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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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이 처음 비단 구경을 해 본 것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이든가 하드리아누스 때던가, 하여간 서아시아 지역에서 사라센 사람들하고 맞장을 뜨러 군사들을 횡대로 늘어세웠는데, 야만인들인 줄 알았던 사라센 군대의 기치가 분명히 천으로 만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햇빛을 받으면 빛이 반짝반짝 나는 놀라운 모습의 것이었다고, EBS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어느 황제 시절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중국에서 로마까지 비단길이 뚫린 것은 다 아시는 이야기일 터이고.
  근데 이 비단이란 것이, 유럽의 경우엔 5월 초에 알에서 애벌레가 되고, 30일간 미친 듯이 뽕잎을 뜯어먹고는 곧바로 고치가 된 후 2주가 지나야 고치 하나에 천여 미터의 생사를 생산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단다. 그것도 유럽 전 지역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프랑스 남부의 몇 군데서만 가능하다고 책에서는 주장하는데, 이건 작가 바리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리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설마 같은 위도의 스페인에서도 누에가 자라지 못했을까.
  소설의 시작은 1861년. 플로베르는 <살람보>를 집필 중이었고, 전깃불은 아직 이론에서나 가능한 현상이었으며,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대륙의 대통령 링컨은 자신은 결코 결말을 알지 못하고 생을 마칠 전쟁이 한창이었다. 이때 주인공 에르베 종쿠르의 나이 32세. 장소는 남프랑스의 라빌디외 마음. 종쿠르가 하는 일은 매년 연초에 물길 1,600마일, 육로 8백 킬로미터를 배타고, 걸어 시리아나 이집트까지 가서 누에알을 사와 4월의 첫 번째 일요일, 대미사를 드리는 시간에 맞춰 고향 라빌디외의 잠업업자에게 되파는 일이다.
  당시로부터 20년 전, 그러니까 1841년에 라빌디외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발다비우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었다. 이이가 마을에 들어와 강 하구에 제사공장을 짓고, 숲을 등진 오두막에서는 누에를 치는 일을 하더니, 이 비단이란 것으로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 하면 무려 동네 사람 30여 명을 일꾼으로 고용하더니 7개월 만에 3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으며 비비에르로 향하는 길과 만나는 네거리에 성녀 아그네스를 위한 작은 예배당을 지을 정도였다. 처음에 마을에 들어와 읍장에게 비단 사업을 소개할 때 읍장실에서 쫓겨난 이력이 있는 발다비우 씨는 이번엔 돈을 가지고 읍장에게 가져가, 이 돈이 주장하는 건, 읍장 당신이 바보 멍청이라는 뜻이라고 한 말씀을 한다.
  이 발다비우 씨가 현명한 건 자기 혼자 제사공장을 더 지어 즐겨도 좋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사업의 비결을 널리 알려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쉽겠어? 정말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그래 5년 후에는 동네에 모두 일곱 개의 제사공장이 생겼고, 조그만 라빌디외 마을은 양잠업과 견사공장에 관한 한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유럽의 양잠업계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1853년을 맞아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발다비우 씨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 늘 거리에 앉아 두리번거리다가, 당시에 육군 소위였던 에르베 종쿠르를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에르베 종쿠르가 누군가 하면, 발다비우 씨를 초면에 문전박대했던 읍장의 아들. 읍장은 아들이 육군 장군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데 이제 주로 여자들의 옷감을 만드는 야릇한 직업을 가지게 될 찰나니 기분이 좋을 수 있겠나. 그러나 발다비우 씨가 거의 강권을 해서 에르베를 시리아와 이집트로 보내 누에알을 사오게 했고, 덕분에 일 년에 겨우 세 달만 여행 삼아 일을 하고 나머지는 편히 쉬는 신선놀음을 해도 마을 어귀에 큰 집을 짓고 시내 한 복판에 작은 작업실까지 두는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된 거였다.
  근데 에르베 종쿠르가 잠업계에 데뷔하고 8년이 지난 현재, 즉 1861년에 다시 거대한 누에 바이러스가 들이닥쳐 전에 다시없는 황망한 처지에 빠져들고 말아서, 참 독특한 감각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비단>이 탄생한다.
  발다비우 씨가 에르베 종쿠르를 불러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살아남으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가 누에알을 사와야 한다고 선언한다. 일본? 찢어진 눈을 한 창녀의 나라? 그건 85년가량이 더 흘러 원자폭탄이 터진 이후의 일본이고, 1861년은 오에 겐자부로가 쓴 소설 <만엔 원년의 풋볼> 다음 해로,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하여 개항을 하고 불과 8년이 지난 아직 개화가 덜 된 나라였다. 그리하여 에르베가 발다비우 씨에게 묻기를, 그 나라가 어디 있는 거예요?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로 비단은 팔지만 누에알을 나라 밖으로 빼돌리는 인간에겐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던 나라였다. 절대 법을 어기는 법이 없는 남프랑스의 신사들도 땅 끝을 지나고 바다까지 건너에 있는 지구상 마지막 나라에선 법 좀 어겨도 별 탈이 없으리라 여겨 모두 동의해 에르베를 일본으로 보낸다. 마지막 희망으로.
  에르베 종쿠르는 남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시베리아, 스텝지역과 바이칼 호, 이어서 아무르 강줄기를 따라 태평양을 만나 여기서 네덜란드인 밀수꾼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도보로 이시카와, 도야마, 니카타, 후쿠시마, 사라카와라에서 또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작은 섬에 도착해 도주, 섬의 주인인 하라 케이와 접견, 누에알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이미 아름답고 선량한 아내 엘렌을 사랑하지만, 에르베 자신에게 앞으로 상당한 기간 ‘불멸의 여인’으로 남을 동그란 눈의 어린 모습을 한 여인을 만난다.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를 매 페이지 놀라면서 읽고 나서 작가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이 책 <비단>을 사서 읽었다. 당신은 아는가? 168쪽에 에르베 종쿠르가 발다비우 씨에게 묻는 것을.

  “무언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절대로 모를 것입니다.”

  이런 사무침 하나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더욱 불행한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것이 나를 내내 괴롭혔다. 신파? 감각? 그래서 결론을 내기를, 신파와 감각 사이에 비단 실을 걸쳐놓고 그 위에서 벌이는 절묘한 줄타기라고. 이 책이 5쪽에서 시작해 212쪽에서 끝나니 모두 208쪽의 분량이다. 그렇지만 한 페이지에 단 11줄, 모두 65절인데 절마다 새로운 페이지에서 시작하니 사실 중편 정도. 신파가 됐던 감각적 호소가 됐던 간에 어쨌든 아름다운 문장인 것은 사실이니 읽는 즐거움을 보장할 수 있는 책이고, 바리코의 대표작으로 거론하는 작품이지만 현재 품절 상태다. 나는 새 책 수준의 헌 책을 사는 행운을 누렸다. 이 책의 ‘찐’은 제일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나온다. 그러면 위의 의문, 신파냐 감각이냐 하는 줄타기에서 결론은 감각적 아름다움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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