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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나라를 아르십니까 ㅣ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신석정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신석정. 1907년생. 네 살 때 조선의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식민지의 젊은 시인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시대의 절망 속에서 어머니를 불러 저 먼 나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은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는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시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마지막 세 연이다. 물론 이렇듯 신석정의 초기 시는 일종의 퇴행을 보는 것같이 어머니를 소환하고, 자연과 소년기의 동경 같은 천진스러운 시선을 보여주기는 한다. 176cm의 키. 20세기 초에 태어난 사람이 176cm라면 상당히 큰 키의 남자인데 이런 이가 어머니, 혹은,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이라 노래한 것을 웃지 말라.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ㅡ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임께서 부르시면> 부분
물론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으나 신석정 같은 강골의 시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이나 만해를 빼고는 별로 기억에 없다. 나부터도 시를 읽고 미루어 짐작한 천생 서생 신석정의 강단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하고, 친일문학잡지 《국민문학》으로부터 청탁 편지를 받자 박박 찢어버리고 4년이 넘게 아예 절필을 한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석정의 고향이 부안. 바로 아래 동네인 고창에 석정의 8년 손 아래로 오직 시 하나만 보면 한국문학사의 위대한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서정주다. 스물일곱 살의 미당이 영미귀축을 물리치기 위해 성스러운 전쟁에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동안 석정은 공식적으로는 붓을 똑 부러뜨리고 고향에 칩거하여 이런 시를 썼다.
고운 심장心臟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전문)
그런데, 참 우스운 일이 있다. 식민 치하에서 석정은 그들의 중요한 요구를 들어준 바 없었어도 무사했던 반면, 1960년대부터 곤욕을 치루기 시작한다. 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에게 이런 시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보다.
시끌한 / 바람이 불더니 / 어둠 속에 / 3월은 가고, / 다냥한 / 햇볕이 들더니 / 어둠 속에 / 4월도 가고, / 푸르른 / 숨소리 들리더니 / 슬프도록, / 빛나는 5월은 와도, / 화관을 / 씌우던 ‘5월제’는 옛이야기. / 언젠가는 / 퇴원할 민주주의를 / 5월이여 / 너도 기다리기에 지쳤지? (후략) <푸른 문 밖에 서서> 부분
그래서 군인들에게 붙들려가 8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고 하며, 이후 1969년에도 민주공화당이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와중에 이번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는데, 당시 남산에 갔다하면 제 발로 걸어나오는 사람이 없던 시기였다. 이미 나이도 예순세 살에 달한 (당시 기준으로) 노인이 그 험한 꼴을 당했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꼬. 그리하여 석정의 시는 이제 어느새 다시 초기 서정시 쪽으로 방향을 바꿔 이 시집의 마지막 시집도 아래와 같은 시로 마감한다.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전문)
지금 시대에 석정 같이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겠지. 그러나 그의 시편들, 그 고운 멀고 먼 나라의 빨갛게 익은 능금 같은 시들의 효용은 아직도 독자의 마음을 간질이고, 적신다.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 부안 초입에 있는 석정 생가에나 한 번 가볼까 싶다. 이런 서정시를 쓰는 강건한 지사가 그리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