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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평점 :
일찍이 잉에보르크 바흐만이 쓴 <말리나>를 읽은 다음, 다시는 바흐만을 읽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말리나>를 감상하면서 제대로 발휘한 인내력을 망각하고, 바흐만의 위명威名에 혹해서 이이가 쓴 첫 번째 산문집 <삼십세>를 구해 읽게 됐다.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당연히 바흐만의 이름값이었지만, 중고 책이 싼 가격으로 나와 있던 것도 그에 못지않은 이유였을 걸?
역자 차경아는 책을 “산문집”이라 표현했다. 읽어보니 <삼십세>,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에서>,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 등등은 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긴, 소설도 산문이란 큰 범위 안에 포함되니까 산문집이라 한들 틀린 말은 아니겠다. 일곱 편의 이야기 가운데 표제작 <삼십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무엇보다, 작가 바흐만과 독자인 내가 궁합이 극적으로 맞지 않는 상극 정도 된다는 걸 감안하시면 좋겠다.
<삼십세>는 바흐만이 서른다섯 살 되는 해에 29세 생일부터 30세가 되는 날까지 ‘그’의 행적을 따라간 단편이다. 첫 두 문단을 인용한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곧 잊어버리게 될 어느 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문득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다. 잔인한 햇빛을 받으면, 새로운 날을 위한 무기와 용기를 몽땅 빼앗긴 채.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감으면, 살아온 모든 순간과 함께, 그는 다시금 가라앉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간다. 그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고함을 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고함 역시 그는 빼앗긴 것이다. 일체를 그는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는 바닥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다. 마침내 그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소멸되어 무(無)로 환원해버린다.
위 두 문단을 읽자마자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함을 즉각 알아차렸다. 두 번째 문단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그냥 보통의 어느 날, 잠에서 깬 ‘그’가 일어나지 않고(못하고) 그냥 누워 있는 장면이다. 그거 하나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기재들을 보면, 잔인한 햇빛, 빼앗긴 무기와 용기, 살아온 모든 순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감, 가라앉음, 고함, 그러나 소리 나지 않음, 바닥없는 심연, 추락, 사라지는 감각, 해체, 소멸, 무. 등등. 구체적인 물체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거의 추상단어들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위의 두 문단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단편 <삼십세> 전부에 대한 감상은 이렇다.
“‘화려하고 강건한 문체로’ 처음 맞닿은 전환점(30대 진입)을 건너 새로운 전환으로 계속 걸음을 옮기는 변곡점을 그리고 있다.”
정말이다. 문장들은 화려하고 강건하다.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을 이루고 있는 단어들은 좋게 얘기해서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을 읽다가 눈은 글자를 따라가고 있건만, 머릿속에선 곱창구이가 좋은지, 곱창전골이 좋은지 고민하는 갈림길에서 헤매는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같은 문단을 또다시 읽어야하는 비능률을 겪었는데, 어쩜 그렇게 <말리나> 때와 같았는지. 물론 <말리나>가 훨씬 더 심하긴 했지만.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들이 한 시절 형성했던 “47 그룹” 작가들 가운데 몇몇이 이런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바흐만은 좀 심하다. 바흐만과 연애했던 프리쉬도 간혹 비슷한데 이이와 비교하면 약하다.
삼십 세. 참 갑갑한 시절이다. 이젠 작품 속 나이 삼십이나, 작품을 썼던 당시 작가의 나이 서른다섯이나 그게 그거인 때를 맞았지만, 바흐만은 그래도 기특하게 서른 살 즈음에서 “생기에 넘쳐 닥쳐올 것과 손을 잡”는 결론을 내린다.
김광석은 나이 서른에, “조금씩 잊혀져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궁상을 떨었고,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던가 하여간 서른을 맞으며 이제 청춘도 물러간 것을 인식했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은 온다. / 시큰거리는 치통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노래하면서 독한 배갈 한 병 나발을 불었고, 최영미는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파장난 잔치의 뒷설거지를 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건강하긴 하다.
30세로 접어드는 건 정말 특별한 사건이다. 역자 차경아가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서른 살의 문턱을 넘어선 것을 깨닫는 날, 목구멍으로 무턱대고 차오르는 언어의 발효를 막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게 되고, “그것이 후회이든, 변명이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관조이든 개안(開眼)이든 간에 서른 살이라는 에폭(epoch)에 매달려, 무작정 호소하고 싶은 충동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기막힌 표현이다. 차경아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 사실 바흐만의 <삼십세>는 읽으나마나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삼십세> 역시 “에폭에 매달려 호소하는 충동의 순간"의 이어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 번 읽어볼 만하지만 권하지는 않겠다. 누군들 서른 즈음해서 한 번의 곡절이야 없었겠느냐만, 자신의 곡절이 유난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는 좋을 수도 있겠다. 큰 아이가 내년에 서른. 다음 주에 집에 온다니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오랜만에 꼰대 티 한 번 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