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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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볼라뇨는 두 작품,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먼 별>을 발표한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서 나오는 마지막 열전列傳인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의 작가 이력은 틀림없이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이던 1970년 또는 1971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을유출판사, 2009, 172쪽)


  반면에, 오늘 읽은 <먼 별>은,


  “내가 카를로스 비더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1971년이나 1972년 무렵이었다.”


  볼라뇨는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서문’ 형식으로 이 책 <먼 별>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장, 칠레 공군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의 이야기임을 딱 밝히고 시작한다. 그러니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는 <먼 별>에서 나오는 곡예 비행사 카를로스 비더 공군 중위와 같은 인물로 봄이 마땅하다. 작가는 앞서 발표한 작품의 한 장章을 할애한 라미레스 호프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서술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곧바로 같은 인물을 주요 등장인물, 심지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속작품을 써서 제목을 <먼 별>이라고 붙였을 수 있다. 그러니까 <먼 별>은 이름을 ‘카를로스 비더’로 바꾼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의 상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화자 ‘나’와 친구 비비아노 오리안이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칠레 제2의 도시인 콘셉시온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젊은 시인이었던 후안 스테인이 운영하는 시 창작교실이었으며 당시 카를로스 비더가 사용하던 가명은 ‘루이스 타글레’였다. 이이는 건장한 체격의 미남에 누구보다도 옷을 ‘지나치게’ 잘 입고 다녔으며, 어떤 복장을 하더라도 늘 값비싼 브랜드의 것들만 몸에 걸쳤는바, 당연히 많은 여성들이 루이스 타글레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창작교실엔 일란성 쌍둥이 베로니카와 앙헬리카 가르멘디아 자매도 등록을 했고, 당연히 매우 아름다운 자매라서 ‘나’와 비비아노를 비롯한 거의 모든 남자들이 어떻게 한 번이라도 수작을 부려볼까 궁리하는 모습이 훤하게 보였을 정도였다. ‘나’는 앙헬리카를, 비비아노는 베로니카를 마음에만 두고 언제 고백을 해야 하나, 고민만 한창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불쑥 나타난 루이스가 그만 베로니카의 마음을 홀랑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편 시인 후안 스테인은 친한 시인 친구가 있었으니 ‘디에고 소토’라는 인물. 후안 스테인은 칠레의 전통 가정시 같은 서정시를 하는 반면에 디에고 소토는 좀 과격한 초현실주의 비슷한 전위적인 시 작풍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토의 창작교실은 의과대학 안에 있어서 늘 해부실의 포르말린 냄새가, 심하거나 약하거나 간에 공기 중을 떠돌아 이를 잊기 위해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워 대고는 했다. 당시 콘셉시온에 있던 일종의 경쟁업체인 두 시인의 창작교실에 동시에 등록을 하고 다닌 인물이 딱 세 명이 있었으니, ‘나’와 비비아노, 그리고 타글레였다. 이쯤 되면 또 문득 떠오르는 볼라뇨의 다른 작품이 있다. 그렇다. 전위적인 “내장 사실주의” 시를 창작하기 위한 그룹의 구성원들의 이야기인 <야만스러운 탐정들>. 이 책에서는 야만스러운 ‘탐정들’ 대신에 야만스러운 ‘시인들’이란 말을 상당히 잦은 빈도로 사용한다. 이미 2년 후에 발표할 작품의 제목을 이때 구상한 듯하다.
  젊은 시인 지망생들이 갖가지 시를 쓰고 있던 시절에 타글레는 다른 시인 지망생들하고 완전히 구별되는 태도를 견지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타글레의 시를 혹독하게 비난을 해도 열을 받기는커녕 불평 없이 수용을 하고, 남의 시 작품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중하고 간결하게 비평을 할뿐더러, 항상 예의바른 톤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 즉, 자기가 지은 시와 무심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독특한 지망생인데, 이런 태도는 디에고 소토로 하여금 타글레의 시가 자기 작품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런 눈치는 다들 별로 다르지 않아 시 동인지를 만들기 위해 몇 명이 모여 논의하다가 잡지 안에 타글레의 시를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일화도 겪는다.
  여기까지 읽을 때, 그냥 그런 소설이겠거니 했다. 왜냐하면, 고백하건데 <아메리카의…>를 읽은 지가 오래되어 작품의 연관성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후 벌어질 쇼킹한 사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73년이 되어 피노체트가 대통령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를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콘셉시온에도 계엄령이 발령이 되어 어수선한 시절을 맞아 가르멘디아 자매들은 콘셉시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시미엔토의 부모 집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부모님은 자매들이 열다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한 날 한 시에 즉사를 해서 지금은 큰 이모 에마 오야르순 여사와 마푸체 족 인디오 가정부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이 집에 루이스 타글레가 방문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유쾌한 잡담을 하다가, 큰 이모 오야르순 여사를 비롯한 자매들이 너무 늦은 시간이니 하루 자고 날 밝으면 떠나라고 제의를 했고, 못이기는 척 하면서 타글레가 이를 받아들여 이층에 빈 방을 하나 얻었는데, 평소에 눈이 맞아 있는 상태였던 베로니카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 한 번 관계를 한 다음, 모든 여자들이 깊은 잠에 빠진 암흑의 공간에서 1층으로 내려간 타글레가 에마 이모의 방에 소리 나지 않게 들어가더니 베개로 노인의 얼굴을 덮어 누름과 동시에 휘어진 단도로 단숨에 목을 그어버렸다. 이어 다시 방에서 나와 하녀의 방에 잠입해보니, 타글레가 신 혹은 악마는 아니어서 마푸체 족 인디오 가정부는 이 새벽에 몸을 숨겨 벌써 달아나버려 빈 침대만 남아 있었다. 때를 맞춰 차를 타고 도착한 네 명의 남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15분이 지난 다음에 일사불란하게 다섯 명의 남자가 집을 떠났는데, 집에서 시신은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었으며, 이때 집에서 나온 살인자는 타글레가 아니고 ‘카를로스 비더’였던 거였다. 여기까지가 총 10 장章 가운데 첫 번째 장의 내용이다.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독일의 제4 제국 건설을 꿈꾼 카를로스 비더의 활약상이 펼쳐지고, 활약의 결과물을 찍은 사진 전시가 문제가 되어 공군에서 추방된다. 그 후 유럽으로 흘러간 것을 ‘나’의 친구 비비아노가 끈질기게 추적을 해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먼 별>이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있는 이이의 다른 두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천생 볼라뇨 소설. 볼라뇨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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