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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1 ㅣ 창비세계문학 79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여태까지 읽은 요사의 작품을 출판 순으로 나열해보자.
1.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1978
2. <나는 훌리오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1982
3. <세상 종말 전쟁> 1984
4. <새엄마 찬양> 1990
5.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 1998
6. <염소의 축제> 2001
7. <천국은 다른 곳에> 2003
8. <나쁜 소녀의 짓궂음> 2007
1은 코믹한 정치소설이고 2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극.
3은 심각한 수준의 농민반란,
4와 5는 연작이라고 볼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미술 비평
6은 라틴 아메리카의 고질병이었던 군부독재를 다룬 정치소설
7은 명백하게 고갱을 염두에 두고 쓴 미술 천재에 관한 이야기
8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에 개인사를 겹쳐놓은 재미있는 잡탕.
그럼 이번에 읽은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는 어느 범주에 들까? 군사정부 시절, 이들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부르주아 가정을 중심으로 정치적 혼란과 가족 구성원을 둘러싼 수다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염소의 축제>와 <나쁜 소녀의 짓궂음>과 비슷한 범주에 넣어도 될까?
나는 여태 요사의 대표작으로 <세상 종말 전쟁>과 <천국은 다른 곳에>를 들어왔다. 두 작품이 워낙 다른 성격이라서 하나의 대표작을 고르는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는데, 작가는 직접 쓴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서문의 마지막에서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만약 불구덩이 속에서 내 작품 중 하나만 구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옆에 노트 한 권을 펴 놓고 손에 볼펜을 쥐고 첫 장을 넘긴다. 이해가 가고 눈에 그림이 그려지시지? 비장한 마음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 세계적 설레발 꾼이 다른 건 다 불에 타 버리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 책만은 불구덩이에서 빼내겠다지 않는가 말이지. 그런데 참고해야 할 것이 하나가 더 있으니 서문을 쓴 시점이 1998년 9월. 위 작품 리스트에서 6, 7, 8번은 세상구경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힘을 주고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짚어가며 읽어야 했으며, 그것도 (특히!) 스페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창비 특유의 표기법에 대책 없이 난타 당해가며 공개하기에 쪽팔릴 정도로 빽빽한 메모를 해 무려 여덟 페이지를 메우고 난 후에야 책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 물론 진짜로 ‘뻬루’ 사람들이 그렇게 발음하겠지만 읽기에도 곤란한 우리의 등장인물들, 주인공 싸발라 싼띠아고를 비롯해 그의 술친구 까를리또스, 애완견 바뚜깨, 주근깨가 빽빽하게 박힌 친한 친구이자 나중에 매부가 되는 뽀뻬예 아레발로 등을 꼼꼼하게 읽어나가니, 이게 웬 일? 글쎄 교정에서 놓쳐 그대로 드러난 오식, 오타, 빠진 글자 등이 눈에 확, 다른 책들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이더라는 것. 야, 창비가 다른 건 몰라도 교정, 교열에 관해서는 굉장히 신경 쓰는, 타의 모범이 되는 회사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구만 그래, 아오!
애칭 ‘싸발리따’라고 불리는 주인공 싸발라 싼띠아고는 1948년 꾸데따를 성공시켜 집권한 마누엘 아뽈리나리오 오드리아 장군 시절에 제약회사와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품위 있고, 점잖고, 아랫사람과 유색인종에게 너그럽고, 하인 하녀 운전수들에게 활수하여 그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주고 해결까지 해주는 천생 호인처럼 보이나 사실은 바로 그것들을 무기로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 하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초고단수로 교활한 인물인 페르민 씨와 쏘일라 여사 사이의 2남 1녀, 아들-아들-딸 가운데 두 번째 아이로, 어려서부터 놀랍도록 명석한 두뇌로 늘 전교 1등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 주위의 기대를 받았으나 부르주아나 고관들의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까똘리까 대학 대신 천한 유색인, 소위 촐라들이 많이 다니는 싼마르꼬스 대학을 선택하여 부모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이 싼마르꼬스 대학으로 말할 거 같으면 뻬루, 에잇, 편하게 쓰자, 페루에서 가장 급진적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툭하면 반정부 시위를 해대고, 현재 법에 의하여 불법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공산당의 세포가 침투해 있는 곳이었으니, 정경유착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 페르민 씨 입장에선 실망이 대단하긴 했겠다.
근데 그건 조금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지금의 싸발리따는 싼마르꼬스 법과를 3학년 2학기까지 끝냈나 못 끝냈나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 특정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일단 집에서 뛰쳐나와, 독신생활을 고집하는 큰아버지 끌로도미로 씨의 주선으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잘 나가는 신문사 ‘끄로니까’지(紙)에 입사해 지방소식 담당기자를 거쳐 나이 서른을 조금 넘은 현재는 당당하게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의 자리에 앉았으니 언론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한 인물이다. 그럼 뭐해. 봉급쟁이는 봉급이 얼마냐가 가장 중요한 성공의 척도임에, 페루의 언론계는 다른 산업에 비하여 박봉으로 악명이 높아서,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색인 간호사 출신의 배우자 아나와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집에서 그냥저냥 즐기며 사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근데 부부 사이에 애가 없다. 주위에서 보면 이런 경우는 대개 혼인 전에 임신을 해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중절을 하고는 그 후유증으로 생긴 불임일 확률이 높다. 이 부부 역시 혼인 전에 임신을 하고 중절 수술을 받은 건 맞는데 서로 동의 아래 딩크족으로 사는지, 아니면 역시 중절수술의 후유증인지는 딱 집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여간 그래서 파트타임으로 간호사 일을 하는 아나가 어느 날 흰 털투성이 강아지를 사양하지 못할 수준의 선물로 들고 와서 잔뜩 정을 붙이고 살던 중에 일이 벌어진다.
하필이면 당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광견병이 유행을 했다.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서울에서도 광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어 동네 넝마주이들이 날마다 개 잡아 포식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페루에서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래서 대 ‘끄로니까’ 지의 논설위원인 싸발라 싼띠아고는 일주일에 두어 번씩 광견병 예방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 제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리마 시청에서는 임시직 고용인들을 풀어 리마 시내에서 눈에 띄는 개, 물론 혼자 다니는 개들을 몽땅 잡으라는 지시를 내려 한 마리당 1쏠(당시 페루의 화폐단위. 지금 대강 보면 한 만 원 이쪽저쪽 하는 거 같다.)을 지불했다. 그랬더니 흑인과 원주민들 사이의 혼혈들을 주축으로 한 개 사냥꾼이 막무가내로 개만 봤다하면 잡아갔는데, 하루는 싼띠아고의 아내 아나가 목끈을 하고 산책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이 목끈까지 빼앗아 그 길로 바뚜께를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아나는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곧바로 집에 들어와 엉엉 울어대다가 집에 들어온 남편 싼띠아고를 앞에다 놓고 드잡이를 시작했다. 빨리 가서 개 찾아오라고. 하긴 애 없는 대신 키우는 개니 정도 들만큼 들었겠지.
부잣집 도련님 출신인 싼띠아고가 리마 어느 구석에 유기견 보호소가 있는 줄 아나. 그리하여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아내 빈촌 가운데도 빈촌인 ‘뿌엔떼 델 에헤르시또’의 개 보호소, 라기 보다 도살대기소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아들 같은 바뚜께를 구출해내는데 성공한다. (비참한 환경의 개 집합소, 귀가 먹먹하게 만드는 개 짖는 소리, 질퍽질퍽 물이 고여 있는 흙바닥과 개의 분변, 파리 떼 등을 천하의 이야기꾼 요사가 묘사해놓은 건 이 글을 읽는 분의 건전한 식사를 위해 생략하는 것을 용서해주시라.)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닥스훈트 한 마리가 유독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고, 천하의 빈민굴, 여기까지 온 잘난 기자양반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기도 한 관리인이, 인디오와 흑인 혼혈을 천하게 부르는 호칭인 쌈보 몇 명을 불러 모종의 행동을 지시했고, 이들은 자루에다 닥스훈트를 집어 자루의 주둥이를 묶더니, 인간의 역사에서 진짜로 발생을 해서 기록까지 해놓았던 일인데, 진나라 시황제가 어머니와 가짜 환관 노애嫪毐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그러니까 씨 다른 형제 둘을 자루에 넣어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때려죽인 것을 그대로 흉내 내 거구의 쌈보 두 명이 두꺼운 몽둥이로 자루에 든 닥스훈트를 두드려 패 유혈이 낭자하게 죽여 버렸다.
근데 이 가운데 한 명의 쌈보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드는 싼띠아고. 순식간에 머리를 확 돌려보다가 드디어 알아본다. 한 때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암브로시오 빠르도. 물론 싼띠아고는 그의 성姓 ‘빠르도’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가 빠르도인지도 몰랐지만. 그리하여 싼띠아고는 암브로시오에게 아는 척을 하고, 암브로시오는 또 싼띠아고의 아버지인 페르민 씨를 존경하는 바가 대단하여, 아이고 도련님, 하필이면 여기서 뵙네요. 페르민 나리는 건강하신가요? 큰 도련님하고 떼떼 아가씨는 다 결혼 하셨고요? 부터 시작해 오랜만에 싸발라 가문의 사람들을 만난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거다. 작은 나리, 이렇게 진흙탕에 서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나 좀 하시지요. 하면서 암브로시오가 싼띠아고를 데리고 간 추레하고 지저분하고 중국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레스토랑 겸 술집의 이름이 바로 “까떼드랄.” 이 주점에 들어 싼띠아고와 암브로시오는 무려 댓 시간에 걸쳐 길고 긴 대화를 하며 맥주를 무지하게 많이 마셔댔고, 다음날 아침, 많이 마신 맥주 탓에 어질어질한 두통을 안고 암브로시오가 했던 이야기들, 그 사이사이에 싼띠아고의 회상을 엮어내 본문만 천 쪽이 넘는 장편소설의 막이 드디어 올라간다.
흠. 이렇게 해서, 나는 본문의 내용을 한 마디도 소개하지 않고 독후감을 끝낼 수 있었던 거디었던 거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