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판소리 전집 서문문고 100
신재효 지음 / 서문당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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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효, 라고 하면 꽤 오래 전 인물인 줄 알겠지만 사실 1812년생.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와 같은 나이다. 어머니가 당시 나이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마흔이 넘어 치성을 드리고서야 얻은 외아들이었으나 효성 지극할뿐더러 이재에도 밝아 전라북도 고창현의 아전노릇을 하며 착실하게 부를 쌓아 천석꾼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개항을 한 1876년 병자년의 대흉년을 맞아 도처에서 백성들이 세상에 나오지 말고 태중에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적지 않은 재산을 털어 이들을 구휼했으며, 또한 상당한 재물을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으로 희사하여 통정대부라는 명예직을 얻기도 했으니, 1894년 인근 정읍 이평의 고부에서 시작한 동학혁명 와중에도 자손들의 일신은 물론이요 가세 역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터. 신재효는 평생 판소리를 즐겨 듣고, 하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하며 현재의 우리가 기념하는 신재효의 업적 역시 당시 불린 열두 마당의 판소리 가운데 여섯 마당을 개작해 보존한 일이다. 《한국판소리전집》은 그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박타령>, <적벽가>, <변강쇠가> 여섯 마당 모두를 한 책에 모아놓은 결과물이다.
  <춘향가>와 <적벽가>, <변강쇠가>는 “성두본星斗本 B”, <심청가>, <토별가>는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 <박타령>은 “성두본星斗本 A” 임을 밝혀 각기 다른 세 가지 판본에서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춘향가>는 민음사에서 출간한 <춘향가>와 조금 다르고, <박타령>엔 판소리 <흥보가>에서 놀부가 흥보네 집에서 화초장을 얻어 걸머지고 집에 돌아가는, 화초장, 화초장, 장화초, 초장화. 된장, 간장, 고추장, ‘화초장’의 이름을 헛갈려 애를 먹는 코믹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흥보의 큰 아들이 샅을 긁적이면서, ‘부랄 밑이 근지러우니 장가보내주오!’ 하는 장면도 발견할 수 없으며, <변강쇠가>에서도 ‘멀리 보면 도끼 팬 자국이오, 가까이 보면 썩은 말눈깔이로다.’는 대사도 나오지 않는다. 민음사에서 읽은 <춘향가>에 없는 대사도 많이 나오는데, 이 책, 정병욱, 김삼불, 김동욱의 대를 이어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의 명맥을 이어 온 강한영 전 교수가 선택한 이 판본은 다른 책들보다 더 읽는 맛이 난다고 해야 마땅하다.
  편자 강한영은 책머리의 해설에서 “‘판소리’와 ‘판소리 사설’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광대의 소리와 너름새 그리고 아니리가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극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판소리’라면, ‘판소리 사설’은 정선된 시어로서 분명하고 완연하게 한 마당을 구성하는 희곡적 문예작품이다. 즉, 판소리는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는 극적 양식이요, 판소리 사설은 가사로 씌어지는 희곡적 양식이다. 따라서 판소리 사설은 우리의 고유 전통적인 문학의 한 양식이며, 음악적 전제의 제약을 필연적으로 가지는 형식상의 특성을 지닌다.”라고 설명했다. 즉 이 책 《한국판소리전집》은 우리 고유의 전통적 문학의 한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판소리 자체의 대사, 리브레토의 한 종류로 기능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판소리 사설들을 읽어보면, 19세기 조선의 전형적인 중인계급의 문예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중국의 역사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영웅, 미녀, 시인, 문장가, 황족, 시조들로부터 만들어진 숱한 시어들과 전래되는 이야기가 무수하게 등장하니 아무리 19세기라 한들 소위 ‘진서’라고는 고무래 정丁자도 모르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즐기기는 힘들 터이었으되, 전편을 깔고 가는 해학과 진솔한 유머는 또 저 위의 진짜배기 양반들이 차마 들어주기 힘든 웃음, 거의 폭소 코드가 깔려 있으니 이 두 가지를 마음 놓고 흠향하며 싱긋 웃을 수 있었던 계급은 신재효 자신이 속했던 중인 계급 아니었을까.
  처음에 <춘향가>를 읽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하건데, 애초부터 그냥 이야기를 읽는 방식으로 아무 감흥 없이 읽기 시작했으나, 나도 모르는 순간, 그저 일상적인 책 읽는 습관이 저절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읽을 때 흔히 그러듯이, 문장을 3.3.4.4. 또는 4.4.4.4. 이렇게 저절로 띄어 읽기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춘향이 이도령을 옥문獄門을 사이에 두고 만나 하는 말이,
  “와 계신가, 와 계신가. 우리 낭군 와 계신가. 더디었네 더디었네, 어찌 그리 더디었나. 그새에 부모님은 기체 안녕하옵시며, 서방님 천리 행차 평안히 오시니까. 어찌하여 그 문필에 급제를 못 하신가. 입은 복색 꾸민 맵시 남 보기는 과객이나, 하는 말씀 뵈는 기운 내 짐작은 의심일세. 수가須賈를 속이려고 범저范雎 옷을 입었으나 소진의 처 내 아니니 불하기不下機를 하겠는가. (중략) 그새 그리 적조積阻키는 동방화촉 신정 만나 금슬종고琴瑟鐘鼓 즐기느라 나를 아주 잊었던가.”각주
  위의 인용을 산문 읽는 식으로 읽는 것하고, 속으로 운율을 먹여 4.4.4.4 / 4.4.4.4 이런 식으로 읽는 것 사이엔 차이가 많다. 이렇게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이 딱, 다가오면,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 어느 하나 빼지 않고 다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도 노골적인 장면과 단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난데없이 폭소를 터뜨리는 때가 올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마 이 곳에 인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사용하니, 지금부터 2백 년 전에는 그런 단어가 지금처럼 금지어禁止語 비슷하지 않아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사설들에 비해서 그중 소프트한 <토별가>의 한 장면을 보면, 별주부가 토간을 얻기 위해 뭍으로 긴 항해를 떠나기에 앞서 이종사촌 고둥, 내종사촌 소라, 진외척숙 우렁이, 육지사는 사돈 달팽이들과 이별의 말을 주고받는데 난데없이 해구, 물개란 놈이 와서 친척을 칭하니 별주부 묻기를, “우리 집 내외척이 다 내력이 있느니라. 고둥, 소라, 우렁이들이 내 목과 같아여서 들락날락 하는 고로 촌수가 있거니와, 네가 어찌 척분 있노.” 해구, 물개란 놈을 이야기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래 최고의 양기보양제인 해구신을 들 수 있을 터, 이 놈 웃으며 대답하기를,
  “ 내 X지도 네 목같이 서면 들어가고 앉으면 나오기로 주부에게 척숙되제.”
  나는 실제로 공연하는 판소리 다섯 편 가운데 <적벽가>를 제일 좋아했다. 소리 자체가 웅혼한 동편제의 목청으로 장대한 명판을 만드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사실 공연을 관람하거나 음반으로 듣는 판소리에서는 복잡다기한 가사가 주는 매력을 십분 즐길 수는 없는 일. 이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에서 두 번 벌어지는 중국역사 3대 대전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그리면서도 역시 하도 웃어 배가 아플 정도의 지독한 농이 섞여 있음에, 과하게 우스워 이 하찮은 독후감에도 옮겨 적지 못할 정도이다. 놀랍지? 조조, 정욱, 장요, 서황, 허저, 손권, 주유, 황개, 한당, 주태, 장흠,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이 총 출동하는 웅혼한 영웅담 속에 그렇게도 심한 저잣거리의 웃음코드를 심어 놓았다는 것이. 그게 무엇인지는 절대 가르쳐 드리지 않겠다. 뜻이 있으면 책값도 저렴하니 (5천원이 안 된다.) 직접 사 읽어보시라. 당신이 약간의 한자어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훨씬 좋을 수 있을 텐데 뭐 아니어도 상관 없다.




 

* 참고 참았지만, 판소리 사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재미있는 (사실은 야한) 사설 몇 마디 더 올리지 않는 건, 우리 판소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고, 위에 해구 즉 물개가 한 얘기도 있고 해서, 아래와 같은 것이 무엇일꼬, 하는 퀴즈를 드리는 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냐 꾸짖지 마시기만 바라오며..... 이런 글 올리면 서재 친구들 투두둑, 이제 너하고 친구 안 해, 하는 게 일상이지만서도.



  "이상히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파이었다. 콩밭 팥밭 지났던지 돔부꽃이 비치었다. 도끼날을 맞았던지 금 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 옥답인지 물이 항상 괴어 있다. 무슨 말을 하려관대 옴질옴질하고 있노. 천리행룡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하다. 만경창파 조갤는지 혀를 삐쭘 빼었으며, 임실 곶감 먹었던지 곶감 씨가 장물이요, 만첩산중 으름인지 제라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을 먹었던지 닭의 벼슬 비치었다. 파명당을 하였던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장은 걱정없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사령 서려는지 쌍 걸낭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 군뢰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 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꼬. 성정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굼기(구멍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없네."

 

 

각주. 춘향과 이도령이 옥문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대사를 보면, 이도령이 한양으로 올라가자마자 참판댁 영애와 정식 혼인한 사실을 춘향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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