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대산세계문학총서 161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 신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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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중반에 태어나 영국, 프로이센, 프랑스가 복잡하게 얽힌 소위 ‘7년 전쟁’에서 청춘을 보내고 19세기 초반까지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낸 에스콰이어Esquire,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골선비, 향사鄕士 계급 ‘레드먼드 배리’가 늘그막에 통풍, 손가락 결절, 류머티즘, 요로결석, 간질환, 알코올성 섬망증으로 투병하며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쓴 회고록이 이 책의 98%. 나머지 2%는 회고록을 편집해 출판한 편집자의 첨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은 레드먼드 배리의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회고록답게 전적으로 배리, 나중에 잉글랜드의 왕이 ‘배리 린든’으로 성姓을 이어 쓰는 것을 허락한 이후엔 배리 린든의 주관적 판단과 개인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바라본 세계와 도덕률로 무장하고 있어 책의 앞부분에서 약간 헛갈릴 수도 있지만, 본문의 첫 페이지에서 시작하는 긴 문장 하나를 읽고 나면 단박에 그의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으니, 배리 린슨 씨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문장을 한 번 읽어보기로 하자.


  “나는 천하의 사나이로서, 내 구두나 닦는 하인보다 나을 것이 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높은 혈통을 타고난 척 젠체하는 작자들의 주장을 진심으로 경멸하도록 배워오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이 아일랜드 왕의 후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 동네 수많은 촌뜨기의 떠벌림이나 고작 돼지 한 마리 먹일 정도의 영지가 공국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행태를 전적으로 비웃는 사람이긴 하지만, 진실에 따라 나 역시 우리 가문이 이 섬나라에서, 아니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일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라는 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셋째아들 야벳이 배를 타고 도착해 이룬 민족이란 믿음 또는 미신이 있었던 모양인데, 레드먼드 배리를 비롯한 여러 향사들의 조상들은 심지어 야벳이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어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귀족 가운데 귀족, 왕 중의 왕의 후손이라는 일면 터무니없기도 하고 일면 (잉글랜드의)식민지 향사 떨거지들이 자존심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가문을 주장했던 모양이다. 잉글랜드에서 별 볼일 없던 작자들이 아일랜드로 건너와 원주민들과 여차한 다툼을 벌여 재산권을 주장하면서 법정에 소를 걸기만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원래의 아일랜드 땅주인이 패소를 하는 바람에 섬의 거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사람들의 소유로 넘어간 건 사실이어서 이런 현상이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1920년대까지 계속되어 아일랜드가 낳은 글 좋은 작가 중의 한 명인 '쓸쓸한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 속에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하여튼 레드먼드 배리는, 자신의 선조 시몬 드 배리로 말할 것 같으면 그와 가까운 잉글랜드 군주 리처드 2세를 따라 자신의 조국인 아일랜드를 침략해 먼스터 왕의 아들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 딸과 결혼한 사람으로 이후 조상들이 전쟁, 반역, 허송세월, 사치, 한물간 신앙과 군주를 위한 헛된 옹호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일랜드의 왕관은 자기 머리 위에 얹혔을 것이라고, 주님의 오른 편에 앉기 위해 주의 부름에 응하는 순간까지도 주장하는 인물이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누구나 레드먼드의 정체성을 알아채실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 유럽인일지언정 183 센티미터의 키면 상당한 높이를 자랑했을 터인데, 여기에 생기기까지 온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합해서도 구경하기 쉽지 않은 외모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희롱에 휩싸여 할 수 없이 살게 된 런던의 뒷골목에서 배운 주먹다짐과 총칼을 다루는 솜씨가 절대 두 번째 자리에 만족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몰락한 아일랜드 향사의 아들 레드먼드. 일찍이 형의 재산을 중간에서 싹 물려받아, 연 4백 파운드 밖에 안 되긴 하지만 그 돈으로도 어떻게 해서든지 경주마 일곱 필을 소유했던 ‘포효하는 해리’ 배리 씨의 외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 포효하는 해리 배리 씨는 더블린 최고의 미녀이자 브래디 성의 성주 율리시스 브래디의 따님 벨 양과 야반도주해 도둑결혼을 해치우고 런던에서 왕과 같은 씀씀이로 재산을 최단시간에 거덜을 내고는 드디어 잉글랜드의 군주 조지 2세의 은혜를 받아 팔자가 피려는 바로 그 순간, 운명적으로 운명해버리고 만다. 이래서 잠깐 엄마와 함께 런던 뒷골목에서 험하게 소년시대를 보낸 적이 있다는 얘기.
  더 이상 가난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 벨 배리 여사는 아들을 데리고 고향집 브래디 성에 3년간 머물게 되는데, 모자가 사실상 빈털터리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외숙모와 엄마와의 전투가 격렬해져 열다섯 살에 모자는 독립을 하고, 이제 배꼽 아래에 까슬까슬한 터럭이 돋은 레드먼드는 여덟 살을 더 먹은 사촌누이 노라에게 첫사랑을 느껴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인다. 나이든 여인과 첫사랑이라 황당하다는 게 아니라, 예쁠 것도 없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닌 사철 발 벗은 누이와의 사랑을 위해, 육군 대위 퀸 씨와 결투를 벌이기에 이르기 때문. 책을 통틀어 유일하게 선량하고 지적인 캐릭터인 페이건 대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다섯 살의 레드먼드는 권총 결투에서 드디어 퀸 대위의 목 보호대 바로 아래 가슴에 정확하게 총알을 박아 넣고는 어머니의 거의 모든 현금재산 20기니를 가지고 수도 더블린으로 도망한다.
  열다섯 살의 소년이 거금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몽땅 사기를 당한다. 한 푼도 없이. 이 와중에 온갖 사치를 위해 약속어음을 발행해버리고, 그걸 아이고 어음에 자기 본명으로 서명을 했으니 이제 브래디 성에서의 살인범이 바로 밝혀질 순간이라 어떻게 움치고 뛸 방법이 없나 싶을 찰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잉글랜드 육군에 입대하는 것. 그리하여 열다섯 살의 레드먼드 배리는 잉글랜드 육군 이등병으로 독일로 파견되어 7년 전쟁에 온몸을 부딪게 된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 독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지휘관으로 선하고 지혜로운 페이건 대위가 내정되었다는 점. 그러나 군대는 군대. 어찌 고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천부적인 사기 기질을 발휘해 육군 중위의 신분으로 탈영에 성공해 드디어 네덜란드로 향하는가 했으나,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그리 많아? 도중에 군인 장사꾼들에 잡혀 어이없게도 프로이센 신병으로 재입대하는 불운을 겪는다.
  왜 앞 장면을 이리 다 이야기하는가 하면, 프로이센 사병으로 근무하던 중 생각 외의 인물을 만나 앞으로 유구하게 써먹을 자신의 직업을 정하게 되기 때문인데, 적어도 거기까지는 내용을 소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 후에 책을 진짜 읽어보실 분을 위해, 그리고 출판사를 위해 영업을 좀 하고 싶어서이다. 누구를 만나느냐, 184 센티미터 정도의 화려한 의복과 금줄 두 개로 만든 시계의 주인공, 작은 함 속에 어떤 기밀서류가 들어 있는지 열쇠를 늘 품 속에 넣고 다니는 신사,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의 수도마다 빚쟁이가 있는 화려한 사기꾼이자, 일찍이 버리거나 바꾸지 못한 종교 때문에 동생에게 자신의 모든 상속권을 빼앗긴, 레드먼드 자신의 큰아버지 ‘슈발리에 발리바리’였던 거다. 우리의 레드먼드는 큰아버지 슈발리에 발리바리를 만나면서부터 이후 큰돈을 벌게 하고 자신을 뻔뻔한 사기꾼으로 만들게 하는 위대한 직업인 사기도박꾼의 길로 접어든다. 물론 백부님의 놀라운 기지를 이용해 프로이센 군대에 작별을 고한 다음이기는 하지만.  남은 건 어떻게 ‘배리’가 ‘배리 린든’이 되는가 하는 것과 몰락의 과정. 그건 직접 읽어보시라.
  오래 전에 읽은 새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이 그리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책 읽는 시각이 그리 넓지 않아서 그랬는지 별로 재미없게 읽어서 이번에 새커리를 고를 때는 생각이 좀 많았다. 새커리를 영미문학권에서는 디킨스와 거의 동급으로 친다고 하는데, <허영의 시장>만 읽어보고는 어딜 디킨스에다 대고 비비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가, 이번에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을 읽고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후감 본문에서도 썼듯이 선량하고 지혜로운 젠트리 계급이라고는 페이건 대위 딱 한 명만 등장하고 나머지 모든 인물은 다 속물 아니면 사기꾼, 범죄자들이다. 이 책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으면서 읽는다면 행간에 숨은 역설 또는 해학, 그것도 아니라면 골계의 비틀어진 시큼한 맛을 흠씬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긴 <허영의 시장>에서도 도입부에 가난한 졸업생 레베카에게 졸업선물인 사전dictionary을 주지 않아 교장의 동생이 어렵게 구해 몰래 전해주니까, 마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창밖으로 사정없이 내팽개쳐버리는 쇼킹한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다.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이 비록 19세기 초반, 지금부터 2백 년 전에 쓰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걸 읽고 나서야 영미 소설가들이 왜 새커리를 그리도 자주 인용하는지 조금은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일독을 한 번 해보시려는지, 그건 당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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