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 그 후 민음사 모던 클래식 70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유디트 헤르만의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단박에 헤르만의 팬이 됐다. 그러나 당시엔 이이의 작품집들이 모두 품절일뿐더러, 헌책방 주인들도 헤르만의 진가를 알아보는 눈은 있어서 헌책 값으로 무려 새 책 정가의 몇 배를 요구하는지라, 조금 더 기다려보자 했다가 품절이 풀려 드디어 사 읽어본 유디트 헤르만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이 작가의 작품집을 읽어보고, 검색도 해보았다. 아무래도 단편을 전문 작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번에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쓴 독후감의 결론으로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의견 불일치, 소통단절, 의식의 이격離隔”이라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여름 별장, 그 후》를 읽어보니, 굳이 ‘사랑’이란 범위 안에서 이야기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작가가 천착해온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 단절,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소외감, 건조함을 염두에 두어왔던 것처럼 보인다.
  《여름 별장, 그 후》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단지 유령일 뿐》과 달리 모든 개별 작품 사이의 공통점이 없는 독립적 단편소설을 엮어 놓았다. 아직까지 단 두 권의 작품집을 읽었을 뿐이지만,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헤르만을 읽어봐야 하리라.
  첫 작품 <붉은 산호>부터 매력적이다. 이 책의 커다란 매력 가운데 하나는 각 단편들의 첫 문장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 <붉은 산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리 치료 상담을 받았고, 그 때문에 붉은 산호 팔찌와 내 애인을 잃었다.” ‘나’에게는 675개의 작은 산호 구슬로 만든 팔찌가 있었는데, 이건 증조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난로 엔지니어로 대단한 미모의 아내, ‘나’의 증조할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방방곡곡을 다니며 난로의 제작 방법을 널리 알리고 큰돈을 벌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이 만든 삼각주 지역에 바실리치 오스트로브 섬이 있어, 우리의 예빤친 장군을 비롯한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많은 여름별장 가운데 한 곳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도스토옙스키, <백치> 참조), 다만 증조할아버지가 그 거대한 나라를 다니느라 집에 자주 올 수 없었던 것이 흠. 독일에서 온 창백한 얼굴에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혼자 지낸다는 소식은 섬 전체에 퍼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조할머니는 저녁 빛과 슬프고 아름답고 낯선 어떤 것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바로 이 슬픔과 아름다움, 낯섦이 러시아 영혼의 특징이고 이런 특징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예술가들과 학자들은 증조할머니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증조할머니는 그들이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들 가운데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가 사랑과 함께 선물한 것이 바로 산호 팔찌. 증조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돌아와 블라디보스톡에 한 번 만 더 다녀오면 모든 일이 끝나니 그 다음에 바로 독일로 귀국하자고 주장하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증조할머니는 의도적으로 산호 팔찌를 드러내보였고, 누가 선물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그리하여 그날 밤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곱사등이 이삭 바루브를 니콜라이 세그게예비치에게 보내 결투를 신청해, 다음날 오전 여덟 시, 심장을 관통당한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만다.
  이런 내력을 가진 산호 팔찌. 지금 나는 산호 팔찌가 주인공 화자 ‘나’의 손목에 채워진 내력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왜 ‘나’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는지, 애인은 어떻게 잃었는지에 대하여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제의 신부>가 생각나는 큰 스케일로 꾸려도 충분할 것 같은 소재를 갖고 열여섯 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소설을 만들었으니 문장들이 얼마나 축약적이겠는가. 올 3월에 읽은 《단지 유령일 뿐》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제일 앞에 실린 단편 <붉은 산호> 말고도 거의 모든 단편이 충분히 장편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스토리 라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작가는, 물론 직접 읽어보시면 충분히 알겠지만, 천생이 단편소설 스타일이라 스토리보다 촘촘한 문장으로 더욱 존재가 드러난다. 어떤 뜻이냐 하면, 비록 번역한 우리말로 읽었지만 하나라도 뺄 수 있는 문장이 없다는 것. 그런 문장으로 사람들의 화해 불가능한 개별성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어찌 이이의 작품이 재미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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