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어요 최측의농간 시집선 1
박서원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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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이렇게 쓰면 안 된다. 당신 시 때문에 다른 시인들은 전부 엄살쟁이가 됐을 뿐더러 실재하는 고통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낱말들을 휘갈긴 꼴이 되고 말았다.



 탈혼



 신발을 버리고 뛰쳐나왔어
 팔팔 뛰는 심장을 가지고
 너에게 갔어.


 시련이여
 시련이여 외치며


 여름 해와


 파리를 날리는 공원을 지나
 나무와 달과 언덕을 넘어


 느닷없이 나에게 와줄
 너를 고대하며
 마른 내 뼈를 씹다가
 
 이제는 기다리지도 않고
 미친 듯이 달려왔어.  (전문)



 시들이 아파서, 너무 아파서, 읽다가 중간에 박서원 시인을 검색해봤다. 1960년생. 인터넷 자료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내가 읽어본 바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아버지의 이른 죽음, 무능한 어머니와 할머니, 고교 중퇴, 성폭행, 정신병, 발작과 경련 증상, 기면증, 22세 연상의 교수와 연애 실패, 결혼과 이혼, 만 52세의 이른 죽음 등이다. 그러면 이 시 <탈혼>은 언제쯤일까. 신발을 버리고 맨발로 미친 듯이 시련이여, 시련이여를 외치며 시련에게 달려갈 때가. 이이는 따로 시 작법 같은 걸 배운 적 없이 그냥 시집 몇 권을 읽더니,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몇 개의 시를 투고하고, 그것이 채택되어 서른 살, 1989년에 등단했다고 한다. 그러니 시가 신선하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고통은 누구의 것이나 아픈 법이다. 특히 시인의 것들은. 하지만 박서원의 시는, 소설가 한창훈의 말마따나, 출판사 화장실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각혈실(咯血室에) 가서 피를 토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지난 어느 날, 이이의 대뇌에서 갑자기 혼이 탈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걸 스스로 맨발로 시련에게 달려갔었다고 노래한다.
 비로소 시인이 정상이 아님을 알아챈 가족은 때론 병원에서 과학의 힘으로, 때론 사이비 교회에서 안수기도로 치료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중에 단식기도도 있었나보다.



 단식기도



 1
 그해 여름은 창백했었다
 가지마다 휘어진 잎들이 무성한 거리에는
 낳아도 자라나지 않는 아이들이 득실거리고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수차례 매질을 했으나 대낮이 깊을수록 대낮의 빛깔은 사라질 뿐 어디서 불어오는 뼈아픈 향기일까 나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못했다


 2
 그해 여름은 장마도 지나쳐버렸다
 하얀 접시처럼 떠있는 태양의 견고함 아래
 먹지도 배설하지도 못하고 좀약 냄새나는 골방, 지긋지긋한 찬송가만이 나를 일으켜 자꾸 살라고 살라고 으르렁거리고
 그동안 내 속에서 터를 익혀가던 악마는 찬송가의 예민한 침에 자꾸 기절해갔다
 어머니, 어머니, 살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아요
 그해 여름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 이건 도박이예요 나는 매일매일 나무를 심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해요 내 딸아 그런 건 나중에 하렴 너는 지금 역신을 물리쳐야 해
 그해 여름 나는 꽃 자줏빛 꽈배기가 된 전신으로 형벌이여 형벌이여 되묻고 되물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주여,  (전문)



 인생은 흘러간다. 다 지나가버린다. 시인 속의 역신을 물리쳤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기도원의 처용무가 하도 가혹해 육체적으로도 그녀는 간혹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는 했나보다. 기면증의 발병일 수도 있겠다. 몸은 경련을 해서 눈알이 위쪽으로 확 치켜 올라가고 뒷목의 근육이 수축되면서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와중에, 불행하게도 시인의 의식은 명료하기만 했다.



 발작 · 1



 사지는 마비되려 했어
 신경은 끊어진 필라멘트


 땅 위에서 걷지 못하는 나와
 모여드는 군중


 누군가가 말했어
 「발작하나 봐」
 「간질인가 봐」


 나는 말하고 싶었어
 헌데 무얼 말해야 하지?
 아직 귀여운 아가씨인 내가


 그렇지 않아도 병원에서 오는 길이라고?


 누군가가 또 말했어
 「구경 그만하고 가자」


 나는 행복하게도
 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던 거지


 누군가가 가다가 되돌아왔어
 「좀 더 구경하고 가자」   (전문)



 아무리 험한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한 구석에선 평온한 시기도 있는 법. 시인 역시 그런 시간을 잠깐이나마 누리곤 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한 달



 한 달 동안 놀았다
 논다는 개념에 시달리며
 혼자였던 시절에 시달리며
 갓 들어온 올케와
 갓 제대한 막냇동생 때문에


 이렇게 웃음꽃이 피는 가족과
 혼자 살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무슨 영화의 콘트라스트가 되어


 문학 같은 거 집어치우고
 예술 같은 거 더더욱 집어치우고


 비디오와 라디오 농담
 비빔국수 되어


 신경증에 시달렸던
 내 평생에
 농익은 오렌지 되어


 놀아라, 놀아라, 놀아라.


 신앙 같은 거 잊어버렸다
 깨어있으려는 의지도 잊어버렸다


 서로를 저버렸던 과거 같은 거
 지지난밤 울어대던 도둑괭이에게
 던져주었다   (전문)



 시인은 놀면서도 신앙도, 의지도 다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저버린 과거 역시 다 내던져버린다. 이 동생이 맞는지 모르지만 박서원 시인이 죽으면서 남긴 단 한 장의 메모에는 자신의 저작권을 동생에게, 조카가 스물일곱 살이 된 이후에는 조카에게 남긴다고 썼다.
 1989년 데뷔라면 안타깝게도 그 시절 나는 책이나 시집을 읽어볼 여유가 없던 초년 대리급 직원이었다. 이 시인의 이름조차 생소했다. 궁색한 변명이나 어쩔 수 없다. 이제나마 읽어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시를, 아픈 시를 쓰려면 이렇게 아파야 한다. 진정한 시적 고통은 독자가 읽으면 안다. 진정한 아픔을 아는 시인은 어떻게 노래하는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읽고 느껴보시라. 요즘 많고 많은 시인들, 물론 당신들의 우울은 존중하지만, 너무 징징대지 말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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