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토이숍
안젤라 카터 지음, 이영아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세 번째 읽은 앤젤라 Y. 카터. 이름을 다 풀어서 쓰면, 앤젤라 ‘엽기’ 카터. <피로 물든 방>에서 푸른 수염의 성castle을 봤었는데, 또다시 <매직 토이숍>에서 등장한 필립 플라워 씨라는 이름의 푸른 수염은 “필립 플라워의 진기한 장난감”이라는 간판을 단 장난감 가게 건물, 1층은 완전히 수공업에 의지하여 플라워 씨가 만든 고전적이고 비싼 장난감을 파는 상점이고, 2층과 3층은 플라워 가족과 처가 식구인 아일랜드 사람들인 자울 형제, 그리고 나중에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누이의 남매들이 묵을, 이른바 도시 중산층용 주택의, 거대한 몸집과 완력의 주인이다.
  이 책을 예전에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멜라니>라는 제목으로 판매했다. 그러니 먼저 주인공 멜러니를 소개하기로 하자. 우리나라로 치면 중3, 열다섯 살이 되자 멜러니는 자신의 몸이 피와 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해한다. 가끔 옷을 모두 벗고 자기 방에 달린 전신거울에 몇 시간 씩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데이지 꽃을 꽂아보기도 하고, 조금씩 변하고 있는 몸을 더듬어보기도 하면서, 쥴리엣은 열네 살에 로미오와 격정적인 사랑을 했거늘 어찌 나는 열다섯이 되도록 비슷한 연애 경험이 없을까 한숨을 쉬는 본격적 사춘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혼인과 성에 관한 농밀한 관심과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 해 여름에는 유명작가인 아빠가 엄마와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강연을 하느라 집에는 뚱뚱하고 늙고 못생겼으며 결혼해본 적이 없지만 처녀는 아닌 넉넉한 마음씨의 가정부 런들 부인과 범선 모형 제작에 인생을 건 것처럼 보이는 동생 조너선, 이제 유아 단계를 간신히 벗어난 빅토리아, 그리고 맏이 멜러니, 이렇게 네 명만 머물고 있는 중이다. 집에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 간덩이가 조금씩 부을 수밖에. 결혼. 이것에 관한 호기심이 돋은 멜러니는 자연스럽게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떠올리게 되고, 엄마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가 생각나서 어느 날 밤 부모 방에 들어가 침대를 내려다보며 부부생활을 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으나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장롱 속 선반에서 엄마의 옷상자에 든 화관과 드레스를 기어이 꺼내 입어본다. 참 이상도 하지. 사람들은 왜 오직 처녀성을 잃어버리기 위해서일 뿐인데 이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일까.
  터무니없이 거추장스러운 화관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처음엔 그저 나쁘지 않았다가 차츰 드레스 속의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허파에 바람이 들어버린 멜러니는 드레스를 입은 채 정원에 나가고 싶어진다. 늦은 여름밤, 엄마의 고급 공단 드레스를 입은 모습의 멜러니. 그러나 자동 현관문은 멜러니 뒤에서 저절로 철커덕, 잠겨버린 것을 잊고 때마침 환하게 땅을 비추고 있는 둥근 달, 조용한 새소리, 고요한 공기, 향기 나는 꽃의 숨결에 취한 듯 맴을 돌다가, 갑자기, 풀더미 속에서 런들 부인이 키우는 고양이가 부스럭거리며 도망가는 검은 형체와 소리에 화들짝 놀랐고, 이것을 시작으로 등을 따라, 팔뚝을 따라 자잘한 소름이 쪽 끼쳤으며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고 만다.
  이제야 현관문이 잠긴 것을 안 멜러니는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모르고 잠에 떨어진 런들 부인을 깨우기 위해 돌을 던져 부인 방의 창문을 깨버리든지, 아니면 어렸을 때 몇 번 해봤듯이 사과나무를 타고 열어놓은 이층 자기 방 창문으로 들어가는 방법만 있을 뿐이었다. 생각을 해보자. 맨발은 벌써 자갈을 깔아놓은 마당의 뾰족한 돌에 찔려 피가 나기 시작하는데, 말이 공단이지 이게 고급 비단을 뜻하는 건데 눈처럼 흰 비단 드레스를 입은 채 거친 가지도 많고 풋사과까지 많이 달린 나무를 타고 이층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말이 되나? 거기다가 도망갔던 고양이까지 다시 나타나 자기 몸을 문지르다가 날선 손톱으로 드레스를 건드리는 바람에 죽 찢어지기까지 한 것을 입고. 그래도 워낙 밤의 공포에 질린 멜러니는 기어이 나무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다 도저히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뭇가지 위에서 옷과 화관을 벗어 창문을 향해 던져버렸는데, 드레스는 제대로 들어갔으나 긴 꼬리가 달린 화관은 사과나무 꼭대기로 휘익 날아가 길게 걸쳐지고 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옷의 중요한 용도 가운데 하나는 몸을 보호하는 것인데 이제 나신이 된 상태에서 나무를 타려니 온몸이 까지고 찔리고 긁혀 엉망진창이 된 채 겨우 방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드레스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고(처녀성을 잃기 위해서 흰 드레스를 입는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더렵혀지고 찢어진 상태. 가뜩이나 머릿속이 황황한 찰나에 때맞추어 엄마 아빠가 있는 미국에서 전보가 한 장 도착한다. 무슨 전보일까. 멜러니는 전보의 내용도 모른 채, 전보를 통째로 이로 물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야. 내가 엄마 드레스를 입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엄마 드레스를 망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화장실에 가서 배 속의 것들을 다 게워내고 여전히 전보를 이 사이에 문 채 자기 방에 걸려 있는 전신거울을 산산이 부셔버린다. 눈에 띄는 거의 모든 것, 자기 힘으로 가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던져버리고 망가뜨려버린 멜러니는 이어서 부모 침실로 가서 먼저 결혼식 사진이 든 액자를 깨고 혼인사진을 짝짝 찢어발긴 후 역시 난장판을 만들어버린다.
  저녁 식사 시간에 이르러서야 런들 부인이 시간이 지나서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멜러니를 찾아 이층으로 올라, 난장판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직도 이로 물고 있는 전보를 가지고 내려와 벽난로에 기대 돋보기를 찾아 귀에 걸고 읽어보고는, 남동생 조너선에게 누나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의사를 불러오라고 시킨 다음 고기 한 조각을 천천히 씹어 삼킨 후, 자신의 고양이에게 말한다. 너랑 나랑 이제 새 집을 찾아야겠구나, 야옹아.
  엄마, 아빠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사막에서 관광용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시신조차 추렴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원이 사망한 사건 속의 두 명이 되고, 이제 엄마, 아빠라는 호칭 대신 어머니, 아버지라 불리게 됐으며, 순서대로 멜러니, 조너선, 빅토리아, 삼남매는 남부 런던의 쇠락한 변두리에 음산하게 자리 잡은 필립 플라워라는 이름의 외삼촌이자 푸른 수염이 사는 성의 입주자가 된다. 이렇게 멜러니의 소녀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푸른 수염의 성에서 벌어지는 앤젤라 카터 식 엽기발랄한 고딕 사건들, 붉은 머리를 한 아일랜드인 세 명과 거대한 몸집의 푸른 수염,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전형적인 잉글랜드 삼남매의 아슬아슬한 동거에 관해서는, 안 알려줌. 역시 앤절라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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