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8
앙리 바르뷔스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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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대단히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바르뷔스의 번역 저작이 이 <지옥> 말고는 한 권도 없다. 이이가 말년에 공산주의에 심취해, 1934년 모스크바 방문 중 현지에서 사망해 그랬나? 1873년 생. 이 작품은 1908년 출간. 역자 오현우 선생은 작품 해설에서 “바르뷔스는 에밀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풍의 작품세계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이 책 <지옥>에서 졸라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졸라라기보다 오히려 세기말 주의 비슷한 탐미, 허무, 비장, 죽음 같은 어두운 무드가 초지일관 계속되는 데 조금 질렸을 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 작가 자신이 시집 <흐느끼는 여인들>로 스물두 살에 데뷔를 해서 그런지 시적인 산문으로 위에서 얘기한 세기말 적 분위기를 정말 아름답게 써놓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단박에 바르뷔스의 글에 빠져버렸고, 문학 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각적이고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만일 그것들을 독후감에 인용한다면 A4 용지로 열 장은 넘겨 써야할 거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만고의 진리. “꽃노래도 삼세번.”
 100쪽을 넘기면서 엉뚱하게도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생각났다. 저절로 그이가 떠오르더라. 탐미적이고, 아름다움을 찾는 뛰어난 시선과 단어를 가진 매력적인 문장가. 그이가 쓴 <인상과 풍경>을 읽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세상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 그런데. 처음에 깜짝 놀랐던 로르카 표 몽상과 탐미와 섬세한 감각이 하도 계속되니까, 나중엔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바르뷔스의 이 책은, 고독한 한 프랑스 남자가 당연히 여성을 찾다가, 몇 번의 좌절 끝에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 벽의 빈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담았다. 우연히 찾게 된 빈틈으로 처음엔 그냥 빈 방, 그 텅 비어 있음의 나체 상태를 보는 것에서, 하녀가 혼자 들어와 반라의 상태까지 되는 것을 지나, 드디어 방에 든 첫 번째 커플. 사촌 관계인 둘이 서서히 피부를 맞대고, 키스를 하고, 옷을 벗고 벗기는 순간 그들을 찾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지나, 드디어 성인 남성과 여성이 저녁 어스름 빛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는 시인, 여자는 ‘에메’라는 이름의 유부녀. 이른바 불륜 관계. 당연히 이 소설은 작가의 뇌 활동에 의해서만 쓰인 것이어서, 이들이 쉬지 않고 입을 맞추며 나누는 대화 역시 전부 작가의 상상력일 터인데, 매우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치명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다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 지쳐빠지게 만든다. 남편을 통해서는 성적 만족도, 사랑의 확인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한 방에 들어 이리도 장황한 말을 할 수, 들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면 남자는? 리비도의 분출을 억제하고 자연의 어둠이 그대와 나 사이를 막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적극적 몸의 접촉을 억제하고, 죽자 사자 아름답고 치명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만 나불대며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농담해? 이런 의미에서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 풍”은 헛소리, 또는 이 작품을 뺀 다른 소설에 해당하는 말이라 단정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주가 되는 명사들은, 거의 다 추상명사들이다. 꿈, 슬픔, 죽음, 과거, 사랑, 구원, 선량, 겨울, 비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tc, etc. 그래, 그래. 나중에 하긴 한다. 작품을 처음 출간한 1908년 수준으로 보면 매우 선정적일 수도 있는 언어로.
 이어서 난데없이 죽음을 앞둔 그리스 출신 부자 노인이자 병자와, 젊은 아가씨와 출산을 앞둔 여자.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필이면 임산부는 화자이자 며칠 후 실업자가 되면서 호텔방을 해약하고 나가버릴 음험한 관찰자 앞에서 산도를 훤하게 드러내놓고 출산을 하며, 병자는 데려온 젊은 처녀와 결혼을 통해 거액을 상속해주고, 그리하여 부인이 된 여자는 눈만 살아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벽의 빈틈 사이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에게) 이제 온전히 남편의 것이 된 자신의 동정녀 상태인 나신을 공개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병자는 가톨릭 신부 앞에서 다분히 사회주의적 토론을 통해 회개하기를 거부한 후 죽음을 맞으며, 죽음을 앞둔 환자 앞에서 호텔 주인이 몰래 들어와 가방 속에서 지폐뭉치 한 다발을 훔쳐나간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추상명사의 대행진. 이어 상복을 입은 처녀 과부 안나가 자신의 처녀성을 던져버린다. 독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장면을 소설의 진짜 스토리의 하나로 읽어도 되고, 작가 또는 화자의 상상력의 힘으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자신을 벽의 틈새로 옆방을 엿볼 수 있는 한 호텔방에 유폐한 채 스스로를 관음의 지옥 속으로 떨어뜨린 남자의 이야기. 나중에,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옆방을 들여다보는 남자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는, 그 즈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소설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글쎄. 내 생각엔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지난 세기말적 작품이 조금 더 발전한 상태인 것 같다. 20세기 초반 작품임에도 상당히 모던한 감각이 돋보이는데, 내 취향엔 조금 과했다. 내가 18세기, 19세기 초반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남이 써놓은 글 열심히 필사하는 작가 지망생들은 읽어볼 만하겠다. (근데 ‘필사’가 좋은 방법이긴 한가? 필사 좋아하다가 자신이 필사해놓은 대목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베낀 경우는 없을까? 난 있다는데 만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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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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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52번째 작품.
 이 출판사의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이제 겨우 52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출간한 권수에 비해 밀도 있는 작품이 몰려 있다. 예를 들어, 출간 역순으로,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 허먼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F 스콧 핏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 일리아 일프와 예프게니 페트로브 공저 <열두 개의 의자>, 안나 제거스의 <제7의 십자가>,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발레리 라르보의 <페르미나 마르케스>,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 등등. 여기다가 다른 출판사와 겹치는 <베를린 알렉산더 공원> 같은 것들까지 합하면 정말 정선한 작품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멜빌과 핏제럴드의 작품은, 번역과 오역 여부는 모르겠고, 역자가 바꾼 우리말 문장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 권하지 못하겠다. 이 두 작가의 책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들이 매혹적이라,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를 주시해왔는데,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2016년에 한 권, 17년에도 한 권, 18년에도 또 단 한 권만 냈을 뿐이다. <아르망스>는 2018년에 찍은 단 한 권의 세계문학의 숲. 그것도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든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스탕달. 어찌 일독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827년. 190년 전이다. 스탕달은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해 1814년 키 작은 영웅이 엘베 섬에 유배될 때까지 충직한 지지자로 있다가 유배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다. 엘베 섬에서 탈출해 백일천하를 누린 나폴레옹에게 합류하지 않은 서른한 살의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따뜻한 풍광 속에서 열심히 연애를 하고 실연을 당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는데, 자신 스스로가 우울증 증세가 심해 자살시도도 하고 그랬나보다.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저작생활을 하다 마흔네 살이 됐을 때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이 바로 <아르망스>.
 지금부터는 내 짐작이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저 멀리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 12세기 당시 왕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한 유서 깊은 귀족들이 진짜 귀족이고, 재주는 파리 시민이 부리고 돈은 코르시카 촌놈이 벌었던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 때 보나파르트가 함부로 던져주던 귀족 작위를 얻은 신흥귀족 사이엔 서로 반목과 멸시가 있었다(고 다른 책에서 읽었다).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스탕달 입장에선 당연히 오랜 귀족들에 대한 묘한 질시와 경멸과 열등감과 이상하게도 자신의 눈에 두드러져보이던 위선 같은 것이 강조되었을 수 있다. 여기다가 자신이 심각하게 경험한 우울증. 이 둘이 합해져 그의 첫 번째 소설 <아르망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잽싸게 망명했다가 1825년 전후로 다시 돌아온 옛 귀족의 우울증이 심한 외동아들을 주인공 ‘옥타브’로 내세웠다. 옥타브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프랑스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가 일찌감치 전사하고 엄마마저 곧바로 숨이 넘어가 먼 친척인 드 보니베 부인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아르망스 드 조일로프 양이다.
 재미난 것이, 아주 전형적인 19세기 문학이라는 점인데, 이 전통은 20세기 한국의 대중문화인 만화에서 주요 모티브로 쓰인 적이 있다. ‘이상무’라는 만화가를 기억하시나? 그가 만든 대표적 주인공 독고탁. 천애고아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우연히 그룹 회장급 생부가 나타나 팔자 고치고 잘 산다는 거. 옥타브의 집안인 드 말리베르 가문이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해보니 집안의 재산이 거덜이 난 상태. 거렁뱅이 귀족보다 한심한 것도 드물단다. 그러다가 1826년 왕정복고 후 옛 귀족의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해준다는 법령에 따라 한 방에 수백만 프랑의 재산이 생기는 기적이 벌어지고, 찬밥 신세인 잘생긴 청년 옥타브 역시 한 순간에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청년이 가난한 아가씨 아르망스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 이게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된다.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 불통”으로 인한 오해와 결투와 질투와 명예와, 우여곡절 끝의 결혼과 비극적 결말로 종을 치게 되는데, 읽다보면 답답해 죽는다, 죽어. 작품 속에, 특히 비극에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갈등이 생기는 방식과 그로 인해 두 주인공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구조가,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어, 그냥 19세기 초반에 나온 소설의 한계려니, 하고 말았다.
 혹시 나처럼 <적과 흑> 그리고 <파르마 수도원>을 머리에 떠올리고 이 책을 읽는 분은 읽는 도중에 남자 주인공 옥타브의 예를 따라 우울증 증세가 도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리라. 분명히 경고했다. 우울증 정도는 가뿐하게 여길 수 있으면 이 책에 도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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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1-24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답답하셨죠? 왜 말을 안하는 지 원... 현대 드라마에서 남주인공 여주인공들이 꼭 그러더니 스탕달에게서 배웠나봅니다. ㅎㅎ 암튼 아르망스의 그 이유는 참 ㅋㅋㅋ 헛웃음이 ㅋㅋㅋㅋㅋ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원 애두 참...

Falstaff 2019-01-24 12:37   좋아요 1 | URL
제 말이 그겁니다.
마누라가 바가지 긁으면서 가끔 하는 말이, 당신은 내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하참. 제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응. 말 해야 알아. 네가 귀신이랑 사는 줄 아니?
이거 읽으면서 정말 속 터지더군요. 책 읽으면서 잠자냥님 원망해본 게 처음입니다. ㅠㅠ (ㅋㅋㅋ)

레삭매냐 2019-01-24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에
<아르망스>에 대한 언급이 나오던데...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근디 출판사가 시공사라... ...

잠자냥 2019-01-24 21:28   좋아요 1 | URL
시공사는 작년에 대표가 아예 바뀐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전 씨 일가는 시공사와 아무 상관 없을 거예요.

Falstaff 2019-01-25 10:26   좋아요 1 | URL
전씨 자서전도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습지요.
이래서 인간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해야 한다니까요.
대대로 죄 받잖아요.

잠자냥 2019-01-25 10:55   좋아요 1 | URL
전 씨 및 이순자 자서전은 그때 ‘자작나무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냈는데, 알고 보니 그 출판사는 시공사 임프린트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썩은 자서전은 아들내미가 내준 게 맞지요.

관련 글 http://blog.aladin.co.kr/socker/9259387

그러나 어쨌든 작년에는 대표가 바뀌었고, 새 대표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 씨 일가와 아무 상관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으니 좀 믿어볼까 싶습니다.

Falstaff 2019-01-25 12:36   좋아요 1 | URL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은 좋은 작품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본문에도 썼지만, 멜빌과 핏제럴드는 권하지 않습니다.
번역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품을 망칠 수 있는지 경험하고 싶으신 분께는 적극 추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편집 관련 종사자께도 적극 추천. 일반 독자에겐 비추 itself 입니다. ^^
 
걸리버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94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혜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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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런 책을 읽어.
 여태 이리 생각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알파벳 문화권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숱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나날이 궁금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 책의 역자이자 건국대 영어영문학과에 소속되어 있는 이혜수의 작품 해설을 보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거의 최초의 서양 소설이며, 심지어 최초의 한글 번역이 1908년 잡지 『소년』에 실렸는바, 번역자가 조선 후기 천재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고, 11년 후 3·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이란다. 물론 일어 번역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당시엔 거의 다 그랬으니까.
 『소년』. 딱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다. 최남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그건 그렇고, 다른 곳도 아닌 이 잡지에 <걸리버 여행기>가 실렸다는 건, 이후 우리나라에서 110년 동안 <걸리버 여행기>를 우화나 동화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걸리버 여행기>는 어려서부터 숱하게 읽어봤는데, 하나같이 소인국, 대인국까지였으며 그저 조금은 우스운 동화, 어른이 되면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해왔다.
 이거, 틀린 생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1667년생. 잉글랜드 부모를 두었으나 더블린에서 출생한 인물. (어디서 본 조합이라고?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에서 이런 부부가 많이 등장한다. 이 부부가 낳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도.) 아무리 무뚝뚝한 잉글랜드 사람이더라도 물 좋은 아일랜드 와서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나보다. 스위프트의 전성시대가, 아이고, 앤 여왕 시대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가뿐하게 승리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야망을 차단한 후 스코틀랜드까지 통합해버린, 해가지지 않는 왕국의 여왕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다. 세상 곳곳에 영국 상선들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무역과 약탈과 전쟁의 승리로 북유럽의 섬나라에 쏟아져 들어오는 금덩이가 넘쳐나던 시기. 그러나 절정기라는 밝음 속에는 상대적으로 깊은 어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 상류사회는 친절과 예의와 기사도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부의 축적을 위해 온갖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 명을 부귀를 위해 천 명의 영국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끝도 없는 노동을 하다 지쳐 사기꾼, 노상강도, 소매치기, 주거침입자, 포주, 익살꾼, 도박꾼, 매춘부, 술고래, 매독보균자 등으로 추락해갔다.
 때는 절대주의 시대. 밖으로, 밖으로 탐험가들을 내보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절. 이에 발맞추어 일군의 해적, 조직폭력배 등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미개척지에 상륙해 눈에 띄는 원주민 아무나 도륙을 내고 조그만 나뭇조각이나 판판한 돌 위에 이 땅의 주인은 영광스런 대영제국의 앤 여왕의 식민지로다, 써서 세운 다음, 원주민 수십 명을 배에 태워 잉글랜드로 귀환해 여왕을 배알, 잡아온 원주민을 식민개척의 증거로 제출하기만 하면 해적이나 조직폭력배에서 졸지에 말단의 기사로 임명이 되던 야만의 시절. 벌거벗은 원주민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해군이나 해적들 가운데 누가 더 야만의 상태인가. 글쎄, 스위트프가 이런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주인공이자 선상의사船上醫師인 걸리버가 희한한 네 번의 항해를 하면서 모험지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 유럽과 영국이 누리던 영광의 이면을 날카롭게 꼬집어 비틀어버린 쓴 것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다. 그러니 이 책은 소인국과 대인국을 드나드는 환상동화로 각색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이 신랄한 풍자와 해학을 모르고 지나갔을 수밖에.
 작품에 대해 한 마디는 꼭 해야겠다. 이 책은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초엽에 쓰여 출판했다. 작중에서 걸리버의 입으로 숱하게 얘기하고 있듯이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수사 같은 걸 최소로 사용하고 오직 걸리버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일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이 주는 즐거움도 애초 배제한 글인 것도 맞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귀족 세계 전반에 대한 앞 뒤 가리지 않는 스위프트 식 풍자와 해학도 18세기, 19세기까지는 실로 적나라해서 독자에게 통쾌한 동의를 선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지났음에야. 서양 문학을 읽기 위한 기초체력을 함양한다는 의미에서는 읽어봐야 하겠지만 벌써 200년이 흐른 시점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의식에 동감하고 말고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 호머의 <오디세우스>와 소포클레스의 <독재자 외디푸스>는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한 감동을 준다. 왜? 두 작품의 차이점? <걸리버 여행기>는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이고, 그리스 시대의 두 작품은 기본적으로 스위프트의 것보다 훨씬 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보다는 개인이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이라서.


 영국에 여왕 바로 다음 지위로 ‘총리대신’이 있었나보다. <걸리버 여행기>가 얼마나 신랄한지 예를 드는 의미에서 좀 길지만 인용한다.


 “총리대신으로 오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아내나 딸 혹은 누이를 신중하게 처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임자를 배신하거나 음해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공개석상에서 분노에 찬 열의로 왕실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현명한 왕이라면 이 중 마지막을 실행하는 사람을 쓸 것이다. 그런 열성분자들이 결국 주인의 뜻과 감정에 가장 비굴하게 충성한다는 것이 늘 입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총리대신은 모든 임명권을 지니며, 상원이나 대의회의 다수 위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면책 법령이라 불리는 편법에 의해 퇴임 후 사후 문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국가의 전리품들을 가득 안은 채 공직에서 물러난다.
 총리대신의 공관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학교다. 시동과 종복, 문지기도 그들의 주인을 따라하는 것으로써 각자 구역의 총리대신이 되며, 오만과 거짓 그리고 뇌물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게 그들은 최고 지위의 사람들 덕분에 제2의 왕실을 이룬다. 또 가끔 교활함과 뻔뻔함 덕분에 여러 단계를 거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후계자가 되기도 한다.
 총리대신은 보통 타락한 매춘부나 총애하는 하인에게 지배받는다. 이들은 모든 특혜가 전달되는 경로이기에 궁극적으로 왕국의 지배자라고 제대로 불리기도 한다.” (371~372쪽)

 

 

 

 

 

 별점을 깍은 이유.

 나는 잘한 번역인지 오역인지는 모른다. 번역한 한국어 문장만 본다. 역자의 우리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동형과 피동형이 너무 많다. 영어 문장을 직역해서 그럴 거다. 결과는, 우리말이 되게 어색했다.

 오탈자의 교정, 교열? '을유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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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야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6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 외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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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시리즈, ‘세계문학전집’의 346번째 작품.
 20년 전,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을 시작하면서 편집위원 김우창, 유종호, 정명환, 안삼환은 이렇게 선언했다.


 “새로 작성할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두시언해」는 조선조 번역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 필요하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옙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모두 세 문단으로 되어 있는 선언문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이다. 세계문학 가운데 고전이라고 칭할 만한 것들을 다시 번역하겠다는 갸륵한 선언이고, 독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당대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이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많은 작품들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선언문의 뜻과 같이 새로운 호소력으로 다시 번역한 작품을 재독하기도 했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일야서>로 돌아와서, 읽는 중에 2012년에 관한 서술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고 얼른 책 뒷날개의 ‘선언문’을 확인했다. 어김없이 이 책에도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면서” 라는 제목의 선언서가 인쇄되어 있다. <일야서>는 2013년에 중국에서 발표 후 상하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고, 우리나라엔 2016년 민음사가 최초로 번역, 과감하게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목록에 올려놓았다. 위에 인용한 선언문의 두 번째 문단을 참고하면, 2013년에 최초 발간한 <일야서>, 아직까지는 지구의 다른 지역 독자들과, 무엇보다 시간의 판단을 받지 못한 작품을, 민음사 편집위원들은 두보, 괴테,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역시 1994년에 발표한 작품을 98년이던가 96년에 세계문학 시리즈 134번으로 올린 전력도 있었다. 파묵을 읽은 시점이 2010년대여서 그런가보다 했으나, 시리즈에 어울리는지는 더 숙고해봐야 한다.
 출판을 통해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웃기고 있네),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가 그동안 별로 돈이 안 됐는지 슬슬 시리즈를 닫으려 했다가 난데없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아 잠깐 돈을 벌었지만, 그래도 모던 클래식을 계속할 생각은 없는 거 같다. 그렇지 않다면 2013년에 발표한 신작을 2016년에 세계문학전집에 끼워 넣을 궁리까지는 안 했을 거 같다. 물론 편집위원들이 판단하기를 두보와 괴테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과 견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읽어보니 한사오궁의 <일야서>가 비록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상당히 중요한 판단근거, 시간의 검증을 아직 받지 못한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혹시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내놓지 않으면, 즉 단행본으로 만들면 팔리지 않을 거 같아, 바짝 쫄아서 궁여지책으로 346번째 자리를 준 거 아냐? 이리 야박하게 이야기 하는 건, 원래도 알았지만 요즘에 와서 출판사와, 저·역자들과 기타 관계자들이 자기들은 책 같지도 않은 걸 설사하듯 찍어내면서 얼마나 독자를 우습게 아는지 실감을 해서 그렇다. 우습게도 민음사한테는 이 비슷한 유감은 없다. 그래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하는 격이지만, (하는 걸 보니) 뭐 여기라고 별다르겠어? 창업한 분이 별세하니 기업의 정신까지 함께 묻힌 것 같다. 안쓰럽다. 출판사 입장에선 이런 평가가 억울하겠지. 그럼 허튼 소리 안 나오게 하시면 된다. 외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쓰니, 한사오궁과 그의 작품 <일야서>에게 좀 미안하다. 서두가 너무 길고 거칠어 여차하면 내가 작품 자체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이 책, 재미있다. 그렇다고 명작이나 걸작이라 상찬할 만큼은 아니니 오버하지는 않겠다.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은 아니더라도, 현대사에선 상당히 어려웠던 시절, 문화혁명 시기에 도시를 떠나 시골 깡촌으로 내려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지내야 했던 지식인 청년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제는 중국소설도 많이 소개되어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에도 익숙해 사실 이색적이거나 특징적인 것은 별로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 눈으로 보기엔 더럽고,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중국의 농촌 풍경은 불과 30년 전의 우리나라 농촌 모습보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까지 학생 신분으로 도시에서 삽 한 번 잡아본 적 없이 지내던 고운 손의 지식청년들 가운데 많은 수는 강제로, 적은 수는 분위기에 휩쓸려 자진해 가장 외진 시골로 내려가 갖은 고생을 하는 이야기. 여기까지는 그렇다. 충분히 읽어봤다. 중류계급 이상에서 살던 학생출신이 야생동물이 출몰하고, 60년대에 3년간 지속한 흉작으로 배를 곯아 사람의 해골을 씹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식권 서른 장을 걸고, 모기와 빈대, 벼룩, 이가 득시글거리며, 뭔가 메스꺼워 한 번 왈칵 토했더니 선충, 쉬운 말로 해서 회충 여러 마리가 뒤엉킨 것이 쑥 튀어나오고, 쥐와 고양이를 잡아먹어야 했던 참경 말이다.
 내가 읽은 이 책의 매력은 이런 개고생하는 장면이 아니다. 그곳에 갔던 지식청년, 이들을 ‘지청’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지청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와 누구는 복학을 하고, 누구는 새로 입학을 하고, 누구는 공기업에 취직을 하고, 누구는 사업을 하고, 누구는 깡패가 되고, 누구는 정치범이 되고, 정치범과 결혼했던 여자는 아이를 고모 부부에게 맡기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고, 등등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당시에 하방당해 시골로 내려가 수년 동안 젊은 시절을 보낸 잃어버린 세대라고 역자 심규호는 해설에서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 로스트 제너레이션들의 다양한 실패의 삶이 나를 매혹시켰다. 한사오궁은 여기에다가 하방 또는 하향해 내려간 농촌 ‘바이마후 호’에서 작업반장 또는 생산대장 등의 뒷이야기까지 포함시키기도 하는 바에야. 사람의 해골까지 씹어 먹는 가난한 깡촌 바이마후, 어째 한국말 발음으로, 가장 비싼 벤츠, ‘마이바흐’와 비슷한 것도 재미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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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31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모던클래식 시리즈 없애고 거기 있던 작품들 다 세계문학에 넣은 게 저도 보기 안 좋더라구요. 한사오궁이라는 작가에 급 관심이 생겨 폴스타프님 옛날 글까지 찾아왔네요.

Falstaff 2024-10-31 15:42   좋아요 0 | URL
이 책 괜찮습니다. 다만 같은 시기를 선택해 하도 많은 중국의 괜찮은 작가들이 작품을 써서 이제 신선도는 좀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저도 이 책 읽은 지 좀 되거든요.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풍아송風雅頌>이란 아름다운 제목 딱 하나만 보고 읽었다가 똥 밟은 책의 저자 옌롄커. 다시는 옌롄커가 쓴 책을 읽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었는데, 문학 전반에 걸쳐 현대 중국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옌롄커, 이미 쓰레기통에 버린 작가의 이름이 꼭 한 두 번은 나오더라는 말씀.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는구먼. 놀랠 '노'자여!) 그래 한 권을 더 읽어보고 결론을 내리려 마음을 바꿨고, 이 작자가 일 년에 장편 한 권씩은 써 낼만큼 다작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지 조금 헤매고 있을 때, 이 책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무지하게 야하다”는 평을 읽고,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게다가 헌책방에서 싼 값에 팔고 있기도 했으니 더 말 해 무엇 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약 250쪽의 길지 않은 장편인데,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소설이 한 권 있었으니,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명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아, 고정하시라. 그 책이 생각났다는 것이지 감히 채털리 여사, 뚝심 있는 여성이 삶의 질곡을 걷어 차버리고 혼자 우뚝 서는 결단에까지 감히 비비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왜 로렌스가 생각이 났느냐 하면, 이 책에서는 비록 현역이지만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와중에서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 많은 남편과 사는 젊은 아내가 서방질하는 장면을 책의 핵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 ‘우다왕’은 시골 출신의 사병으로, 장인과 아내의 평생소원인 도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입대해 만 5년을 충직하게 복무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민출신 군인들 역시 거의 모두 충실하게 복무하는 바람에 간부로 진급하지 못하고, 따라서 처자식을 도시로 옮겨주지도 못한 채 빌빌대던 중, 운이 따랐는지 사단장의 관사 당번병으로 들어가, 중국 군대의 당번병도 80년대 초반 한국 군대의 당번병과 마찬가지로 사단장(뿐만 아니라 작은 독립부대장까지) 가족의 삼시 세끼와 (심지어 사모님의 똥인지 뭔지 하여간 뭔가가 묻은 빤쓰를 포함해 무진장한)빨래와, 집안 청소와, 하이고 애새끼들 가정교사까지 몽땅 해야 했나보다. 설마? 하, 내가 거짓말을 할까. 80년대 초에 군역을 치룬 남자들 아무한테나 물어봐라. 내 말이 구란지 아닌지. 다행히 이 책의 사단장은 생식불능으로 아이들은 없었으니 고생은 좀 덜 했을 거다. 대신 사단장 사모님은 늙은 남편이 이미 ‘기쁨을 아는 몸’에 제공해줄 수 없는 기쁨까지 요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쉬운 얘기로 불륜인데, 그게 앞 문단에서 말했듯 서로 ‘기쁨을 아는 몸’(2015년 여름부터 '기쁨을 아는 몸'을 이렇게 거의 일반명사 비슷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경숙아, 고맙다!)을 위로해줄 잠깐씩의 엔조이라면 문제는 덜하겠지만, 어디 몸이란 게 그런가, 불행하게도 우다왕과 사단장 사모님 류렌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단장이 전국에 고위 군인들 모이는 회의인지 뭔지에 3개월 예정으로 출장을 떠나는 동안 사건은 벌어진다. 작년에 알베르 꼬엔이 쓴 소설 <주군의 여인> 독후감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해버리는 주인공 남녀. 이들이 3개월이란 한정된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과 사랑의 확인으로서의 몸의 유희. 그리하여 둘은 점점 더 자극적인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날이 갈수록 충격적인 모멘트를 만들려 애를 쓰고, 더 지독한 애무의 기법에 탐닉하다가 까무러치기도 하고, 마오저뚱의 석고상을 깨뜨려버리고, 성서보다 세 배는 더 엄정한 마오 선집을 찢어버리기도 하는 등의 일탈을 저질러버린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내가 아무리 야한 이야기를 좋아하더라도, 이게 장황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인종이다. 곧바로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위에서 비비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과 극적인 갈림길에서 안타깝게도 저편으로 가버리고 마는 건, 과도한 분량을 ‘사랑이라는 감옥 속에서의 탐닉’에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확실하게 느꼈다. 얼마 만큼이냐 하면, 오직 둘 뿐인 절망스러운 사랑의 감옥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직 절정에도 오지 않았는데, 아이 씨, 그만 읽기를 때려치울까, 싶었을 정도로. 이렇게 낮이나 밤이나 해대는데, 굳은 살 안 박였을까? 별 걱정이 다 들더라.
 그래, 그래. 13쪽에서 제1장을 시작해 251쪽에서 에필로그를 끝날 때까지 작지 않은 활자로 널럴하게 편집한 짧은 장편임에도 우다왕과 류렌이 서로 엮이고, 만나고, 함께 침상에 오르고, 불타는 몸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20쪽부터 191쪽까지 할애했으니, 내가 책을 읽으며 지루해 했던 것이 잘못이냐? 물론 주인공들이 침상에서 기쁨을 찾으며 양념으로 당대 중국의 농민, 소시민, 중간층, 고위층 등 각 계급들의 희망사항과 상위 편입 욕망, 연줄 넣기 같은 중국문화에 대해서도 거론을 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이라고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우다왕도,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렌도, ‘놀랄만한 선물’(이게 뭔지 밝힐 수 없다)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받게 된 사단장도, 행위의 결과물이나, 행위라는 전환기를 거쳐 새로 변모한 모습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한 번 찌질이는 영원히 찌질이고, 한 번 바람난 여자는 잠깐의 바람기였을 뿐, 저 남쪽 종교의 경전에서처럼 코뿔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바라지도 못함. 여기서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채털리 여사와 비빌 수 없는 차이가 생기며, 옌롄커도 로렌스에 감히 비빌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는 것.
 이 책은 오직 하나, 사랑 혹은 몸의 즐거움이라는 감옥을 구경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이 몸의 감옥, 또는 사랑의 감옥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라, 왜 스스로를 유폐해야 했는지, 그리하여 유폐를 통해 어떤 전망이 생겼는지가 책의 초점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이리 주장을 한 번 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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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1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란 제목이 이중적인 의미인 듯 싶어요~진짜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연인>이 생각나네요 ㅎㅎ팔스타프님께서 나보코프 리뷰 쓰긴 힘들다고 하셨죠? ㅎㅎ

Falstaff 2019-01-18 10:31   좋아요 1 | URL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이더군요. 그런데 하여간 옌롄커는 안 읽으려 작정을... --;;
옙. 나보코프 읽고 독후감 쓰는 건 정말 고역이예요. 대부분 책을 읽고 PC 화면을 앞에다 두면 그저 막막하더라고요. 저야 뭐 그냥 아마추어니까 그렇지만, 카알벨루치 님의 평은 근사하던 걸요. ^^

카알벨루치 2019-01-18 10:33   좋아요 1 | URL
저도 허접한 아마츄어인데 이런 칭찬하시면 아니아니되옵니다 감사해요~팔스타프님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