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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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2013년에 캐나다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앞에 읽은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별로 동감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책을 사기까지 나날이 많이 흘렀다. 앞의 두 권을 읽은 감상이 어떻더라,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하지도 못한 고민에 싸인다.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포크너는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지역 제퍼슨 시를 작품의 중요한 무대로 점찍고, 김원일은 초기엔 경남 진해 옆,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대구로 지역구를 옮긴다. 앨리스 먼로도 사투리를 쓰는 캐나다의 시골을 무대로 하는데 이 책에선 이 가상의 시골 이름이 핸래티라고 했다. 그냥 핸래티는 시골부자들,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의사, 치과의사, 변호사부터 주물공장 노동자, 일반 공장 노동자, 짐마차 꾼 등이 살며, 작은 강 건너에 있는 웨스트 핸래티는 일반 공장 노동자, 주물공장 노동자부터 비정규 밀주업자의 대가족, 창녀, 아직 잡혀가지 않은 도둑들이 일가를 이룬다고 하고, 주인공 로즈의 사인4人가족은 웨스트 핸리티에 있다. 아버지가 매운 솜씨로 거의 모든 것을 고쳐주고 저렴하게 청구하는 수리비로 먹고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로즈와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난. 부자들이 눈으로 볼 때는 돼지우리 같은, 구멍가게가 딸린 집에 살고 있다.
  책은 거지 소녀, 19세기 영국 화가 번 존스의 그림에 나오는 반투명한 얇은 옷을 입은 가난한 소녀로 아프리카의 코페투아 왕이 그녀를 얻기 위해 왕관마저 던져버릴 수 있는 매력의 소녀를 일컫는데, 이 거지 아가씨beggar maid는 장학금을 받아 진학한 대학에서, 말로는 아버지가 상점 몇 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백화점 체인 소유주의 외아들 패트릭 블래치퍼드가 책의 주인공 로즈를 꼬드기기 위해 한 말이다. 돼지우리는 로즈가 자격지심에 패트릭한테 한 대꾸고.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까 왜 이 책이 참 가슴에 와 닿는지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거지 소녀》는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 없이 계모와 엄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로즈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혼하고, 다시 사랑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고, 이별하는,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다. 같은 구성원이 열 편의 단편소설 또는 부部에 공동의 체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전형적인 연작장편 소설 형식인데, 단편 전문 작가인 엘리스 먼로가 장편(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 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책이라고 하고, 내가 앞에 읽은 작가의 다른 단편집에 비하여 훨씬 공감하면서 읽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첫 번째 작품에서 얻어맞은 펀치가 워낙 세서 감정의 파동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첫 작품의 우리말 제목을 <장엄한 매질>이라 달아놓았다. 원어 제목으로는 “Royal Beating.”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고, 아직 로즈의 의붓어머니인줄 모르는 플로가 주인공 로즈에게 하는 말이다. “장엄한 매질을 한 번 당하게 될 거다.” 누구한테? 평소엔 별로 말이 없지만 한 번 열을 받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아버지한테. 로즈는 의붓어머니 플로를 가리켜 절대로 “어머니”나 “의붓어머니”, “계모” 등으로 호칭하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른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계모, 계모와 불화하는 딸의 트라이앵글에 관한 무수한 공포물 시리즈가 너무도 확고하게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독자는 이들 사이의 비극과 돌이킬 수 없는 경원을 생각할지 모른다. 플로도 그렇겠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브라이언보다 로즈에게 더 애정이 가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독자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더함도 뺌도 없이 앨리슨 먼로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까.
  내가 여간해서 외국어로 쓰인 단편소설을 번역한 책을 읽고 감동하지 않는 것은, 장편과 달리 문장 하나하나가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잘 세공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선입관 때문이며, 그런 감동은 번역문을 통해서 얻기가 힘들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에스컬레이팅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번역시는 전혀 읽지 않고, 단편소설은 아주 조심해 선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거지 소녀》에서, 먼로가 툭툭 던지는 무심한 듯한 문장들이 한 소녀, 청소년, 청년, 혼인적령기의 여인, 권태기의 주부,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이혼녀, 옛 사랑의 사연을 전해 듣는 폐경기 중년까지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로즈의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의 한 생애를 담담하게 공감하면서 담채화를 구경하듯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1931년생이면 현대 여성이니 당연히 여성주의적 발언도 도처에 깔려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웅변하는 것도 아니면서 독자로 하여금 만일 여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처음 두 편의 작품에서는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이 등장한다. <장엄한 매질>에서는 베키 타이드라는 이름의 머리가 크고 목소리가 요란한 난쟁이. 베키의 아버지 타이드 씨는 웨스트 핸리티에서 가장 큰 푸줏간을 운영하는 돈 많은 푸주한으로 자기 딸, 아들을 폭행할 뿐만 아니라 난쟁이 딸을 성폭행해 임신시켰다는 터무니없이 악의적인 풍문이 돌아 세 명의 악당에게 집 앞 정원에서 린치를 당해 토론토까지 열차를 타고 가 객사를 해버린다.
  두 번째 작품 <특권>에선 프래니 맥길이란 아가씨가 등장한다. 아기였을 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아기를 손에 들고 벽에 뭉개버렸다는 얘기도 있고, 술에 취해 경마차에서 떨어졌는데 이때 말이 뒷발로 차버려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뭉개졌으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뭉개진 게 얼굴이라, 코가 삐뚤어져 숨소리가 길고 음울한 훌쩍거림처럼 들리고 이가 심하게 몰려있어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 학교에서 아무도 프래니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 아이를 배고, 어디로 옮겨지고, 다시 돌아와 또 아이를 배고, 또 어디론가 보내지고, 또 돌아와서 아이를 배고, 또 옮겨지는 생활을 반복해, 동네 라이온스 클럽의 비용으로 불임수술을 해주자는 의논이 오갈 즈음 돌연 폐렴에 걸려 한 많은 생을 접는 여자다. 마지막 작품 <넌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정신박약 남자가 한 명 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두 작품 속 에피소드로 나오는 여성들만큼 임팩트가 강하지는 않다.
  이렇듯 열 개의 단편소설 또는 부chapter가 각기 한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또는 두 개와 당시를 대표하는 갈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게 그려놓아 한 여자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당연히 작품 속에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작가의 이야기라고는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어디까지나 작가는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거의 유일한 직업인이며 앨리스 먼로는 이 책 말고도 캐나다 시골 여자의 비슷한 한 생애를 그린 적이 있으니 말이다.
  단편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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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5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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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오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대하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다. 이런 책을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명작’이란 호칭을 부여하고는 한다.
  그러나 독후감을 쓰기는 쉽지 않을 터. 서술이 방대하고 소설 안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각기 긴밀하게 연결, 변화하여 선으로든지 악으로든지 특별한 행위로 전위, 확장되기 때문에 책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하기는 뭐, 어떤 책이든지 독자는 정확하게 읽을 수도 없고 그렇게 읽을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
  책의 주인공 ‘아벨 티포주’는 보베 시에 있는 생크리스토프 중학교에서 가장 왜소한 체격과 비사교적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제일 약한 아이들마저 지배하고 모욕할 수 있는 놀림감 신세의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약 20년이 지난 지금, 1938년부터 39년에는 당시 기준으로 무척 큰 키인 191cm에 110kg의 건장한 체격과 엄청난 힘을 가진, 파리 포르트데테른 광장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의 사장이다. 그러나 거의 서진書鎭만큼 두꺼운 안경을 써야 사물의 식별이 가능한 급성 근시와, 성기왜소증을 피할 수 없는 팔자이기도 하다.
  티포주가 스무 살 때, 키는 지금과 같은 191cm이었지만 몸무게는 68kg밖에 나가지 않아 지독한 근시와 더불어 징집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군의관들이 오래 토의한 끝에 결국 사격을 할 필요가 없는 통신대로 배치를 시킨 적이 있을 정도였다. 군복무 후에 갑자기 엄청난 식욕을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 2kg의 날고기와 5 리터의 우유를 들이키기 시작해 지금의 덩치와 완력과 근육을 갖게 되었는데, 자신이 고기, 신선한 피와 살을 좋아하는 식인귀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됐을까?
  첫 번째 장 “아벨 티포주의 불길한 기록”은 1938년 초부터 39년 9월 3일까지 티포주가 왼 손으로 쓴 일기로, 위에서 말한 현재 시점과 20년 전 보베의 생크리스토프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교차하여 묘사하고 있다. 남자 기숙 중학교. 16세까지 다니고 이후 대입자격시험의 합격률을 올리기 위해 시험에 떨어질 것이 뻔한 학생들은 시험 전에 퇴학시키는 걸로 악명이 높은 이 학교 학창 시절의 아벨. 여성들은 모를 것 같다. 소년들만 모인 기숙학교라는 정글, 그것도 도망할 곳이 없는 폐쇄공간으로 이루어진 야만의 큐빅 공간.
  이 학교에 파리에서 전학생이 온다. 펠스네르. 튼튼한 체력과 우직한 성격을 가져, 학급의 특별한 서열로 단번에 올라간 건 당연하다. 당시에 문신이 유행했단다. 그래 아벨이 펠스네르에게 제의하기를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살에 “이 생명을 당신에게 A toi pour la vie"라고 새겨주겠다고 해놓고 ”A T pour la vie"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명을 A T에게” A T는 당연히 ‘아벨 티포주.’ 이후 아벨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 도중에 페스네르가 무릎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리는 상태가 됐고, 페스네르는 티포주를 지목해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라고 명령을 해 진흙이 묻은 종아리부터 혀를 내밀다가 결국 벌어진 발간 속살에서 흐르는 피를 핥기 위해 입술을 상처부위에 밀착시켰고, 조금 후 기절해버리고 만다. 왜 기절했을까. 아벨 자신도 몰랐다. 책을 500페이지 가까이 읽어야 아벨 티포주가 까무러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책에서 벌이지는 많은 사건들이 특유의 연관성과 확장과 변위를 거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벨 티포주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역시 같은 학교 동급생으로 학교 수위의 외동아들. 괴물 같고, 천재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에 비만증에 걸린 엄청난 뚱보로 거의 무제한 적 완력과 힘을 가진 인물인 네스토르.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네스토르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이의제기를 하기가 쉽지 않은 압도하는 분위기. 네스토르가 아벨 티포주에게 접근해 ‘나의 아벨’이란 뜻인 ‘마벨’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하면서 학교 내 아벨의 위상은 높아지고 아무도 아벨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네스토르의 진가는 기호와 기호해석에 있다. 나중에야 기호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절대적 독재 권력자의 중대 관심사인 것을 아벨이 알게 되기는 하지만. 네스토르로 인하여 아벨은 왼손 손 글씨를 익히게 되고 문제의 “불길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된다. 아벨의 거대한 덩치와 완력과 급성근시와 성기왜소증도 네스토르로부터 전위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당연히 네스토르와의 연결끈도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라는 성인은 강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이이 앞에 예수라는 어린이가 나타나 자신이 예수이며 무동을 태우고 강을 건너달라고 했단다. 그래 크리스토프는 예수라고 주장하는 어린이를 어깨에 올리고 강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는데 어린이의 무게가 갈수록 마치 태산을 짊어진 것 같았다고 한다. 죽을힘을 다해 강은 건네주니 예수가 하는 말이 지팡이를 땅에 꽂아 내일 꽃이 피면 내가 예수임을 알 것이다, 했고, 다음날 정말 땅에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꽃이 피어 있어 어제의 어린아이가 예수임을 알았다는 성인聖人 우화.
  아벨 티포주는 생긴 것이야 누백 년 동안 이탄층의 옷을 입고 이탄층에서 살며 아이를 망토에 숨겨 유괴하는 마왕의 모습일지언정, 약한 아이를 품에 안아 보살피면서 황홀감을 맛보는 종류의 인간이다. 물론 성격이 좀 이상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리하여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나 누명을 뒤집어써서 중죄재판소에서 넘겨져 20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을 틀림없이 받을 찰라, 2차 세계대전을 앞둔 프랑스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1차 소집 대상인 아벨 티포주는 형벌 대신 입대하게 된다.
  이어서 소설은 본격적인 무대로 옮아가니 1939년부터 종전까지. 프랑스 군에 입대해 곧바로 포로가 되어 독일 북부, 예전의 동프로이센 지역의 수용소에 수감, 자연스럽게 독일과 독일군에 흡수되어 포로 신분으로 로민텐하이데 자연보호구역에서 일하다가 이후 열 살 이상의 소년병을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거대한 말을 타고 주변지역의 아이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기까지 실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애초부터 제대로 스토리를 소개하기가 어려운 복잡다단한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으며, 이야기의 큰 줄거리보다는 세부적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 훨씬 더 놀라운 작품이다.
  책의 광고문구에 “<양철북>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쟁소설”이라고 씌어있어 틀림없이 과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광고문구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쓴 2차 세계대전 소설 가운데 이만한 작품을 읽어본 적이 별로 없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분명 명작. 거기다가 재미도 있다. 이 독후감을 보신 분들은 다음번에 읽을 책 목록에 올려보심이 어떤지 제안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가 돈 도로 돌려드린다. 물론 농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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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토이숍
안젤라 카터 지음, 이영아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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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읽은 앤젤라 Y. 카터. 이름을 다 풀어서 쓰면, 앤젤라 ‘엽기’ 카터. <피로 물든 방>에서 푸른 수염의 성castle을 봤었는데, 또다시 <매직 토이숍>에서 등장한 필립 플라워 씨라는 이름의 푸른 수염은 “필립 플라워의 진기한 장난감”이라는 간판을 단 장난감 가게 건물, 1층은 완전히 수공업에 의지하여 플라워 씨가 만든 고전적이고 비싼 장난감을 파는 상점이고, 2층과 3층은 플라워 가족과 처가 식구인 아일랜드 사람들인 자울 형제, 그리고 나중에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누이의 남매들이 묵을, 이른바 도시 중산층용 주택의, 거대한 몸집과 완력의 주인이다.
  이 책을 예전에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멜라니>라는 제목으로 판매했다. 그러니 먼저 주인공 멜러니를 소개하기로 하자. 우리나라로 치면 중3, 열다섯 살이 되자 멜러니는 자신의 몸이 피와 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해한다. 가끔 옷을 모두 벗고 자기 방에 달린 전신거울에 몇 시간 씩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데이지 꽃을 꽂아보기도 하고, 조금씩 변하고 있는 몸을 더듬어보기도 하면서, 쥴리엣은 열네 살에 로미오와 격정적인 사랑을 했거늘 어찌 나는 열다섯이 되도록 비슷한 연애 경험이 없을까 한숨을 쉬는 본격적 사춘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혼인과 성에 관한 농밀한 관심과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 해 여름에는 유명작가인 아빠가 엄마와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강연을 하느라 집에는 뚱뚱하고 늙고 못생겼으며 결혼해본 적이 없지만 처녀는 아닌 넉넉한 마음씨의 가정부 런들 부인과 범선 모형 제작에 인생을 건 것처럼 보이는 동생 조너선, 이제 유아 단계를 간신히 벗어난 빅토리아, 그리고 맏이 멜러니, 이렇게 네 명만 머물고 있는 중이다. 집에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 간덩이가 조금씩 부을 수밖에. 결혼. 이것에 관한 호기심이 돋은 멜러니는 자연스럽게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떠올리게 되고, 엄마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가 생각나서 어느 날 밤 부모 방에 들어가 침대를 내려다보며 부부생활을 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으나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장롱 속 선반에서 엄마의 옷상자에 든 화관과 드레스를 기어이 꺼내 입어본다. 참 이상도 하지. 사람들은 왜 오직 처녀성을 잃어버리기 위해서일 뿐인데 이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일까.
  터무니없이 거추장스러운 화관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처음엔 그저 나쁘지 않았다가 차츰 드레스 속의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허파에 바람이 들어버린 멜러니는 드레스를 입은 채 정원에 나가고 싶어진다. 늦은 여름밤, 엄마의 고급 공단 드레스를 입은 모습의 멜러니. 그러나 자동 현관문은 멜러니 뒤에서 저절로 철커덕, 잠겨버린 것을 잊고 때마침 환하게 땅을 비추고 있는 둥근 달, 조용한 새소리, 고요한 공기, 향기 나는 꽃의 숨결에 취한 듯 맴을 돌다가, 갑자기, 풀더미 속에서 런들 부인이 키우는 고양이가 부스럭거리며 도망가는 검은 형체와 소리에 화들짝 놀랐고, 이것을 시작으로 등을 따라, 팔뚝을 따라 자잘한 소름이 쪽 끼쳤으며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고 만다.
  이제야 현관문이 잠긴 것을 안 멜러니는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모르고 잠에 떨어진 런들 부인을 깨우기 위해 돌을 던져 부인 방의 창문을 깨버리든지, 아니면 어렸을 때 몇 번 해봤듯이 사과나무를 타고 열어놓은 이층 자기 방 창문으로 들어가는 방법만 있을 뿐이었다. 생각을 해보자. 맨발은 벌써 자갈을 깔아놓은 마당의 뾰족한 돌에 찔려 피가 나기 시작하는데, 말이 공단이지 이게 고급 비단을 뜻하는 건데 눈처럼 흰 비단 드레스를 입은 채 거친 가지도 많고 풋사과까지 많이 달린 나무를 타고 이층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말이 되나? 거기다가 도망갔던 고양이까지 다시 나타나 자기 몸을 문지르다가 날선 손톱으로 드레스를 건드리는 바람에 죽 찢어지기까지 한 것을 입고. 그래도 워낙 밤의 공포에 질린 멜러니는 기어이 나무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다 도저히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뭇가지 위에서 옷과 화관을 벗어 창문을 향해 던져버렸는데, 드레스는 제대로 들어갔으나 긴 꼬리가 달린 화관은 사과나무 꼭대기로 휘익 날아가 길게 걸쳐지고 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옷의 중요한 용도 가운데 하나는 몸을 보호하는 것인데 이제 나신이 된 상태에서 나무를 타려니 온몸이 까지고 찔리고 긁혀 엉망진창이 된 채 겨우 방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드레스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고(처녀성을 잃기 위해서 흰 드레스를 입는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더렵혀지고 찢어진 상태. 가뜩이나 머릿속이 황황한 찰나에 때맞추어 엄마 아빠가 있는 미국에서 전보가 한 장 도착한다. 무슨 전보일까. 멜러니는 전보의 내용도 모른 채, 전보를 통째로 이로 물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야. 내가 엄마 드레스를 입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엄마 드레스를 망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화장실에 가서 배 속의 것들을 다 게워내고 여전히 전보를 이 사이에 문 채 자기 방에 걸려 있는 전신거울을 산산이 부셔버린다. 눈에 띄는 거의 모든 것, 자기 힘으로 가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던져버리고 망가뜨려버린 멜러니는 이어서 부모 침실로 가서 먼저 결혼식 사진이 든 액자를 깨고 혼인사진을 짝짝 찢어발긴 후 역시 난장판을 만들어버린다.
  저녁 식사 시간에 이르러서야 런들 부인이 시간이 지나서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멜러니를 찾아 이층으로 올라, 난장판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직도 이로 물고 있는 전보를 가지고 내려와 벽난로에 기대 돋보기를 찾아 귀에 걸고 읽어보고는, 남동생 조너선에게 누나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의사를 불러오라고 시킨 다음 고기 한 조각을 천천히 씹어 삼킨 후, 자신의 고양이에게 말한다. 너랑 나랑 이제 새 집을 찾아야겠구나, 야옹아.
  엄마, 아빠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사막에서 관광용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시신조차 추렴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원이 사망한 사건 속의 두 명이 되고, 이제 엄마, 아빠라는 호칭 대신 어머니, 아버지라 불리게 됐으며, 순서대로 멜러니, 조너선, 빅토리아, 삼남매는 남부 런던의 쇠락한 변두리에 음산하게 자리 잡은 필립 플라워라는 이름의 외삼촌이자 푸른 수염이 사는 성의 입주자가 된다. 이렇게 멜러니의 소녀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푸른 수염의 성에서 벌어지는 앤젤라 카터 식 엽기발랄한 고딕 사건들, 붉은 머리를 한 아일랜드인 세 명과 거대한 몸집의 푸른 수염,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전형적인 잉글랜드 삼남매의 아슬아슬한 동거에 관해서는, 안 알려줌. 역시 앤절라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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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열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4
나탈리 사로트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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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라면 1950년대 누보로망의 기수로 알고 있었는데, 책의 앞날개를 보니 “이제는 그와 같은 분류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시학을 가진 세계적인 대가로 평가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책의 한국어 초판이 2002년. 사로트는 1900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1999년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러시아 출생에, 프랑스에서 살면서 파리 문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옥스퍼드에서 수학한데다가 1921~22년엔 베를린에서 역사와 사회학을 수강하며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학사 자격증을 획득했단다. 이 정도면 언어에 수재가 있다고 봐야 하겠다. 어떤 이유로 사로트를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는지 벌써 잊었다. 이번에 사로트를 두 권 장만해서 1963년에 출간한 <황금열매>를 먼저 읽고 며칠 후에 83년, 작가의 나이 여든세 살에 출간한 <어린 시절>을 읽을 예정이다.
  먼저 <황금열매>를 읽었다. 1963년 작품이면 이이가 누보로망의 간판을 달고 활동할 때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듯하다. 당연히 책은 읽기 쉽지 않다. 나도 첫 페이지를 열고 읽어나가긴 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근 50쪽까지 진도를 빼며, 읽어나가다 보면 저절로 스토리를 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천만의 말씀.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이하동문일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들었다. 이럴 때 해결방법의 하나, 최후의 방법이기도 하고. 조금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책의 제일 뒤편, 해설을 조금 읽어보는 것이다. 그래 역자해설 세 페이지를 읽고 다시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두 번째로 읽었더니, 거봐라, 쪽팔린 건 순간이고 재미있는 건 적어도 며칠은 간다.
  첫 장면에 <세상의 기원>으로 유명한 화가 쿠르베의 전시회를 나서는 커플이 등장한다. (<세상의 기원>은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는 나오지만 구글 이미지에선 19금 처리해서 보기 힘들다. 세상에 야만스런 구글 같으니라고. 교양과목을 말이지.) 누군가가 쿠르베의 복제화가 그려진 그림엽서를 건네자 남자는 엽서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에게 건넨다. 엽서를 준 인물은 당연히 기분이 나빠 남자를 째려보고, 민망해진 여자는 남자의 에티켓 없는 태도에 불만을 표시한다. 알고 보니 남자는 며칠 전 관객이 뜸한 평일을 골라 쿠르베 전에 다녀왔단다. 이때 하필이면 신문에 미술평론을 쓰는 ‘뒤뤼’라는 작자와 마주쳤는데 입에 침을 튀며 “대단한 전시회예요. 모두 걸작이더군요. 특히 <개의 두상>이 끝내줬어요.”라고 허풍을 떨었단다. 그러면서 평론가들의 몇 가지 모습, 형편없는 졸작을 끝없이 치켜세우는 벨록, 콩과 팥을 구별 봇하고 언제나 터무니없는 평론을 써 갈겨대는 마자유 등을 거론하며 이런 짓은 영화, 연극, 소설, 연주회, 전시회가 다 마찬가지라고 23쪽까지 떠들어댄다.
  그럼 <황금열매>라는 그림이 나오느냐고? 아니다. 브레이에라는 사람이 쓴 <황금열매>라는 길지 않은 소설이 진짜 주인공, 主人公? 사람이 아니니까 주물공主物公 혹은 주작품공主作品公 정도 되겠구나. 작품은 ‘황금열매’라는 소설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한 사이클을 그린다.
  처음에는 “그런데 저.... 황금열매 읽어보셨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가 만나는 사람마다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지식인들의 필수 대화소재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간혹 극소수 조심스레 “황금열매가, 글쎄요, 난 별로인데요. 온통 그 얘기뿐이기는 하지만 말이지요.”라고 솔직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훌륭하다. 우리 문학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탕달 이후로, 뱅자맹 콩스탕 이후에 쓰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브륄레가 신문에 기고한 이후에 감히 ‘황금열매’에 대해 저항하는 분위기는 단번에 분쇄되어 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르그리 박사가 ‘황금열매’의 구성에 약간의 결함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박사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발현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건 “언어가 고전적인 것 같지 않고, 복잡하고 바로크적이고 무겁고 때로는 어색하기까지 하며 기본적으로 어려운 책이지만, 현대성 때문에 작품은 마음에 든다.”는 수준에서 멈춘다.
  책 ‘황금열매’를 처음에 사람들이 규정하기를, 속된 말들에 실려 가는 모든 것들, 예컨대 ① 물컹한 것, 흐리멍덩한 것, 줄줄 흐르는 것, 끈적이는 것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② 요란한 웃음, 이글거리는 눈초리, 흥분된 몸짓, 땀에 젖은 손 같은 것 없이, 품격 있는 조심성, 더없이 우아한 정중함, 수줍음, 당당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다는 거였다.
  이러던 것이 조금 더 시간이 가면 오랜 친구들끼리 비밀리에 속삭이기 시작하기를,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사람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황금열매’가 과즙이 풍부한 과육을 기대하는데 씹기만 하면 이를 부러뜨리는 금속 열매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들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들의 눈과 미소에는 호의, 공모성, 친밀감, 감탄이 동반되는 건 당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열매’가 아주 멋진 책이라는 판결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가 감히 큰 소리로 말을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옆에 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근데 이거 모조품 같은데요, 그렇죠?”라고 의문을 표시하기에 이른다.
  정말 브레이에가 누구를 차용해서 ‘황금열매’를 썼을까, 아니면 작가가 창조해낸 작품을 평론가와 독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헤쳐보고 해부하고 심지어 발기발기 찢어 뒤져본 후에 이 부분은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야, 여긴 토마스 만인데? 근데 브레이에가 독일어는 할 줄 알아? 프랑스어 판이 나왔잖아, 아냐, 조이스를 참고한 것이 분명해. 등등의 숱한 뒷이야기들. 그 후에 이 책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까지는 독후감에서 얘기해주지 못하겠다. 괜찮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내시라. 근데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으니 각오는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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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서버 - 윈십 부부의 결별 외 35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9
제임스 서버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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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흥미롭게 읽고 제임스 서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책의 앞날개를 보면 마크 트웨인을 잇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유머작가라고 소개한다. 짧은 소개 글을 봐도 이이의 인생 자체가 유머....라기보다는 우화 같다. 세 형제 가운데 둘째였는데 일곱 살 때 형제들과 빌헬름 텔 놀이,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활 쏘는 장난을 하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그 자리에서 실명을 한다. 이 일을 기점으로 서버는 우울한 소년기를 맞이하게 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그림을 끼적인 것이 나중에 괜찮은 삽화가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리하여 이 단편집 《제임스 서버》에 실린 서른여섯 편의 작품엔 소설책에서는 드물게도 작가 자신이 그린 삽화가 꽤 많이 들어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근데 위의 문단에서 서버를 가리켜 ‘유머작가’라고도 하고 ‘우울한 소년기’라고도 했다. 서버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나중에 뉴욕에서 산 모양이다. 이 단편집의 무대 역시 콜럼버스와 뉴욕이 대부분. 거의 모든 작품이 조금 특별한 인물을 관찰한 기록이다. 특별? 그게 아니면 적어도 기이한 사람들. 주인공이거나 화자 ‘나’가 관찰한 등장인물은 대부분 뭔가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기이함, 책을 읽는 독자와의 다름을 서버는 유머로 치환시켜 놓지 않았나 싶다.
  첫 작품 <에마 인치, 떠나다>는 메사추세스 케이프코드 연안의 고급한 휴양 섬 마서스비니어드로 휴가를 떠나는 부부가 그곳에 있을 동안 요리사로 에마 인치 여사를 고용을 하고, 고용계약을 해지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면 호리호리한 몸매를 한, 기억에 특별히 남을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중년 여인이지만, 인치 여사가 커다란 갈색가방을 들고 열일곱 살 먹은 보스턴 불테리어 종인 늙어 죽기 직전의 개 ‘필리’를 안고 도착한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보니, 요리사는 모든 이동을 자신의 두 발을 이용한 도보를 통하지 않으면 매우 불안해하며, 언제 죽을지 모를 늙은 필리를 안거나 걸리거나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는 강박증 증세가 있는 여인이다.
  두 번째 작품 <토파즈 커프스단추 미스터리>의 주제는 놀랍게도, 고양이의 눈동자는 늦은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데 왜 사람 눈은 그렇지 않을까,에서 시작한 부부간의 일상적인 다툼이 남편으로 하여금 고양이 눈과 같은 높이를 하게하고, 즉 네 발로 엎드려 있게 만든 다음 차 전조등을 비치는 실험을 야밤에, 진짜 도로에서, 부인께서는 한 방울의 알코올도 흡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생각해보시라 자정이 넘은 시간 깜깜한 밤에 남자가 네 발로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순찰 중이던 경찰관들이 발견하자, 변명을 하기를 길 위에 토파즈로 만든 커프스단추를 떨어뜨렸다고 둘러댄다는 이야기다.
  서버가 만든 가장 유명한 우스갯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음식은 웨딩 케이크”라는 말이 있단다. 당연히 결혼을 경험한 남자들, 아니다, 여자들도 포함한 (거의)모든 결혼 경험이 있는 인류들은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겠지만 서버는 유독 힘겨운 첫 번째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유별나게 드센 여자와 소심한 남자 커플이 많다고 역시 책 앞날개에 씌어 있는 바, <토파즈 커프스단추 미스터리>가 처음 읽을 수 있는 그런 류의 작품이다.
  단편소설이라고는 하나 단편이라기보다 콩트 수준에 어울릴 분량의 작품이 많아서 더 이상 책의 내용을 밝히기는 좀 면구한 느낌이 들어 그만두겠으나, 편편이 말 그대로 유머 또는 가벼운 고소를 흘릴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가끔은 (역시 유머 코드를 그대로 포함한 채)생각지도 않게 굵직하게 각 시대의 ‘웃긴 모습’,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역적으로 웃기고 있는 장면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읽어도 좋고, 나처럼 연이어 한 권을 몽땅 읽어도 괜찮겠다. 서양, 특히 미국식 유머이기는 하지만 100년 전에 쓴 작품도 있어서 이젠 극동의 독자가 읽어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유머코드이며, 그러기 때문이겠지만 배를 잡고 웃어야 하는 장면은 없다. 이이의 삽화를 보기만 해도, 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구나, 하실 수 있을 것.
  근데, 당신이 미국인이라고 가정하고,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가 좋은가 아니면 도널드 덕이 더 좋은가? 왜 묻느냐고? 그거야 책을 읽어보시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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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1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반쯤 읽다가 말았는데, 우울한 유머 작가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웃기려고 읽었는데, 웃기기보다는 우울해져서 걍 책을 살포시 내려놓은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남은 절반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0-04-10 11:59   좋아요 0 | URL
예. 어느 하나 개운하게 웃기고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꼭 뒷맛이 떱떠름하니... ㅋㅋ

CREBBP 2020-04-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반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무슨 새 소리 강박증 생기는 얘기가 인상깊었어요.^^

Falstaff 2020-04-13 12:32   좋아요 0 | URL
기묘하게 분명 희극인데 뭔가 캥기는 게 꼭 들어 있어서 편하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의식 속의 별의 별 것들을 다 나열했더라고요. 하여간 흥미있는 작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