와 선지국물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넉넉한 하루였습니다. (전문)



 그림이 팍 그려진다. 막내 딸 아이한테 사준 장난감이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고 가져간 팥 서 말 값하고 비슷하다. 하필이면 늙은 아버지가 장난감이 얼마냐고 묻는 바람에 대답도 못하고 딸들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노부모 둘이 상을 펴고 다시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는지 아니면 메주를 쑤거나 밥에 두어 자식들 먹이려고 콩을 고르고 있는 하루. 시인은 싸게 순대를 먹은 날의 모습. 그러나 읽기 좋다는 것일 뿐.
 시집을 한 권 사면, 적어도 한 편의 시는, 이거 통째로 외워버릴까, 하는 약한 충동, 그런 시, 독자하고 궁합이 딱 맞는 시 하나는 발견해야 본전 뽑은 거 같은 기분. 이해하셔? <장날>은 그런 시까지는 아니다. 그럼 이 시집에서는 없었느냐. 아니다. 있었다. 웬만하면 그런 시는 소개하지 않는데 오늘은 큰마음 먹고 한 번 올려본다. 짧기까지 하니 정말 한 번 외워봐?



 묵화



 죽산 칠장사
 법당은 닫혀 있고
 감나무마다 얼어붙은 수많은 감들 너머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검은 개 한 마리 밥그릇 앞에 놓고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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