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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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2013년에 캐나다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앞에 읽은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별로 동감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책을 사기까지 나날이 많이 흘렀다. 앞의 두 권을 읽은 감상이 어떻더라,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하지도 못한 고민에 싸인다.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포크너는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지역 제퍼슨 시를 작품의 중요한 무대로 점찍고, 김원일은 초기엔 경남 진해 옆,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대구로 지역구를 옮긴다. 앨리스 먼로도 사투리를 쓰는 캐나다의 시골을 무대로 하는데 이 책에선 이 가상의 시골 이름이 핸래티라고 했다. 그냥 핸래티는 시골부자들,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의사, 치과의사, 변호사부터 주물공장 노동자, 일반 공장 노동자, 짐마차 꾼 등이 살며, 작은 강 건너에 있는 웨스트 핸래티는 일반 공장 노동자, 주물공장 노동자부터 비정규 밀주업자의 대가족, 창녀, 아직 잡혀가지 않은 도둑들이 일가를 이룬다고 하고, 주인공 로즈의 사인4人가족은 웨스트 핸리티에 있다. 아버지가 매운 솜씨로 거의 모든 것을 고쳐주고 저렴하게 청구하는 수리비로 먹고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로즈와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난. 부자들이 눈으로 볼 때는 돼지우리 같은, 구멍가게가 딸린 집에 살고 있다.
  책은 거지 소녀, 19세기 영국 화가 번 존스의 그림에 나오는 반투명한 얇은 옷을 입은 가난한 소녀로 아프리카의 코페투아 왕이 그녀를 얻기 위해 왕관마저 던져버릴 수 있는 매력의 소녀를 일컫는데, 이 거지 아가씨beggar maid는 장학금을 받아 진학한 대학에서, 말로는 아버지가 상점 몇 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백화점 체인 소유주의 외아들 패트릭 블래치퍼드가 책의 주인공 로즈를 꼬드기기 위해 한 말이다. 돼지우리는 로즈가 자격지심에 패트릭한테 한 대꾸고.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까 왜 이 책이 참 가슴에 와 닿는지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거지 소녀》는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 없이 계모와 엄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로즈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혼하고, 다시 사랑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고, 이별하는,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다. 같은 구성원이 열 편의 단편소설 또는 부部에 공동의 체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전형적인 연작장편 소설 형식인데, 단편 전문 작가인 엘리스 먼로가 장편(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 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책이라고 하고, 내가 앞에 읽은 작가의 다른 단편집에 비하여 훨씬 공감하면서 읽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첫 번째 작품에서 얻어맞은 펀치가 워낙 세서 감정의 파동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첫 작품의 우리말 제목을 <장엄한 매질>이라 달아놓았다. 원어 제목으로는 “Royal Beating.”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고, 아직 로즈의 의붓어머니인줄 모르는 플로가 주인공 로즈에게 하는 말이다. “장엄한 매질을 한 번 당하게 될 거다.” 누구한테? 평소엔 별로 말이 없지만 한 번 열을 받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아버지한테. 로즈는 의붓어머니 플로를 가리켜 절대로 “어머니”나 “의붓어머니”, “계모” 등으로 호칭하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른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계모, 계모와 불화하는 딸의 트라이앵글에 관한 무수한 공포물 시리즈가 너무도 확고하게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독자는 이들 사이의 비극과 돌이킬 수 없는 경원을 생각할지 모른다. 플로도 그렇겠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브라이언보다 로즈에게 더 애정이 가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독자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더함도 뺌도 없이 앨리슨 먼로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까.
  내가 여간해서 외국어로 쓰인 단편소설을 번역한 책을 읽고 감동하지 않는 것은, 장편과 달리 문장 하나하나가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잘 세공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선입관 때문이며, 그런 감동은 번역문을 통해서 얻기가 힘들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에스컬레이팅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번역시는 전혀 읽지 않고, 단편소설은 아주 조심해 선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거지 소녀》에서, 먼로가 툭툭 던지는 무심한 듯한 문장들이 한 소녀, 청소년, 청년, 혼인적령기의 여인, 권태기의 주부,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이혼녀, 옛 사랑의 사연을 전해 듣는 폐경기 중년까지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로즈의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의 한 생애를 담담하게 공감하면서 담채화를 구경하듯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1931년생이면 현대 여성이니 당연히 여성주의적 발언도 도처에 깔려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웅변하는 것도 아니면서 독자로 하여금 만일 여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처음 두 편의 작품에서는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이 등장한다. <장엄한 매질>에서는 베키 타이드라는 이름의 머리가 크고 목소리가 요란한 난쟁이. 베키의 아버지 타이드 씨는 웨스트 핸리티에서 가장 큰 푸줏간을 운영하는 돈 많은 푸주한으로 자기 딸, 아들을 폭행할 뿐만 아니라 난쟁이 딸을 성폭행해 임신시켰다는 터무니없이 악의적인 풍문이 돌아 세 명의 악당에게 집 앞 정원에서 린치를 당해 토론토까지 열차를 타고 가 객사를 해버린다.
  두 번째 작품 <특권>에선 프래니 맥길이란 아가씨가 등장한다. 아기였을 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아기를 손에 들고 벽에 뭉개버렸다는 얘기도 있고, 술에 취해 경마차에서 떨어졌는데 이때 말이 뒷발로 차버려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뭉개졌으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뭉개진 게 얼굴이라, 코가 삐뚤어져 숨소리가 길고 음울한 훌쩍거림처럼 들리고 이가 심하게 몰려있어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 학교에서 아무도 프래니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 아이를 배고, 어디로 옮겨지고, 다시 돌아와 또 아이를 배고, 또 어디론가 보내지고, 또 돌아와서 아이를 배고, 또 옮겨지는 생활을 반복해, 동네 라이온스 클럽의 비용으로 불임수술을 해주자는 의논이 오갈 즈음 돌연 폐렴에 걸려 한 많은 생을 접는 여자다. 마지막 작품 <넌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정신박약 남자가 한 명 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두 작품 속 에피소드로 나오는 여성들만큼 임팩트가 강하지는 않다.
  이렇듯 열 개의 단편소설 또는 부chapter가 각기 한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또는 두 개와 당시를 대표하는 갈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게 그려놓아 한 여자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당연히 작품 속에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작가의 이야기라고는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어디까지나 작가는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거의 유일한 직업인이며 앨리스 먼로는 이 책 말고도 캐나다 시골 여자의 비슷한 한 생애를 그린 적이 있으니 말이다.
  단편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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