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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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소설이라 읽어봤다. 제목을 왜 이렇게 뽑았을까. 내가 편집자라면 <도쿄만 풍경> 비슷하게 달았을 거 같다. 한문 東京灣景을 우리말 음가 그대로 썼는데, 내 경우, ‘동경’과 ‘만경’ 운이 비슷해서 동경↗ 만경↘, 이런 식으로 읽어버렸으니, 도쿄 배경의 만경晩景, 늦은 경치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뭐 일리가 있잖은가. 정작 헌책을 사서 표지를 보니까 한문으로 東京灣景이라 쓰여 있는데, 東京灣은 고동색으로, 景은 검정색으로 ‘東京灣景’ 달리 색을 칠해놓았다.
 연애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소설이고, 일본에선 드라마로도 만들어 작가로 하여금 돈벼락을 맞게 했던 모양. 얼마나 좋았을까. 전형적인 일본 대중소설. 내가 대중소설 알기를 우습게 아는 인종이 아니란 건 아실 것이지만, 일단 내 취향이 아니다. 쉽게 읽히고 그래서 진도 잘 나가고, 유별난 베드 신이 없는 것까진 좋은데, 원래 사랑이란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라 딱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범은 없을지라도 적어도 화르륵 불타오르는 정점은 한 번 찍어줘야 제 맛이다. 바로 이때 작가가 정점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멸의 명작이 되고 셰익스피어가 눈부신 극작가로 변신하는 것.
 내 취향하고 제일 맞지 않았던 건 작품의 결말을 위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연출의 영화 <일식>을 가져다 쓴 것. 다시 말 하건데, 이런 방식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찍이 영화 <일식>을 본 적이 있는 작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구상했던 결론이 <일식>과 같았을 수도 있고, <일식>을 본 다음에 이 영화의 피날레를 소설 속에서 한 번 써보고 싶었을 수도 있는 바, 둘의 공통점은 연애소설의 결말(희한하지? 연애소설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 이별인 것이. 그래 연애소설은 기본적으로 이별소설이다.)을 보다 쉽게 장식할 수 있었으며, 결말을 위해 작가가 머리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시도를 해볼 필요가 없었다는 것. 그냥 아마추어 독자인 내가 그런 걸 싫어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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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0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제목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그냥 동경만의 풍경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요.

공감합니다, 아무리 고전이고 걸작이고 해도
자신의 취향이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꽝이지욧.

Falstaff 2018-09-07 09:54   좋아요 0 | URL
옙. 동경만을 사이에 두고 직장을 가진 여자와 남자 사이의 ˝몸의 사랑˝이 주제입니다. 저주지요, 저주. 마음은 끌리지 않지만 속궁합이 찰떡인 커플.
취향에 관한 의견에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잠자냥 2018-09-0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동경↗ 만경↘, ‘이 아니었군요! 놀라워라... ‘동경만 경‘이었다니....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암튼 폴스타프 님 덕분에 제목은 확실히 알고 갑니다. ㅎㅎ

Falstaff 2018-09-07 11:32   좋아요 0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최측의농간 시집선 1
박서원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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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이렇게 쓰면 안 된다. 당신 시 때문에 다른 시인들은 전부 엄살쟁이가 됐을 뿐더러 실재하는 고통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낱말들을 휘갈긴 꼴이 되고 말았다.



 탈혼



 신발을 버리고 뛰쳐나왔어
 팔팔 뛰는 심장을 가지고
 너에게 갔어.


 시련이여
 시련이여 외치며


 여름 해와


 파리를 날리는 공원을 지나
 나무와 달과 언덕을 넘어


 느닷없이 나에게 와줄
 너를 고대하며
 마른 내 뼈를 씹다가
 
 이제는 기다리지도 않고
 미친 듯이 달려왔어.  (전문)



 시들이 아파서, 너무 아파서, 읽다가 중간에 박서원 시인을 검색해봤다. 1960년생. 인터넷 자료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내가 읽어본 바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아버지의 이른 죽음, 무능한 어머니와 할머니, 고교 중퇴, 성폭행, 정신병, 발작과 경련 증상, 기면증, 22세 연상의 교수와 연애 실패, 결혼과 이혼, 만 52세의 이른 죽음 등이다. 그러면 이 시 <탈혼>은 언제쯤일까. 신발을 버리고 맨발로 미친 듯이 시련이여, 시련이여를 외치며 시련에게 달려갈 때가. 이이는 따로 시 작법 같은 걸 배운 적 없이 그냥 시집 몇 권을 읽더니,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몇 개의 시를 투고하고, 그것이 채택되어 서른 살, 1989년에 등단했다고 한다. 그러니 시가 신선하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고통은 누구의 것이나 아픈 법이다. 특히 시인의 것들은. 하지만 박서원의 시는, 소설가 한창훈의 말마따나, 출판사 화장실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각혈실(咯血室에) 가서 피를 토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지난 어느 날, 이이의 대뇌에서 갑자기 혼이 탈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걸 스스로 맨발로 시련에게 달려갔었다고 노래한다.
 비로소 시인이 정상이 아님을 알아챈 가족은 때론 병원에서 과학의 힘으로, 때론 사이비 교회에서 안수기도로 치료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중에 단식기도도 있었나보다.



 단식기도



 1
 그해 여름은 창백했었다
 가지마다 휘어진 잎들이 무성한 거리에는
 낳아도 자라나지 않는 아이들이 득실거리고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수차례 매질을 했으나 대낮이 깊을수록 대낮의 빛깔은 사라질 뿐 어디서 불어오는 뼈아픈 향기일까 나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못했다


 2
 그해 여름은 장마도 지나쳐버렸다
 하얀 접시처럼 떠있는 태양의 견고함 아래
 먹지도 배설하지도 못하고 좀약 냄새나는 골방, 지긋지긋한 찬송가만이 나를 일으켜 자꾸 살라고 살라고 으르렁거리고
 그동안 내 속에서 터를 익혀가던 악마는 찬송가의 예민한 침에 자꾸 기절해갔다
 어머니, 어머니, 살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아요
 그해 여름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 이건 도박이예요 나는 매일매일 나무를 심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해요 내 딸아 그런 건 나중에 하렴 너는 지금 역신을 물리쳐야 해
 그해 여름 나는 꽃 자줏빛 꽈배기가 된 전신으로 형벌이여 형벌이여 되묻고 되물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주여,  (전문)



 인생은 흘러간다. 다 지나가버린다. 시인 속의 역신을 물리쳤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기도원의 처용무가 하도 가혹해 육체적으로도 그녀는 간혹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는 했나보다. 기면증의 발병일 수도 있겠다. 몸은 경련을 해서 눈알이 위쪽으로 확 치켜 올라가고 뒷목의 근육이 수축되면서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와중에, 불행하게도 시인의 의식은 명료하기만 했다.



 발작 · 1



 사지는 마비되려 했어
 신경은 끊어진 필라멘트


 땅 위에서 걷지 못하는 나와
 모여드는 군중


 누군가가 말했어
 「발작하나 봐」
 「간질인가 봐」


 나는 말하고 싶었어
 헌데 무얼 말해야 하지?
 아직 귀여운 아가씨인 내가


 그렇지 않아도 병원에서 오는 길이라고?


 누군가가 또 말했어
 「구경 그만하고 가자」


 나는 행복하게도
 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던 거지


 누군가가 가다가 되돌아왔어
 「좀 더 구경하고 가자」   (전문)



 아무리 험한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한 구석에선 평온한 시기도 있는 법. 시인 역시 그런 시간을 잠깐이나마 누리곤 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한 달



 한 달 동안 놀았다
 논다는 개념에 시달리며
 혼자였던 시절에 시달리며
 갓 들어온 올케와
 갓 제대한 막냇동생 때문에


 이렇게 웃음꽃이 피는 가족과
 혼자 살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무슨 영화의 콘트라스트가 되어


 문학 같은 거 집어치우고
 예술 같은 거 더더욱 집어치우고


 비디오와 라디오 농담
 비빔국수 되어


 신경증에 시달렸던
 내 평생에
 농익은 오렌지 되어


 놀아라, 놀아라, 놀아라.


 신앙 같은 거 잊어버렸다
 깨어있으려는 의지도 잊어버렸다


 서로를 저버렸던 과거 같은 거
 지지난밤 울어대던 도둑괭이에게
 던져주었다   (전문)



 시인은 놀면서도 신앙도, 의지도 다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저버린 과거 역시 다 내던져버린다. 이 동생이 맞는지 모르지만 박서원 시인이 죽으면서 남긴 단 한 장의 메모에는 자신의 저작권을 동생에게, 조카가 스물일곱 살이 된 이후에는 조카에게 남긴다고 썼다.
 1989년 데뷔라면 안타깝게도 그 시절 나는 책이나 시집을 읽어볼 여유가 없던 초년 대리급 직원이었다. 이 시인의 이름조차 생소했다. 궁색한 변명이나 어쩔 수 없다. 이제나마 읽어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시를, 아픈 시를 쓰려면 이렇게 아파야 한다. 진정한 시적 고통은 독자가 읽으면 안다. 진정한 아픔을 아는 시인은 어떻게 노래하는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읽고 느껴보시라. 요즘 많고 많은 시인들, 물론 당신들의 우울은 존중하지만, 너무 징징대지 말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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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7
정궈웨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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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선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 거의 절대적인 의미를 둔 것 같다. 성체배령이 여기서 기인한 듯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제자의 세 번에 걸친 배신, 유다의 밀고 등등도 있지만. 물론 집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검은 양의 의견이니만큼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경에 쓰여 있는 바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새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경 ‘말씀’은 네이버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톨릭, 개신교 중 어느 쪽 성경인지 모르겠다.) 기독교인이 아닌 내가 어찌어찌하여 예배당에 가 미사집전을 하는 흰 옷을 입은 사제를 본(구경한) 바, 영세를 받아 자격증을 취득한 자들에 한해 하얀 밀떡 한 개씩을 혀 위에 올려주고, 자신은 붉은 포도주를 잔에 담아 마시면서 위와 같은 ‘말씀’을 읊었다. 내 기억으론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했던 거 같은데, 물론 그게 중요하진 않겠지. 하여간 포도주는 사제 혼자 홀랑 마시고 그것도 아까운지 다시 물을 부어 헹구더니 헹군 물까지 그냥 꿀떡 삼키는 걸 보고, 아 드러, 길 잃은 어린 양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불경스럽게도.
 정궈웨이의 드라마 <최후의 만찬>은 이런 거창한 의식의 집전은 아니다. 아니, 거창하지 않지만 거의 비슷한 무게로 심각한 의식이 집전이다.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식사. 그게 누구의 죽음이냐가 무에 차별이 있겠으랴. 그러나 극작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성경에 나오는 신성한 것이라기보다 유진 오닐을 읽는 거 같은 쓸쓸함의 바람이 휙휙 불어온다.
 등장인물은 딱 세 명.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아버지는 마지막에 한 1분가량 등장하니 극의 거의 전부는 어머니와 아들이 저녁을 함께 먹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어머니가 40세, 아들이 22세. 그러니까 18세에 어머니가 임신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젊은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결혼 후 순식간에 도박에 빠져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개망나니로 돌변했다. 집안에 돈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죄다 긁어가 경마, 파친코 등의 도박장에 가져다 바치고, 어느 순간 수중에 거액이 떨어지면 홧김에 길가의 여자를 사 만족을 얻고, 여기서 얻은 흉한 성병을 아내에게 옮기는 것도 모자라, 쉴 새 없이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폭행을 행사한다. 초등학교 2학년, 일곱 살 때 아들 궈슝은, 자신이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돈을 따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숨넘어가기 바로 전까지 두드려 맞았으며, 이 일로 기어이 아버지는 감옥에 가고 궈슝은 법원의 판단으로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여덟 살 때까지 고아원에서 살아야 했다. 고아원에서 나온 후에 홍콩사회에 적응해 나름대로 살아보려 했으나 이미 비뚤어진 성격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연애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하필 오늘 아침 애인이 짐을 싸 떠난 상황이다. 바로 이때, 엄마 리빙한테,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전화가 온다.
 “그 사람. 그 개자식은요?”
 궈슝이 말한 사람, 그 개자식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엄마 리빙은 그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집에 와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그래서 무척이나 오랜만에 모자간 둘이서 돼지사골로 끓인 곰탕을, 자신들의 최후의 만찬으로 하고자 하는, 참 쓸쓸한 홍콩의 엘레지.
 홍콩의 하층민이 그려내는 삶의 이야기가 조금은 궁상맞지만 괜찮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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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여주인 프랑스 현대문학선 24
레몽 장 지음, 이재룡 옮김 / 세계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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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주인이면 주인이지 왜 여주인이라고 쓰느냐. 이렇게 주장할 만한 등장인물이 이 책 속에 한 명 있다. 초등학교 교사이자 페미니스트 클라리스. 우리말에는 없지만 서양말엔 거의 성의 구분이 있어서 굳이 ‘여주인’이라 제목을 단 것 같으니 이해해주시라. 심지어 독일에선 정원사도 여자일 경우엔 “Die Gartnerin"이라고 쓰니까. 클라리스도 비슷한 발언을 한다.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합해서 복수가 될 때 왜 남성의 복수형으로 써야 하는지 따박따박 따지는 장면. 클라리스는 이이가 책의 남녀 주인공, 소설가 쟈송과 아름답고 농염한 카페 주인 아멜리를 물 먹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얘기해드리지.
 때는 1961년 초반 약 100대 1의 프랑화 평가절하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니까 그냥 60년대 초라고 해두자.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처에 거의 완전한 시골 동네 ‘생플로렝’이라고 있었는데 ‘메일 광장’ 앞에 있는 카페의 유부녀 사장 아멜리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관능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멜리 스스로도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생플로렝의 모든 남자가 쉼 없이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있는 것을 일찌감치 즐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에겐 단 한 가지, 남편 뤼시엥이 아비뇽에서 사업상 금전적 곤란에 처해 있다는 것만 빼놓고 뭐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 단, 시골의 소박한 경제를 감안해서 그렇다는 말씀.
 이런 찰라, 마을과 좀 떨어진 외딴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일 년에 반 정도를 묵으면서 작품도 쓰고, 전원생활도 즐기고, 체력보강도 하는 소설가 쟈송이 등장한다. 이이는 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실 것. 뭐 변태, 이런 따위가 아니다. 인도나 중국, 그것도 아니면 티베트 정도에서 도나 기를 닦는 것과 비슷하게, 사진이나 초상화, 아니면 심지어 수시로 등장하는 TV 화면에 정신을 집중하면 해당 여성들과 성적 교감을 ‘홀로’ 느낄 수 있는 신비의 상태에 이른 인물이다. 이이가 하루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카페에 들게 됐고,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해 아멜리로부터 한 잔 건네 마신 적도 있다. 물론 한 눈에 아멜리의 얼굴과 관능이 넘치는 육체까지 몽땅 훑었음은 당연하고, 아멜리는 모든 남자가 보내는 시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쟈송의 눈길을 받은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도가 튼 인간이라도 눈빛 하나는 별 볼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쟈송은 그녀의 초상화나 사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해 그의 특기인 건식 섹스, 즉, 드라이 섹스를 즐길 수 없어 전전긍긍, 소설의 초장에 아멜리한테 네 문장으로 된 편지를 보내고 만다. 요약해서, 하룻밤 동침해주면 10만 프랑을 내겠소.
 편지를 받고 기겁을 한 아멜리. 길 건너 어려서부터 친구인 필로멘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편지를 보여주니까, 필로멘이 하는 말. “겨우 10만 프랑?” 아멜리가 다시 꽥 소리를 지르는데, “신화폐로 10만 프랑이야, 신프랑으로.” “뭐라? 그럼 몇 달 전의 1,000만 프랑?” 필로멘, 뒤집어진다. 지금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신프랑으로 10만이면 절하 전엔 1,193만 프랑이다. 지금 우리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한 5억~10억? 2002년 기준 환율로 유로로 바꾸고, 40년간 이자율을 4%로 봐서 환율 1,300원으로 계산하니 약 1억 원이 나오는데, 40년간 인플레와 구매능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적어도 5억 이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것도 시골 깡촌에서. 뭐라?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 무어 나오는 <은밀한 유혹>이 생각난다고? 그때 레드포드가 무어에게 하룻밤 동침의 대가로 제시한 돈이 1백만 달러. (IMF 이전이던)당시 환율로 약 8억 원. 비슷한 수준이겠다.
 하여간 아멜리가 필로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필로멘과 아멜리는 편지 보낸 작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또 우체국에서 일하는 친구 이르마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이번엔 정작 당사자인 아멜리를 빼고 필로멘과 이르마 둘이서 페미니스트 친구 클라리스와 상의하기에 이르는데, 클라리스가 생플로랭의 이장, 신문기자, 방송국 등등 모든 곳에 다른 것도 아니고 “너만 알고 있어”를 퍼뜨리고 만다. 다 그런 거지.
 김화영이 번역한 <책 읽어주는 여자>를 재미있게 읽고 딱 한 작품만 더 읽어보고 나서 장의 작품을 계속 읽을 것인지 정하겠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눈에 띄면 사서 읽게 될 거 같다. 우리나라의 대표 불문학자인 김치수, 김화영, 최현무 등이 레몽 장을 사사했을 정도로 소설뿐만 아니라 제3세계에 프랑스 언어와 문학을 널리 알리는데 공헌한 불문학자이기도 하단다. 좀 근엄할 거 같이 생긴 외모지만 그가 쓴 소설(이래봐야 겨우 이제 두 편이지만)을 읽어보니 참 재미있다. 곳곳에 웃음 코드가 숨어 있다. 근데 이게 서양 사람들(특히 잉글랜드 인간들)이 쓴 희극을 읽으면서 느껴야 했던 어색함과 달리 책을 읽으며 킥킥거리는데 불편함이 없게 자연스레 웃긴다.
 이 책은 분명히 소설가 쟈송이 10만 프랑으로 아멜리의 섹스를 사려 제안을 한 것을 다루고 있으나, 이 행위를 매매춘으로 이해하는 건 명백하게 잘못이다. 그럼 이게 몸을 팔라는 제안이지 뭐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동침해주면 10만 프랑을 주겠다는 건 맞지만, 누구도 몸 파는 여인에게 하룻밤에 10만 프랑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 뭐냐고? 내가 그걸 가르쳐드리면 벌써 인간 됐게? 헌책방에 가시면 구할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시대 비평적이기도 하고, 궤변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레몽 장의 익살일 수도 있으며, 특히 지금 하는 내 말이 몽땅 거짓일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는 게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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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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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면 책 제목을 <윌리엄 트레버>라고 달았다. 원래 제목은 2015년에 간행한 <SELECTION OF STORIES by William Trevor>, 즉 <윌리엄 트레버 단편선>. 현대문학에서 찍은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의 15번째 책이다. 단편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시리즈를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눈에 들어오는 작가들만 보더라도 헤밍웨이, 포크너, 만, 해밋, 트레버, 멜빌, 겐자부로, 챈들러, 그린 등이 눈에 띈다. 흠. 외국 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포크너와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집이라니. 생각 좀 해봐야겠다.
 같은 사람의 단편집을 두 권 연달아 읽는 일. 바로 전에 트레버의 열두 단편을 엮은 <비온 뒤>를 읽고, 곧바로 스물세 편이 실린 <윌리엄 트레버>를 마쳤다. 같은 사람이 쓴 작품이란 것은 물론 단박에 알 수 있다. 트레버의 문체와 서술방식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성향과, 주인공들의 행동방식과 주제 같은 것에 공통적인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 이것, 즉 작품 속에 일관하게 이어지는 특징 때문에 어떤 작가들(사실상 많고 많은 소설가들)의 단편집을 읽는 일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트레버는 아니다. 연달아 서른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로운 흥미를 이끌어내곤 한다. 아무나 이렇게 쓸 수 있는 거 아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대부분 많은 세월을 살아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세계관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작품 속 시간은 쉽사리 과거에서 현재로 수십 년을 건너뛰고, 과거에는 많이 중요한 것들이 이젠 하잘 것 없는 일이 되기도 하며, 어려서는 모든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던 소년이 오늘,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위험한 중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노인과 몇몇 약자는, 대중과 상대적으로, 권력이 됐건 육체적인 힘이 됐건 간에 힘 있는 타인에 의하여, 비록 그것이 악의로 무장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선의와 천진에 의거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세계. 작가가 1928년생으로 대개 1920년대 중후반쯤에 출생한 인물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은 건 인지상정이라 여길 수 있으며, 간혹 그들의 (조)부모나 자녀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윌리엄 트레버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쓰는 독후감을 이리 건조하게 서술해도 되는 걸까? 문학과 관련한 강좌 한 번 들어보지 못했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은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트레버의 단편집들, <비온 뒤>와 <윌리엄 트레버>에 실린 작품들 하나하나를 보면서, 만일 단편소설 교과서가 있다면 바로 이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현대 우리나라 작가들의 감각적인 단편들과는 많이 차이가 나기는 한다. 그리하여 내가 느낀 교과서 운운은 정말로 단편소설을 쓰는 사람들, 소설 공부를 하는 이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만하겠다. 그러나 대상을 관찰하고, 취재해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진행과정이 어디 하나 넘치는 곳도 없고 모자란 곳도 없이 꽉 짜여 있으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이야기의 쓸쓸함’이 매혹적이었다. 책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뭔가 하나가 결핍된 인물들의 이야기. 그건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대단히 위대했던 여름이 드디어 갔다. 아직은 남은 태양의 여열에 숨이 막힐지언정 누가 뭐라 해도 이제는 가을이다. 만일 이 누추한 독후감을 보고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을 선택하시려 하면, 한 달쯤 더 흘러 가을이 깊어갈 때 더욱 어울릴 수 있을 거란 힌트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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