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울프는 이 책 <올랜도>를 쓰는 일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한테 감사를 표하는 ‘서문’을 제일 앞에 달았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긴 한데, 본문 뒤편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명단을 읽어나가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조카, 언니의 아들, 줄리언 벨. 그의 가혹하지만 예리한 비판이 책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인 버네사 벨의 남편, 그러니까 형부인 클라이브 벨과 눈빛이 마주치기만 하면 스스럼없이 동침을 감행했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버네사는 남편의 애인이기도 한 양성애자, 덩컨 그랜트를 평생의 남자친구로 삼았다. 한 발 더 나가서, 버지니아 울프가 고마움을 표한 조카 줄리언은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전사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부가 엄마 버네사의 남편인 클라이브가 아니라 클라이브의 막역한 친구 로저 프라이 씨라고 굳게 믿었다. 줄리언의 여동생 퀜틴 역시 덩컨 그랜트 씨의 생물학적 딸이라고 했으니, 그것도 20세기 초반에, 이거 참, 대략 난감한 내력이다. 이런 내용은 지독하게 잘 생긴 청년 줄리언 벨의 열한 번째 애인 “K”양의 무척 야한 소설 <영국 연인>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 K가 알파벳의 열한 번째 철자다. 애초부터 이런 조금 덜 바람직한 가정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줄리언은 사랑과 연애에는 미친 듯이 몰두하되, 결코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봐 왔거든. 혼인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정은 이 책에서도 은근히 강조되는데, 그건 내가 설명하기보다 직접 읽어보시기 권하는 바이고,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지니아 울프가 혼인제도에 대한 약한 네거티브 적 사고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기도 한 것 같고 그렇다.

  작품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는 시기, 1580년대 말쯤에 열여섯 살인, 태생부터 귀족인 가문의 외아들 올랜도가 서까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무어인들의 참수한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말기로 유명한 미남이자 무능한 장군이었던 로버트 데버루가 연속적으로 패전하기 바로 직전,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찔러 포도주를 퍼마시고는 자신의 애인이면서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여왕의 치마 속 사정(브라질리언 왁싱에 대한 시청각 경험)을 함부로 떠들고 다녀 스스로 명을 재촉하던 시기. 데버루는 결국 괘씸죄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가 도마 위에 늘인 목에 망나니의 도끼를 얹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 그건 1601년 일이고, 이 시기는 데버루의 진심에 여왕이 의심을 품고 있던 때쯤으로 보인다. 이미 환갑 진갑을 넘긴 여왕의 늙은 마음이 공허할 때, 여왕은 올랜도 아버지의 성을 방문했고, 올랜도는 나무 아래서 스코틀랜드와 웨일 지역을 완상하다가 달음박질을 해 와 겨우 시간에 넘기지 않고 장미 향수가 가득 든 사발을 여왕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근데 여왕이 보기에 열여섯 먹은 청년 올랜도가 근사했거나 귀여웠던 터. 평생 쉴 틈 없이 귀에서는 늘 대포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선 항상 독약 방울과 예리한 단도가 어른거리는 삶을 법적인 처녀 상태로 평생을 살아온 여왕이 젊은이를 간혹 옆에 둔다고 해서 어찌 큰 까탈이겠는가. 여왕은 올랜도를 런던의 왕궁에 불러 왕실 재무담당관이자 중신으로 임명하고 관직의 표지인 사슬과 발목에 가터 훈장까지 차려준다. 그리고 1588년,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불꽃놀이를 펼치던 날 밤, 당시 관습대로 삼십 일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아 옷 무더기 상태인 여왕이 올랜도를 불러 얼굴을 자신의 가슴 속에 푹 파묻어 버렸다. 여왕이 올랜도에게 바라는 건 침대 위의 봉사가 아니라 노년의 아들로서 자신의 허약한 몸의 수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 쇠락한 자신의 몸을 기댈 참나무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으나, 마음이 그랬다는 것뿐이고 진짜로 올랜도가 여왕의 방문 밖에서 어느 계집아이하고 키스하는 걸 발견하고는 왕의 칼로 거울을 내리쳐 단칼에 박살을 내버렸고,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남자의 배신에 대해 신음하며 온갖 한탄을 늘어놓았다고, 울프가 창작한 전기작가는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올랜도는 세 명의 영애들과 혼담이 오간다. 클로린다는 흰 속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에 피를 쳐다보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오른 산토끼 구이를 보자마자 졸도를 하는 데다가 혼인을 하면 남편을 개심시켜 악행을 고치겠는 말에 기겁을 해 파혼을 해버렸고, 얼마 후 천연두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는 파빌라. 가난한 신사의 딸인데, 어느 날 자신의 스타킹을 찢어놓은 스패니얼을 올랜도의 창문 아래서 채찍으로 반쯤 죽여놓는 걸 보고 그날로 파혼을 해버렸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신생 식민지 아일랜드의 데즈먼드 가문의 딸인 유프로시니 양으로 잉글랜드 왕궁의 입장에서도 식민지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혼인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며 올랜도 역시 크게 이견이 없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때는 1608년, 영국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템스강조차 꽝꽝 얼어붙는 날씨가 연이어 계속될 때, 서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할 시절, 귀족들은 얼어붙은 템스강 위에 천막을 마치 도시처럼 치고 날마다 무도회를 벌였던 터다. 이때 올랜도 앞에 헐렁헐렁한 러시아 식 바지를 입고 기막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마르샤 스타니로브스카 다그마르 나타샤 일리아나 로마노비치 공주. 이 사샤 공주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자주 등장해 올랜도의 추억 속에서 기념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으로 반드시 결혼해주어야 하는 데즈먼드 가문의 딸 유프로시니 양과의 파혼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샤 공주와 올랜도는 야반도주하기로 뜻을 합쳤고, 자정에 만나기로 했으나 그날 밤새도록 뜻밖에 내리는 비만 철철 맞으면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사샤 공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밤새 내린 비로 해동된 템스강에 여태 정박한 러시아 함선이 유유하게 조국을 향한 항해에 나서고.

  책에서 올랜도는 7일에 달하는 잠을 두 번 잔다. 한 번은 자신이 써왔던 57편의 작품을, 짧은 시 <참나무> 한 편을 빼고, 모두 불태운 날. 당대의 시인 니컬러스 그린이란 자에게 3백 파운드의 연금을 분기별로 나누어 지급하겠다는 호의를 약속했으나 그린은 풍자시를 통해 올랜도의 작품을 더할 나위 없이 장황하며 과장된 허풍으로 일관한다고 혹평한바, 문제는 누가 그 풍자시를 읽어도 혹평을 받은 헤라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시를 올랜도가 썼다는 걸 저절로 알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그래 이 풍자시의 팸플릿을 장원의 가장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두엄더미 속에 빠뜨려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이젠 인간들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한 날이다. 7일 후 잠에서 깬 올랜도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바스 훈장을 받고 공작 작위를 얻게 된다. 공작의 대관을 받은 날 밤에 두 번째 잠에 빠져 또다시 7일 만에 깨어 눈을 뜬 다음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에그머니, 올랜도는 여자로 변신해버렸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올란도>를 보면 올랜도로 분장한 틸다 스윈톤이 나신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 나는 스토리 중심으로 독후감을 썼다. 책 분량의 반도 오지 않았다. 틸다 스윈톤 주연의 영화 <올란도>도 말했는데, 이 소설은 결코 스토리를 따라가는 작품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그것을 엮어가며 읽는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올랜도>의 주인공 올랜도는 대략 1570년생으로 그가 서른 살까지 남자로 살다가 갑자기 여성으로 변신해 서른여섯 살의 완숙한 여인, 아들 하나를 낳아 잉글랜드 특유의 한사상속의 한계를 피해 예전에 비하면 빈털터리가 됐으나 그래도 유유자적하게 남은 평생을 관조하면서, 시 <참나무>로 문학상을 타 상금 2백 기니를 받고 7쇄 이상을 찍는 유명 작가가 되는 1928년까지 근 360년의 대하 로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문학과 양성, 여성과 남성에 대한 거대 에세이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재능있는 여동생 매리가 아니라 유명 ‘남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닉 그린 씨도 자신이 오직 시작making poetry에만 몰두하기 위하여는 당시 화폐 기준으로 연 3백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게 나중엔 ‘여자’를 더 강조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변화 또는 진화하는 것. 물론 문학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인간사 거의 모든 면에 여성과 남성을 측면에서 본 것들을 조망하기 위하여 울프는 올랜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키지 않았나 싶다. 참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의 지식인이자 부르주아가 양성을 관찰한 기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김경숙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렇게 두 권만 읽었으니 결코 그에 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처지렸다. 게다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두 작품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같은 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상이한 작품이라 좀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던 바, 이번에 <...미스터 렌>을 읽고서야, 역시 싱클레어 루이스는 20세기 초반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는 모습이 훨씬 어울린다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결론을 내버렸다. 실제로 루이스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많은 미국 독자들이 서슴없이 <배빗>을 꼽는다고 한다.
  전에 제임스 A. 미치너의 역작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토론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 작가 네 명으로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를 꼽은 반면,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할 작가 네 명의 명단으로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을 나열한 적이 있다. 위대한 소설 작가 명단엔 그리 크게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 가운데 (당시까지만 해도 읽어본 책이라곤 <배빗>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루이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후 그의 작품이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렇지 뭐여? 스타인벡을 이 명단에 포함시킨 거엔 거의 분노를 했던 바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작품들, 이라기보다, <배빗>이나 <...미스터 렌> 같은 자잘한 소시민의 허위의식이나 속물성, 또는 그저 날 것의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들이, 소위 서사성의 부족이라든가 철학이나 역사적 소명을 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싱클레어 루이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이변이나 된다는 듯이, 이이를 ‘반드시’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라고 단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후장대한 것은 중후장대한 것대로, 경박단소한 것은 또 경박단소한 대로의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쉽사리 중후장대를 무기로 휘둘러 경박단소를 윽박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의미로 경박단소,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은 그것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충분히 심각하게 지고 평생을 살지 아니한가 말이지. 지금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 앞뒤를 돌아보라. 거기 누가 있어 중후장대하다고 할 수 있는지. 거개가 다 그만그만하고 고만고만한, 경박단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일지어니.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도 ‘기념품과 장식 소품 컴퍼니’에서 월급 19 달러를 받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독신이라 업무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월세 집에 가느니 검표원의 친절한 인사를 받는 즐거움을 누리러 5센트 극장에 가기를 더 좋아하는 서른네 살의 영업사원.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이지만 필드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매출 체크하고 서류를 관장하는 내근 영업직원. 그리고 아마도 숫총각이리라. 렌 씨에게도 꿈이 있다. 증기선을 타고 세상 곳곳을 여행해보는 것. 언젠가 이룰 자신의 꿈을 위해 박봉을 쪼개 조금씩 저축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관광안내 책자들을 수집해 산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서 세상 각지의 모든 문물과 문명과 자연을 익혀 나간다. 오직 그것 하나, 여행. 자바 섬의 정글, 스칸디나비아의 백야, 런던 대성당, 파리 박물관 등등, 세상 각지를 순회하는 상상으로 늘 꿈속에 살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회사의 신경질적인 관리자 모티머 길포글 씨의 호출 벨 소리만 들렸다하면 총알 같이 길포글 씨의 책상 앞으로 뛰어가 무수한 질타와 함께 새로운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는 형편.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맞다,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 친척, 이웃이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미스터 렌은 언제나 해고의 위협을 안고 있어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리 드물지 않은 빈도로 자진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는데, 노상 이렇게 지질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어디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씨는 우리의 미스터 렌에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종의 돈벼락을 쏟아 부으니, 오래 전에 돌아간 아버지가 남긴 파르테논(뉴욕의 가난한 동네 이름) 집이 팔려 940달러가 국립은행 통장에 입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방에 자신의 4년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 것. 요즘 우리나라 로또 복권이라야 1등 해봤자 실 수령액이 10억 안팎밖에 안 되지만, 전엔 한 번 터지면 4십억, 5십억도 일상 다반사였는데, 평소 지겨운 봉급쟁이한테 한 번에 5십억 원의 거금이 생기면, 그것 가지고 ‘아더매치’,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 봉급쟁이를 계속 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스터 렌 씨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아, 상습 신경질꾼 모티머 길포글 씨가 어제와 다름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하기 싫으면 관두시든지, 짜증을 부리자, 뭐 그러지요, 마침 일신상의 이유로 하산하기로 결심을 할까 했던 바입니다, 하고 사표를 써버렸다.
  문제는 이 소심한 미스터 렌이 진짜로 유럽 여행을 하려고 하니, 말은 쉬운데 갈까 말까, 망설임이 가볍지 않은 것. 렌 씨가 가장 신경 쓴 것은 940달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다는, 거의 강박적인 조바심. 그러던 어느 날, 렌 씨의 눈에 신문광고 구인란에서, 아주 작은 돈을 벌면서도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란 망상에 시달리는 영국인들을 위해 식육용으로 키운 소를 싣고 리버풀로 향하는 배 메리언 호를 타고, 뱃삯대신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노동을 해주면 된다는 국제 대서양 인력 센터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래 선뜻 인력 센터를 찾아가 소개비 5달러를 내고 배에 오르게 되는데, 평생 소심하고 착한 심성으로 오직 펜대만 잡아 본 미스터 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억센 공장 노동자 출신의 피트, 모자 팔던 빈털터리 팀, 모리스 패거리의 부두목 맥가버, 이들의 ‘두목 사탄’ 등의 악당들과, 7년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다 3개월의 휴가를 받은 선량한 모튼, 그리고 유대인 늙은이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항해를 시작한 것인데,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 두목 사탄의 지휘로 미스터 렌은 피트와 결투를 벌이게 되고, 놀랍게도 마구 휘두른 미스터 렌의 주먹이 적재적소에 꽂히는 바람에 KO 승을 거두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부터 윌리엄 렌은 앞으로 간혹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싸움꾼의 본성이 튀어나올 때가 생기기 시작한 것. 미스터 렌이 약간 거친 모습으로 변할 때마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를 ‘빌렌’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어째 발음이 악당 villain과 비슷한 것도 같고.
  그리하여 선한 심성과 순진한 마음을 그대로 가진 윌리엄 렌 씨가 런던에 도착하는데, 평생소원을 이룰 첫 발을 뗀 미스터 렌이 영국 곳곳, 옥스퍼드, 런던의 펍, 대동물원 등등을 전전하면서 누구를 만나고, 런던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바라게 됐을까? 좋다 가르쳐드린다. 영국에서 미스터 렌은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리라고. 당신의 경우와 다른지 한 번 보시라. 첫째가 저녁에 집에 함께 갈 사람, 둘째가 동고동락하며 함께 일 할 동료. 결국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데, 미스터 렌은 영국에서 이것을 이룰 수 있을까? 혹시 미국으로 내빼는 건 아냐? 그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노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판소리 전집 서문문고 100
신재효 지음 / 서문당 / 199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재효, 라고 하면 꽤 오래 전 인물인 줄 알겠지만 사실 1812년생.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와 같은 나이다. 어머니가 당시 나이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마흔이 넘어 치성을 드리고서야 얻은 외아들이었으나 효성 지극할뿐더러 이재에도 밝아 전라북도 고창현의 아전노릇을 하며 착실하게 부를 쌓아 천석꾼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개항을 한 1876년 병자년의 대흉년을 맞아 도처에서 백성들이 세상에 나오지 말고 태중에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적지 않은 재산을 털어 이들을 구휼했으며, 또한 상당한 재물을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으로 희사하여 통정대부라는 명예직을 얻기도 했으니, 1894년 인근 정읍 이평의 고부에서 시작한 동학혁명 와중에도 자손들의 일신은 물론이요 가세 역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터. 신재효는 평생 판소리를 즐겨 듣고, 하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하며 현재의 우리가 기념하는 신재효의 업적 역시 당시 불린 열두 마당의 판소리 가운데 여섯 마당을 개작해 보존한 일이다. 《한국판소리전집》은 그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박타령>, <적벽가>, <변강쇠가> 여섯 마당 모두를 한 책에 모아놓은 결과물이다.
  <춘향가>와 <적벽가>, <변강쇠가>는 “성두본星斗本 B”, <심청가>, <토별가>는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 <박타령>은 “성두본星斗本 A” 임을 밝혀 각기 다른 세 가지 판본에서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춘향가>는 민음사에서 출간한 <춘향가>와 조금 다르고, <박타령>엔 판소리 <흥보가>에서 놀부가 흥보네 집에서 화초장을 얻어 걸머지고 집에 돌아가는, 화초장, 화초장, 장화초, 초장화. 된장, 간장, 고추장, ‘화초장’의 이름을 헛갈려 애를 먹는 코믹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흥보의 큰 아들이 샅을 긁적이면서, ‘부랄 밑이 근지러우니 장가보내주오!’ 하는 장면도 발견할 수 없으며, <변강쇠가>에서도 ‘멀리 보면 도끼 팬 자국이오, 가까이 보면 썩은 말눈깔이로다.’는 대사도 나오지 않는다. 민음사에서 읽은 <춘향가>에 없는 대사도 많이 나오는데, 이 책, 정병욱, 김삼불, 김동욱의 대를 이어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의 명맥을 이어 온 강한영 전 교수가 선택한 이 판본은 다른 책들보다 더 읽는 맛이 난다고 해야 마땅하다.
  편자 강한영은 책머리의 해설에서 “‘판소리’와 ‘판소리 사설’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광대의 소리와 너름새 그리고 아니리가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극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판소리’라면, ‘판소리 사설’은 정선된 시어로서 분명하고 완연하게 한 마당을 구성하는 희곡적 문예작품이다. 즉, 판소리는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는 극적 양식이요, 판소리 사설은 가사로 씌어지는 희곡적 양식이다. 따라서 판소리 사설은 우리의 고유 전통적인 문학의 한 양식이며, 음악적 전제의 제약을 필연적으로 가지는 형식상의 특성을 지닌다.”라고 설명했다. 즉 이 책 《한국판소리전집》은 우리 고유의 전통적 문학의 한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판소리 자체의 대사, 리브레토의 한 종류로 기능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판소리 사설들을 읽어보면, 19세기 조선의 전형적인 중인계급의 문예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중국의 역사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영웅, 미녀, 시인, 문장가, 황족, 시조들로부터 만들어진 숱한 시어들과 전래되는 이야기가 무수하게 등장하니 아무리 19세기라 한들 소위 ‘진서’라고는 고무래 정丁자도 모르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즐기기는 힘들 터이었으되, 전편을 깔고 가는 해학과 진솔한 유머는 또 저 위의 진짜배기 양반들이 차마 들어주기 힘든 웃음, 거의 폭소 코드가 깔려 있으니 이 두 가지를 마음 놓고 흠향하며 싱긋 웃을 수 있었던 계급은 신재효 자신이 속했던 중인 계급 아니었을까.
  처음에 <춘향가>를 읽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하건데, 애초부터 그냥 이야기를 읽는 방식으로 아무 감흥 없이 읽기 시작했으나, 나도 모르는 순간, 그저 일상적인 책 읽는 습관이 저절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읽을 때 흔히 그러듯이, 문장을 3.3.4.4. 또는 4.4.4.4. 이렇게 저절로 띄어 읽기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춘향이 이도령을 옥문獄門을 사이에 두고 만나 하는 말이,
  “와 계신가, 와 계신가. 우리 낭군 와 계신가. 더디었네 더디었네, 어찌 그리 더디었나. 그새에 부모님은 기체 안녕하옵시며, 서방님 천리 행차 평안히 오시니까. 어찌하여 그 문필에 급제를 못 하신가. 입은 복색 꾸민 맵시 남 보기는 과객이나, 하는 말씀 뵈는 기운 내 짐작은 의심일세. 수가須賈를 속이려고 범저范雎 옷을 입었으나 소진의 처 내 아니니 불하기不下機를 하겠는가. (중략) 그새 그리 적조積阻키는 동방화촉 신정 만나 금슬종고琴瑟鐘鼓 즐기느라 나를 아주 잊었던가.”각주
  위의 인용을 산문 읽는 식으로 읽는 것하고, 속으로 운율을 먹여 4.4.4.4 / 4.4.4.4 이런 식으로 읽는 것 사이엔 차이가 많다. 이렇게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이 딱, 다가오면,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 어느 하나 빼지 않고 다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도 노골적인 장면과 단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난데없이 폭소를 터뜨리는 때가 올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마 이 곳에 인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사용하니, 지금부터 2백 년 전에는 그런 단어가 지금처럼 금지어禁止語 비슷하지 않아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사설들에 비해서 그중 소프트한 <토별가>의 한 장면을 보면, 별주부가 토간을 얻기 위해 뭍으로 긴 항해를 떠나기에 앞서 이종사촌 고둥, 내종사촌 소라, 진외척숙 우렁이, 육지사는 사돈 달팽이들과 이별의 말을 주고받는데 난데없이 해구, 물개란 놈이 와서 친척을 칭하니 별주부 묻기를, “우리 집 내외척이 다 내력이 있느니라. 고둥, 소라, 우렁이들이 내 목과 같아여서 들락날락 하는 고로 촌수가 있거니와, 네가 어찌 척분 있노.” 해구, 물개란 놈을 이야기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래 최고의 양기보양제인 해구신을 들 수 있을 터, 이 놈 웃으며 대답하기를,
  “ 내 X지도 네 목같이 서면 들어가고 앉으면 나오기로 주부에게 척숙되제.”
  나는 실제로 공연하는 판소리 다섯 편 가운데 <적벽가>를 제일 좋아했다. 소리 자체가 웅혼한 동편제의 목청으로 장대한 명판을 만드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사실 공연을 관람하거나 음반으로 듣는 판소리에서는 복잡다기한 가사가 주는 매력을 십분 즐길 수는 없는 일. 이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에서 두 번 벌어지는 중국역사 3대 대전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그리면서도 역시 하도 웃어 배가 아플 정도의 지독한 농이 섞여 있음에, 과하게 우스워 이 하찮은 독후감에도 옮겨 적지 못할 정도이다. 놀랍지? 조조, 정욱, 장요, 서황, 허저, 손권, 주유, 황개, 한당, 주태, 장흠,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이 총 출동하는 웅혼한 영웅담 속에 그렇게도 심한 저잣거리의 웃음코드를 심어 놓았다는 것이. 그게 무엇인지는 절대 가르쳐 드리지 않겠다. 뜻이 있으면 책값도 저렴하니 (5천원이 안 된다.) 직접 사 읽어보시라. 당신이 약간의 한자어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훨씬 좋을 수 있을 텐데 뭐 아니어도 상관 없다.




 

* 참고 참았지만, 판소리 사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재미있는 (사실은 야한) 사설 몇 마디 더 올리지 않는 건, 우리 판소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고, 위에 해구 즉 물개가 한 얘기도 있고 해서, 아래와 같은 것이 무엇일꼬, 하는 퀴즈를 드리는 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냐 꾸짖지 마시기만 바라오며..... 이런 글 올리면 서재 친구들 투두둑, 이제 너하고 친구 안 해, 하는 게 일상이지만서도.



  "이상히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파이었다. 콩밭 팥밭 지났던지 돔부꽃이 비치었다. 도끼날을 맞았던지 금 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 옥답인지 물이 항상 괴어 있다. 무슨 말을 하려관대 옴질옴질하고 있노. 천리행룡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하다. 만경창파 조갤는지 혀를 삐쭘 빼었으며, 임실 곶감 먹었던지 곶감 씨가 장물이요, 만첩산중 으름인지 제라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을 먹었던지 닭의 벼슬 비치었다. 파명당을 하였던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장은 걱정없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사령 서려는지 쌍 걸낭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 군뢰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 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꼬. 성정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굼기(구멍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없네."

 

 

각주. 춘향과 이도령이 옥문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대사를 보면, 이도령이 한양으로 올라가자마자 참판댁 영애와 정식 혼인한 사실을 춘향은 이미 알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대산세계문학총서 161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 신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세기 중반에 태어나 영국, 프로이센, 프랑스가 복잡하게 얽힌 소위 ‘7년 전쟁’에서 청춘을 보내고 19세기 초반까지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낸 에스콰이어Esquire,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골선비, 향사鄕士 계급 ‘레드먼드 배리’가 늘그막에 통풍, 손가락 결절, 류머티즘, 요로결석, 간질환, 알코올성 섬망증으로 투병하며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쓴 회고록이 이 책의 98%. 나머지 2%는 회고록을 편집해 출판한 편집자의 첨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은 레드먼드 배리의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회고록답게 전적으로 배리, 나중에 잉글랜드의 왕이 ‘배리 린든’으로 성姓을 이어 쓰는 것을 허락한 이후엔 배리 린든의 주관적 판단과 개인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바라본 세계와 도덕률로 무장하고 있어 책의 앞부분에서 약간 헛갈릴 수도 있지만, 본문의 첫 페이지에서 시작하는 긴 문장 하나를 읽고 나면 단박에 그의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으니, 배리 린슨 씨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문장을 한 번 읽어보기로 하자.


  “나는 천하의 사나이로서, 내 구두나 닦는 하인보다 나을 것이 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높은 혈통을 타고난 척 젠체하는 작자들의 주장을 진심으로 경멸하도록 배워오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이 아일랜드 왕의 후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 동네 수많은 촌뜨기의 떠벌림이나 고작 돼지 한 마리 먹일 정도의 영지가 공국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행태를 전적으로 비웃는 사람이긴 하지만, 진실에 따라 나 역시 우리 가문이 이 섬나라에서, 아니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일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라는 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셋째아들 야벳이 배를 타고 도착해 이룬 민족이란 믿음 또는 미신이 있었던 모양인데, 레드먼드 배리를 비롯한 여러 향사들의 조상들은 심지어 야벳이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어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귀족 가운데 귀족, 왕 중의 왕의 후손이라는 일면 터무니없기도 하고 일면 (잉글랜드의)식민지 향사 떨거지들이 자존심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가문을 주장했던 모양이다. 잉글랜드에서 별 볼일 없던 작자들이 아일랜드로 건너와 원주민들과 여차한 다툼을 벌여 재산권을 주장하면서 법정에 소를 걸기만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원래의 아일랜드 땅주인이 패소를 하는 바람에 섬의 거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사람들의 소유로 넘어간 건 사실이어서 이런 현상이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1920년대까지 계속되어 아일랜드가 낳은 글 좋은 작가 중의 한 명인 '쓸쓸한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 속에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하여튼 레드먼드 배리는, 자신의 선조 시몬 드 배리로 말할 것 같으면 그와 가까운 잉글랜드 군주 리처드 2세를 따라 자신의 조국인 아일랜드를 침략해 먼스터 왕의 아들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 딸과 결혼한 사람으로 이후 조상들이 전쟁, 반역, 허송세월, 사치, 한물간 신앙과 군주를 위한 헛된 옹호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일랜드의 왕관은 자기 머리 위에 얹혔을 것이라고, 주님의 오른 편에 앉기 위해 주의 부름에 응하는 순간까지도 주장하는 인물이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누구나 레드먼드의 정체성을 알아채실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 유럽인일지언정 183 센티미터의 키면 상당한 높이를 자랑했을 터인데, 여기에 생기기까지 온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합해서도 구경하기 쉽지 않은 외모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희롱에 휩싸여 할 수 없이 살게 된 런던의 뒷골목에서 배운 주먹다짐과 총칼을 다루는 솜씨가 절대 두 번째 자리에 만족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몰락한 아일랜드 향사의 아들 레드먼드. 일찍이 형의 재산을 중간에서 싹 물려받아, 연 4백 파운드 밖에 안 되긴 하지만 그 돈으로도 어떻게 해서든지 경주마 일곱 필을 소유했던 ‘포효하는 해리’ 배리 씨의 외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 포효하는 해리 배리 씨는 더블린 최고의 미녀이자 브래디 성의 성주 율리시스 브래디의 따님 벨 양과 야반도주해 도둑결혼을 해치우고 런던에서 왕과 같은 씀씀이로 재산을 최단시간에 거덜을 내고는 드디어 잉글랜드의 군주 조지 2세의 은혜를 받아 팔자가 피려는 바로 그 순간, 운명적으로 운명해버리고 만다. 이래서 잠깐 엄마와 함께 런던 뒷골목에서 험하게 소년시대를 보낸 적이 있다는 얘기.
  더 이상 가난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 벨 배리 여사는 아들을 데리고 고향집 브래디 성에 3년간 머물게 되는데, 모자가 사실상 빈털터리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외숙모와 엄마와의 전투가 격렬해져 열다섯 살에 모자는 독립을 하고, 이제 배꼽 아래에 까슬까슬한 터럭이 돋은 레드먼드는 여덟 살을 더 먹은 사촌누이 노라에게 첫사랑을 느껴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인다. 나이든 여인과 첫사랑이라 황당하다는 게 아니라, 예쁠 것도 없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닌 사철 발 벗은 누이와의 사랑을 위해, 육군 대위 퀸 씨와 결투를 벌이기에 이르기 때문. 책을 통틀어 유일하게 선량하고 지적인 캐릭터인 페이건 대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다섯 살의 레드먼드는 권총 결투에서 드디어 퀸 대위의 목 보호대 바로 아래 가슴에 정확하게 총알을 박아 넣고는 어머니의 거의 모든 현금재산 20기니를 가지고 수도 더블린으로 도망한다.
  열다섯 살의 소년이 거금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몽땅 사기를 당한다. 한 푼도 없이. 이 와중에 온갖 사치를 위해 약속어음을 발행해버리고, 그걸 아이고 어음에 자기 본명으로 서명을 했으니 이제 브래디 성에서의 살인범이 바로 밝혀질 순간이라 어떻게 움치고 뛸 방법이 없나 싶을 찰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잉글랜드 육군에 입대하는 것. 그리하여 열다섯 살의 레드먼드 배리는 잉글랜드 육군 이등병으로 독일로 파견되어 7년 전쟁에 온몸을 부딪게 된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 독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지휘관으로 선하고 지혜로운 페이건 대위가 내정되었다는 점. 그러나 군대는 군대. 어찌 고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천부적인 사기 기질을 발휘해 육군 중위의 신분으로 탈영에 성공해 드디어 네덜란드로 향하는가 했으나,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그리 많아? 도중에 군인 장사꾼들에 잡혀 어이없게도 프로이센 신병으로 재입대하는 불운을 겪는다.
  왜 앞 장면을 이리 다 이야기하는가 하면, 프로이센 사병으로 근무하던 중 생각 외의 인물을 만나 앞으로 유구하게 써먹을 자신의 직업을 정하게 되기 때문인데, 적어도 거기까지는 내용을 소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 후에 책을 진짜 읽어보실 분을 위해, 그리고 출판사를 위해 영업을 좀 하고 싶어서이다. 누구를 만나느냐, 184 센티미터 정도의 화려한 의복과 금줄 두 개로 만든 시계의 주인공, 작은 함 속에 어떤 기밀서류가 들어 있는지 열쇠를 늘 품 속에 넣고 다니는 신사,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의 수도마다 빚쟁이가 있는 화려한 사기꾼이자, 일찍이 버리거나 바꾸지 못한 종교 때문에 동생에게 자신의 모든 상속권을 빼앗긴, 레드먼드 자신의 큰아버지 ‘슈발리에 발리바리’였던 거다. 우리의 레드먼드는 큰아버지 슈발리에 발리바리를 만나면서부터 이후 큰돈을 벌게 하고 자신을 뻔뻔한 사기꾼으로 만들게 하는 위대한 직업인 사기도박꾼의 길로 접어든다. 물론 백부님의 놀라운 기지를 이용해 프로이센 군대에 작별을 고한 다음이기는 하지만.  남은 건 어떻게 ‘배리’가 ‘배리 린든’이 되는가 하는 것과 몰락의 과정. 그건 직접 읽어보시라.
  오래 전에 읽은 새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이 그리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책 읽는 시각이 그리 넓지 않아서 그랬는지 별로 재미없게 읽어서 이번에 새커리를 고를 때는 생각이 좀 많았다. 새커리를 영미문학권에서는 디킨스와 거의 동급으로 친다고 하는데, <허영의 시장>만 읽어보고는 어딜 디킨스에다 대고 비비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가, 이번에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을 읽고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후감 본문에서도 썼듯이 선량하고 지혜로운 젠트리 계급이라고는 페이건 대위 딱 한 명만 등장하고 나머지 모든 인물은 다 속물 아니면 사기꾼, 범죄자들이다. 이 책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으면서 읽는다면 행간에 숨은 역설 또는 해학, 그것도 아니라면 골계의 비틀어진 시큼한 맛을 흠씬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긴 <허영의 시장>에서도 도입부에 가난한 졸업생 레베카에게 졸업선물인 사전dictionary을 주지 않아 교장의 동생이 어렵게 구해 몰래 전해주니까, 마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창밖으로 사정없이 내팽개쳐버리는 쇼킹한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다.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이 비록 19세기 초반, 지금부터 2백 년 전에 쓰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걸 읽고 나서야 영미 소설가들이 왜 새커리를 그리도 자주 인용하는지 조금은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일독을 한 번 해보시려는지, 그건 당신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화자 ‘나’는 몸집이 크지 않고 조밀한 체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체형을 종종 ‘단단하다’고 하듯이 성격과 입맛에 까다롭지 않으며, 위의 크기, 팔 근육, 폐, 콩팥과 췌장, 간, 시력, 복부대동맥, 방광기능 등 모든 신체조건이 정상수치로 어떤 약도 복용하지 않으며, 여행용 비상키트 품목에 생리대를 지워버린 나이지만 호르몬 주사 같은 것도 맞을 필요가 없고, 건강한 이를 가지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석 달에 한 번씩 바리캉으로 밀어버리고 다닌다. 애초에 어딘가 일정기간 머물다보면 금방그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드는 유전자를 갖고 있지 못해 저 아시아 동쪽 끝의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나’같은 사람더러 사주에 일컬어 역마살이 끼었느니 어쨌느니 한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작가 자신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화자일 뿐이라서, ‘나’가 작가처럼 바르샤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지부가 있던 건물에서 전공인 심리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공산주의 정권을 견디지 못한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지금은 결혼해 자식들 낳아 다 독립시키고 뉴욕에서 살고 있기도 하고, 뉴질랜드에서 난데없이 첫사랑으로부터 이 메일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바르샤바 행을 결행하기도 한다. 뉴욕과 뉴질랜드에 사는 장년의 여인이 같은 사람이냐고? 아니. 그러나 폴란드 출생 이민자인 건 같다. 이런 의미에서 화자 ‘나’이기도 하고 작가 토카르추크이기도 하다.
  인간은 정착민인가 유목민인가. 유목민이었다가 농사법을 발견한 이래 정착민으로 진화했다. 농사를 짓고부터 ‘저장’이란 개념이 생겨 ‘무한정 저장’,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개념에 충실하기 위해 이웃들과의 ‘대규모’ 약탈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큰’ 권력이 생겼으며 이리하여 국가가 탄생했던 거 아닌가. 그러니 인간은 정착지향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목, 또는 이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라 수심이 낮아진 아라비아 해를 건너 유럽으로, 아시아의 끝 베링해협을 건너 저 칠레 남부까지 이동한 것이 증거이리라.
  나는 책을 읽으며 난데없이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생각났다. 거기서 한비야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평생 새장 속에서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지,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창공으로 비상할 것인지.”
  한비야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 기회의 불균형과 맞서 싸우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한비야처럼 월드비전에 속해 사는 것이나, 토카르추크의 화자 ‘나’처럼 그냥 길을 떠나 돈이 떨어지면 현지에서 잠깐, 다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여비를 벌기까지 짧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방랑을 하든지 하여튼 길을 떠날 각오를 해야 무엇이든 간에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한비야나 토카르추크의 비상 또는 방랑에 주눅 들지 말자. 정착해서 착실하게 사람의 한 살이를 해내는 것도 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힘들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지어니.
  책의 제목을 <방랑자들>이라 해놓았으니 독자는 당연히 세계각지를 여행하는 내용이리라 생각하겠지만, 정말 재미있던 건, 토카르추크의 방랑은 한 인간의 밖에 있는 공간으로의 세계와 더불어, 인체 내부의 마이크로 공간도 포함한다는 것. 이것을 위하여 작가는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이란 학문을 정의한다. 인간은 방패와 갑옷, 무기로 지어진 존재로 일종의 도시이며, 도시 안의 모든 건축물은 성벽, 방어막, 요새를 갖추어야 하듯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벙커로 세워진 나라라고. 실제로 어떤 객관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인간은 해당 경험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방어기재가 될 수 있는 재료로 사용하는데, 그러기 위해 사실조차도 왜곡시키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존재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대 바야흐로 대홍수가 닥쳐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키기 바로 전에, 우주선을 타고 하느님이 내려와 선택받은 몇 명의 신도들을 데리고 극락왕생, 휴거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약속한 그날 자정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더니 맑은 밤하늘에 별만 총총하게 빛나면서 새벽이 다가오자 몇 시간동안 회의를 하다가, 우리의 선한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멸망을 늦추셨다고 했다는, ‘인지 부조화 이론’ 아닌가.
  이 책에선 실제로 서적 영업을 하는 폴란드 사람 쿠니츠키 씨 가족이 크로아티아의 비스 섬으로 여름휴가를 갖다가, 아내와 세 살 난 아들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온갖 생체실험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발견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동안 처자식을 찾기 위해 크로아티아 당국에선 헬리콥터를 동원해 비스 섬을 샅샅이 뒤지는 난리를 겪었는데 사흘 후, 아내와 아들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났으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남편이자 아빠 마음에 당연히, 아내를 닦달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그래서 밝혀낸 사실. 정말로 외계인에게 납치됐었느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내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하여튼 심리학자이기도 한 토카르추크가 인간 내면, 영적 내면 말고 진짜 육신의 내면에 관심을 쏟은 건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여간 모든 인지부조화를 겪고도 인간은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궁리해왔다. 기형인의 기형부위와 심지어 천재의 뇌, 쇼팽의 심장까지 인간들은 보존을 해서 두고두고 봐야 했는데, 이젠 ‘프라스티네이션’이란 최첨단 방식으로 신경줄기 하나, 세밀한 모세혈관까지 보관, 전시할 수 있을 수준이라고 하는데, 토카르추크는 참으로 집요하게 해부학과 보존의 역사를 정리해놓기도 했다. 이를 나는 인체 내부로의 방랑이라 하고 싶다. 세계 각지로 떠나는 방랑이 나중에 해부학적 내부 탐색과 조화를 이르는 건 물론이다.
  무수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제목을 ‘방랑자들’이라고 복수형을 선택했을 것. 모든 출연진들의 방랑, 여행길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촘촘하게 박아 넣어 6백 쪽에 이르는 한 권의 장편소설을 만들었다. 길 떠난 이야기, 그들은 서로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세 가지 있단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어디서 왔나요? 어디로 갈 거지요? 그러나 모든 순례자들의 목적은 다른 순례자란다. 길을 떠나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사람을 향한다는 의미. 사는 게 다 그렇다.



  * 민음사. 참 나. 책에는 모두 13장의 지도가 실려 있다. 본문이 끝나면 색인에 각 지도가 어떤 지도인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색인에 표시된 페이지를 열면, 어이없게도, 단 한 장의 지도도 발견할 수 없다. 책 교정하고나서, 당연히 지도가 실린 페이지가 바뀌었을 텐데 그걸 교정하지 않고 그냥 찍은 거다. 얘네, 책은 발가락으로 만드나보다. 욕을 다 먹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멀었어. 민음사 편집부 직원 두 명이 등장해서 <방랑자들> 어땠어? 좋지? 좋지? 아 좋아, 좋아, 하면서 광고 비슷하게도 찍은 거 같은데, 책이나 좀 잘 만들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10-3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도 ㅋㅋㅋㅋ ㅋ 제 책만 파본인가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0-30 13:45   좋아요 0 | URL
진짜 요새 민음사 책 만드는 거, 고고 마운틴, 갈수록 태산입니다. ㅋㅋㅋㅋㅋ
개전의 정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