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멜랑콜리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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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만 520쪽의 장편소설. 헝가리의 한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트로이 목마 사건. 이렇게 간단하게 적어놓으니 만만하게 생각하실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마음으로 책을 넘기면 곧바로 코피 터진다. 첫 문장을 옮겨볼까?


 “티서강 제방에서부터 저 멀리 카르파티아산맥 발치까지 뻗어 있는, 남쪽 저지대의 얼음에 뒤덮인 단지들을 연결하는 여객 열차는 불행하게 제 발부리에 자꾸 걸리는 철도원의 애매한 해명이나 불안스레 기차역에서 가다 서다 허둥거리는 역장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올 생각을 안했기에(‘그것 참, 연기처럼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나…….’ 철도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 이런 ‘비상’용으로 건사하고 있던, 오로지 두 대로 이뤄진 나무의자 객차를, 한물가고 영 시답잖은, 진짜 마지막 방책으로만 사용되는 424 기관차와 맞걸어 운행에 들어갔다.” (11쪽)


 이렇게 시작되는 1부 ‘도입:이례적인 상황들’은 107쪽에 가서 끝나는데, 도입부 본문 97쪽이 딱 두 문단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긴 문단으로 된 장편소설은 본문 490쪽이 단 두 문단으로 되어 있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 이후 처음 읽었다. 베른하르트의 <소멸>은 우리가 늘 읽는 보통의 문장들로 되어 있는 반면, 변두리 유럽의 작가라 이름을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의 문장은 길고 길다. 이렇게 긴 문장 안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쉼표 뒤엔, 예의 상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정말로 한 번 쉬고 읽지 않으면 문장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나도 책 좀 읽는다, 라고 자만하며 사는 인간 종족 가운데 한 명이긴 하다. 그런데도, 읽다가 무려 첫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 같은 문장을 서너 번 읽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중간쯤에선 읽고 있는 문장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습관적으로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는 일도 많이 발생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 크러스너호르커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 또는 의미의 20퍼센트나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읽는 독자도 그랬거늘, 원작을 한글로 고쳐 쓴 역자는 어땠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다. 어순이 다른 언어로 만든 긴 문장과 그 속의 쉼표의 순서 같은 건 어떻게 처리했을까. 독자는 이런 거에 신경 쓰지 않을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다시 위에서 인용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한겨울이라 얼음에 덮인 도시(團地)들을 연결해주는 열차가 무한정 연착이 되는 걸 보다 못한 역장이, 기어이 나무의자 객차 두 량으로 구성한 비상열차를 하나 배정해 운행을 하기로 결정해, 친척을 만나러 왔던 교양 있는 중산층 플라우프 부인을, 앞으로 사건이 벌어질 소도시로 이동시킨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임시 열차 안에서 마늘 소시지와 싸구려 담배와 독한 과일 브랜디 팔린카를 마시고 신트림을 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객실에서 가난하고 무식하고 염치없는 하층민들과 섞여 고생스러운 여행을 마친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안락하고 잘 꾸며놓고 먼지 하나 없어 음식물이 바닥에 떨어져도 그냥 집어 먹으면 될 것 같은 청결한 나의 집. 남편이 두 번 죽어 이젠 슬하에 먼저 남편이 낳은 아들 ‘벌루시커’ 하나만 남아 있는데, 알코올 중독 수준의 술주정뱅이라 집안에서 내쫓아버리고 지금은 혼자 산다. 아들 벌루시커는 지역 우체국에서 신문배달을 해 근근이 먹고 살며 은퇴한 지휘자 에스테르 선생의 수발을 들어주고 있다.
 1부 ‘도입’ 두 번째 문단의 주인공은 에스테르 선생이 몇 십 년을 참고 살다가 은퇴와 더불어 졸혼을 선언하는 바람에 집에서 내쫓긴 에스테르 여사. 벌써 쉰 살이 넘었으나 큰 키에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소도시의 경찰서장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아직도 하루에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할 수 있는 신기의 테크닉을 보유한 여인.
 그런데, 앞으로 소설을 만들어나가는 요소를 소개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도입’에서 이 여성들이 앞으로도 주연급으로 등장은 하겠지만, 뭐 중요한 조연급일 수도 있고 하여튼, ‘도입’이라는 면에서 나이든 여인들 보다는, 기상관측 이래 이례적으로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이번 겨울에 수십 년간 멈추었던 교회 시계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고, 유랑 서커스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고래를 보여주겠다면서 고래를 거대한 차량에 싣고 도시에 들어오는 일이다. 실제로 가장 큰 고래라고 하는 수염고래는 길이가 30미터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거대한 수중동물을 어떻게 내륙지방까지 운송할 수 있는지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책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초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그럼 인간을 포함한 특이한 생명체를 구경거리로 돈을 벌던 시기는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터무니없이 고래라니. 안 돌던 시계가 갑자기 돌기 시작하는 찰나에. 이건 혹시 작품을 쓰던 1989년, 소비에트가 서서히 무너지던 동구권에 갑자기 쳐들어온 시대의 전기, 트로이 목마 아냐? 실제로 이 서커스단을 책 속에서 트로이 목마에 딱 한 번 비유한다. 그런데 또 문득 든 생각이, 책을 간행한 해가 1989년이면 정말로 책을 쓴 시기는 아직 냉전시기의 헝가리였을 터. 그럼 가장 큰 고래를 광고하며 도시에 들어온 서커스단은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작가가 카프카다. 측량기사 혹은 은행원 K에게 닥치는 운명 또는 필연을 만드는 체제. 그런 체제가 사회와 시민을 질식시키는 기압골 같은 것. 작은 도시가 고래와 서커스 열풍 속에서 갑자기 폭동이 벌어지고 이어서 군대가 진입해 새로운 질서를 잡는 모습을 읽으며 카프카를 떠올리면 안 될까? 본문에 들어가 첫 문단이 나오면 주인공이 은퇴한 음악가 에스테르 씨가 되는데, 그가 자신을 챙겨주는 벌루시커에 연관해 “‘타고난 성향으로 뭉친’ 지역사회는 벌루시커를 단순한 백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그로서는(그도 이런 면모를 벌루시커가 개인적인 끼니와 전반적인 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자신의 투명한 은하계의 고속도로를 거니는, 딱 봐도 제정신 아닌 이 방랑자가, 타락이라고는 모르고, 쑥스럽긴 해도 보편적인 영혼의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어, 실로 ‘현 시대를 상당히 갉아먹고 있는 퇴폐의 힘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의심하지 않았다.”(179쪽)고 여기기는 하지만, (이거 스포일러 아닌가 몰라?) 거의 유로지뷔 수준인 벌루시커가 기어이 불행한 결말에 빠지고야 마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다는 말씀.
 하여간 헝가리의 이름 없는 작은 도시는 군대가 진주해, “그들이 처박힌 착각의 냄새나는 진구렁에서 끌어내 법, 질서, 명확한 사고의 고귀한 대의명분 속에서 어느 정도 현실감각을 도로 함양”시키며(478쪽), 현재해 있던 구식 고귀함을 장사지내는 것으로 마감한다. 법과 질서, 명확한 사고를 요구하는 군대라니.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책을 읽고 그 속에 든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아니, 이해하고, 말고 전부 독자의 몫이다. 고백했거니와 나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비의를 거의 눈치 채지 못한 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가. 나는 내 식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읽었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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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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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겨울, 한길사에서 간행한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한국어 번역본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출판사가 일단 1권을 찍어 시장에 내놓았더니, 적절한 마케팅에다가 제목도 자극적이어서 그러했는지 너도 나도 <나의 투쟁>을 읽기 시작했으며 줄줄이 갈채와 상찬이 터져 나왔다. 이런 책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 내가 아직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읽지 않은 이유와 같다. <채식주의자>와는 달리 1년 만에 <나의 투쟁>에 관한 호들갑은 잠잠해진 거 같다. 드디어 책을 읽어볼 때가 됐다. 마침 중고책 가게에서 거의 새 책을 칠천 원에 팔기에 주저하지 않고 집어 들었다.
 글쎄. 문학이라고는 한 학기도 공부해보지 않은 내가 이리 유명한 책에 관해 뭐라 섣불리 평할 자격은 없지만, 그것도 분명하게 없는데, 그래서 다만 한 마디 하자면, 나하고는 맞지 않는 책이란 것. 2부로 된 1권의 분량만 667쪽. 이게 끝이 아니라 비슷한 분량의 책이 6권까지 가고 2019년 5월 현재 딱 절반인 3권까지 번역해 나왔다. 그러니 완독을 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가닥도 잡히지 않는다. 어차피 읽다가 중도무이 될 터라면 1권 2부까지 지루한 책을 다 읽을 필요도 없다. 내 셈법에서는 그랬다. 그래 1권 1부까지만 읽고 덮었다. 방금 전에.
 내놓고 자전 소설이다. 주인공 이름이 작가와 같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이제 내일 모레가 마흔 살이 될 작가가 그의 소년시절부터 기억나는 대로 써 놓았다.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정말 객관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옮겼다고 짐작은 마시라. 원래 기억이라는 건 기억하는 사람이 임의대로 재편, 연출해 남은 것들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니. 그래서 소위 ‘자전소설’이야말로 거짓말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소설을 말한다. 그걸 심리학 용어로 인지부조화라 이야기해도 좋다.
 크나우스고르는 이 책을 쓰면서 등장인물 대부분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기괴한 일을 저질렀다.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나면 자전소설의 경우에 실명을 쓰는 것이 통용될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일반적으로 기괴하지 않을까? 물론 원고를 등장인물에 보내 실명을 사용할 것임을 통보하고, 수용하지 못할 경우엔 가명을 쓰겠다고 고지를 해서 두 명의 이름만 가명으로 적었다고 하니 할 말은 없는데, 나 같으면 절대로 실명을 사용하는데 동의해주지 않을 거 같다. 이런 책 뒤의 이야기를 감안하더라도 책에 들어 있는 사건, 사고, 행위들이 전부 객관적 사실이라고 오해하지 않는다.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당시 있었던 일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회의와 토론을 해서 내린 결론일지라도 결론이 정확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 터인데 심지어 작가 혼자의 과거 회상에 의한 기록을 어떻게.
 책이 시작할 때 책 속 자기 아버지보다 일곱 살을 더 먹어서 서른아홉 살이 된 노르웨이 사람 크나우스고르는 나이 어른 세 아이를 키우며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살고 있다.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소리 지르고, 주변을 어지럽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면서 한 시도 빼지 않고 작가의 시선 속에 들어있기를 요구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성격의 작가는 슈퍼마켓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지르는 아이한테 달려가 양 어깨를 꽉 쥔 채로 고함과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함께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앞뒤로 흔들고 있다. 그림이 그려지시지? 스웨덴을 비롯한 선진국이란 나라의 공통점은, 부부가 함께 돈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다는 데 있는 법이니까, 아빠가 아이 셋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는 장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터. 하지만 턱수염이 덥수룩한 늙은 아빠가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거칠게 흔들면서 함께 악을 쓰는 모습은 아무리 스웨덴이 북구의 야만인들이 살던 땅이라 하더라도 좀 그렇기는 하겠지. 원래 아이를 볼래, 여름 땡볕 아래서 파밭을 맬래, 하면 백이면 백 다 파밭을 맨다고 할 만큼 아이 보는 일이 어렵기는 한 거지만. 그래 작가이자 주인공 크나우스고르는 책에서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나의 투쟁”이라고 단정하는 게 바로 아이 셋을 돌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강 한 60쪽 까지를 말하는 건데, 아 작가가 나의 투쟁이라고 하는 건 살면서 누구나 부대껴야 하는 여러 난관들을 칭하는 거구나, 라고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삶이라고 하는 건 투쟁의 연속.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형제, 자매간 부모의 사랑을 두고 투쟁을 시작해서 세상의 모든 절차를 밟아나갈 때 한 번도 빠짐없이 쉽지 않은 매듭을 지어야 하니까.
 작가가 이렇게 말했단다.
 “누군가가 『나의 투쟁』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지루하고 재미없게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선 그 어떤 타협이나 절충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은 바로 그러한 내 뜻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671쪽)
 1권의 1부까지만 읽었다는 건 앞에서 썼다. 1부 중간쯤 읽을 때, 지루해서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가 1부 마지막 부근에 가니까 읽을 만해지기는 했다. 그럼에도 중도에 멈춘 건, 마저 읽으나마나 어차피 완독을 할 수 없는 작품을 뭐 한다고 읽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종 6권이 나와 그 책을 읽을 때면 1부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 것임을 내가 알기에. 아울러 내겐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쪽이었음을 기어이 고백하고 독후감을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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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2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책이었는데, 아예 시도를 하지 않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제목이 참... 자극적이네요.

Falstaff 2019-05-22 10:27   좋아요 0 | URL
제목 때문에 뻑 가서 주머니 턴 독자도 아마 꽤 될 겁니다. ^^
 
눈물의 아이들 1
에이브러햄 버기즈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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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버기즈가 에티오피아에서 인도인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 스스로는 에티오피아가 고향이라고 여기지만 현지인들은 외국인으로 대했던 부류. 인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는 첸나이(과거 이름이 ‘마드라스’) 소재 마드라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 스탠퍼드 의과대학 종신교수로 있단다. 작가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출판사의 책 소개 내용을 보면, “광활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자연과 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운명의 광기에 맞서는 한 가족의 대 서사시”라고 했다. 즉 책의 주된 내용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한 인도인 가족의 서사이고, 아프리카의 자연과 에티오피아의 굴곡진 현대사는 그냥 배경으로 존재한다. 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와 맞서지 않는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답게 에디오피아에 사는 주인공의 가족을 포함한 외국인 중에서는 악역도 만들지 않았다. 주인공 메리언 스톤이 사는 곳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언덕 위에 선교목적으로 세운 ‘미싱’이란 이름의 병원. 나중에 특별한 오해를 받아 메리언이 에티오피아를 탈출해야 했던 때를 제외하고 주인공의 가족들은 언제나 집권층의 아내, 누이의 출산을 돕거나 충수염을 수술해주는 덕에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는다. 1권 초반에 예멘의 아덴으로 가는 배에서 거의 죽어가는 의사 토머스 스톤을 해먹에 누임으로 해서 폭풍우로 배가 아무리 출렁여도 수평을 유지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 특별한 ‘미싱’ 병원의 구성원들이 험난한 격랑에 휩쓸린 에티오피아의 피에 젖은 현대사 안에서도 지오이드 선과 언제나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해먹에 놓인 상태 정도로 이해했다. 일단 외국인이고,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그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살펴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이며, 에티오피아 안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이익도 추구하려 하지 않는 집단을, 아무리 철면피 흡혈 독재 정권이라 한들 괴롭힐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러니 분명히 하자. 이 책에선 정치적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지만, 책을 선택할 때 정치적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위에서 토머스 스톤이란 의사 이야기를 했다. 토머스로 말하자면 인도에 사는 영국인 가정의 외아들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외과의가 되어 다시 인도로 왔다가, 인도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떠나야 했던 이. 거의 천재 수준의 외골수로 오직 일 하나에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단정하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 가운데 잘 풀린 몇 명의 지시를 받으며 밥을 벌어먹는다.) 일벌레 스타일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미싱병원에서 일하기로 하고 떠나는 배 안에서 인도 출생으로 맨발의 카르멜회 출신 간호사 수녀 두 명과 동승하면서 사달이 벌어진다. 극심한 뱃멀미와 열병으로 황천길을 앞에 둔 처지에 떨어지는 것. 이때 간호사 메리 조지프 프레이저 수녀가 엉망이 된 토머스를 극진히 간병해 살려내면서 둘의 유대가 깊어진다. 그 후 토머스 스톤은 예정대로 미싱병원으로 출발했으나 메리 수녀에겐 아덴에서 큰 불행이 닥쳐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아프리카 대륙에 오직 한 명 있는 아는 얼굴을 찾아 아디스아바바의 미싱병원을 찾아오기에 이른다. 아, 너무 길게 쓰고 있다. 근데 책이 그렇다. 실패에서 실꾸리가 풀리듯 술술 풀려나오는 이야기가 얼마나 능청맞게 잘 들어맞는지 도무지 큰 줄거리를 뚝뚝 끊어 소개하기가 힘들 지경. 어쨌든 다리 사이에 몇 줄기 피를 흘리며 미싱병원의 원장 수녀 앞에 서게 된 메리 조지프 프레이저 수녀는 기꺼이 받아들여져 일벌레, 수술벌레, 신기의 손놀림을 가진 외과의 리처드 스톤 선생과 환상의 수술 커플을 이룬다. 메리 수녀가 아무리 하느님의 신부bride라지만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남녀가 만날 끔찍한 수술이란 스트레스 속에서 붙어 있는데 교통사고가 나겠어, 안 나겠어. 덜컥 애가 들어선 메리 수녀. 그러나 그녀는 출산 바로 전날까지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다가 갑자기 지옥 같은 산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자연분만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머리와 머리 사이에 마치 탯줄 같은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 불행은 언제나 한 가지 이유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서, 인도 출신의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 헤마는 때마침 휴가를 얻어 인도를 방문하고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상태. 토머스는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수술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증상으로 제왕절개를 도저히 할 수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외과의 토머스는 배 속에 든 것이 쌍둥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해 산도에 머리가 걸린 태아를 분해해 몸 밖으로 빼냄으로 해서 산모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먼저 머리뼈를 부숴 두부를 떼어낸 다음 견갑골과 늑골, 그리고 폐와 심장, 간의 순서로. 그래 아이의 정수리를 째는 순간, 힌두의 여신처럼 등장한 산부인과 전문의 헤마. 헤마가 등장하자마자 원시적으로 생긴 태아 해체장비를 집어던져버리고 제왕절개 수술로 접어든다. 그래 아들 쌍둥이 시바와 메리언이 탄생할 수 있는 것. 아이들의 엄마 메리 수녀는 과도한 출혈과 쇼크로 세상을 저버렸지만 서로 연결된 몸으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는 부모에게 다소 과하게 총명한 지능을 물려받아 세상에서 첫 호흡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공포 때문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못해 숨을 거둔 사랑하는 메리를 눈앞에서 본 토머스는 자신이 얼마나 메리 수녀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쌍둥이 아들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즉시 깨닫고 그길로 대충 짐을 챙겨 아디스아바바를 떠나버린다. 산부인과전문의 헤마 선생은 자신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자연분만이었으면 형이 됐을 아이, 정수리에 길게 자상이 생긴 아이에게 힌두 최고의 신인 ‘시바’란 이름을 주고, 제왕절개 수술 덕분에 형이 된 아이에게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메리언이란 이름을 준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술꾼 내과 전문의 고시. 고시는 헤마와 같은 도시 출신이긴 하지만 헤마보다 좀 낮은 계급이라 그저 짝사랑만 하고 있는 상태. 토머스가 갑작스레 떠나고, 헤마는 아이 육아에 정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외과수술을 집도하게 된 내과전문의 고시는 점점 능숙한 외과의로 변모해가며 드디어 헤마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두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고. 그래서 우연히 여자이름을 갖게 된 쌍둥이 남자 형제 시바와 메리언은 더없이 인간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부모에게 양육되는 것.
 이제 겨우 쌍둥이 형제의 탄생까지 이야기했다. 책은 이들 가운데 메리언 스톤이 50세가 넘을 때까지니까 말 그대로 초입만 간단하게 적어놓았다. 작가는 대단히 놀랄만한 입심으로 스토리를 밀고 나간다. 이런 책의 특징은 “재미있다”는 거. 본문만 85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인데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다 읽는다. 대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당신의 눈언저리는 피곤에 절어 푹 꺼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읽는다면 주말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 책을 덮을 때 다른 건 모르겠고,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친한 동무가 있으면 읽어보라고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책은 빌려주거나 사보라고 권하는 게 아니다. 내 책을 줘버린 다음에 후회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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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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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라면 역자의 작품해설 일부를 감안하는 것이 좋다. “공포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는 “알바니아 근대사 가운데 여전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건을 다루었다. 즉 알바니아의 공산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메메트 셰후가 1981년 12월 14일 새벽에 총에 맞은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신경쇠약으로 인한 자살이었지만 그 후 이 죽음을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과 의혹이 나돌았으며, 사건이 있은 뒤 이십육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알바니아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진 지 십육 년이 지난 오늘날(2008년)까지도 그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라고 밝힌다. 간략하게 말해, 유구한 역사 기록 동안 자기 나라 땅에서 벌어진 남들끼리의 전쟁에 시달리던 알바니아라고 하는 가난한 공산주의 나라에서 1981년 연말에 막강한 권력을 쥔 차기 공산당 서기장, 현 서기장의 공식적 후계자가 자택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자살이건 타살이건 간에 무엇이 후계자로 하여금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의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걸, 이스마일 카다레가 소설로 형상화했다는 거다. 이 말만 딱 들으면 독자들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에도 사실 비슷한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번쩍 생각나는 것이 1975년 장준하 실족 사망사건. 알바니아와 한국에서 벌어진 두 사망 사건의 공통점은 무소불위의 독재 철권 시절에 벌어진 죽음이란 것.  우리나라에서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등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초법적 독재,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던 때였다. 알바니아는 비록 장준하의 죽음 6년 후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공산당 서기장에 의한 1인 장기집권 시절이었으며, 두 체제는 전 국토를 위협과 불안과 공포의 공기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설마 민주주의 공화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도? 그렇다. 유신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포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터. 초등학교 꼬맹이일지라도 반정부적인 말을 하면 누군가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확인하고 발설한 성인을 찾아내, 영장 없이 체포, 긴급조치 위반이란 죄목으로 거침없이 고문하던 시절. 그렇게 붙들려가서 몇 대 두드려 맞고 나오면 다행이지만 때마침 선거가 있거나 시중에 자그마한 혼란이라도 있을 경우엔 졸지에 서울시 모처에 거점을 둔 북파 고정간첩이 되던 때. 내 부모는 유신이 공포되자마자 조금이라도 반정부적 내용이 담긴 대화를 나눌 경우엔 어김없이 일본어로 나지막이 속삭였었다. 비쩍 마른 생물교사가 수업 중에 잡혀가던 시절. 이 때를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런 시절을 무려 근 20년 동안 살아봤기 때문에 이 책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를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해서다. 즉 이 소설은 짐작처럼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 폐쇄되어 불안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난한 독재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 개인들, 개인들의 집단으로 시민들이 마치 기압처럼, 일상적 공포 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면서부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한 세기 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일인 공포정치의 한계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뒷길로 사라졌다. 아직도 굳건하게 대를 이어 왕조를 지키고 있는 특이한 공산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순혈 프롤레타리아라는 우스꽝스러운 신 골품제도를 창조해 모든 인민들을 공포정치 체제 하에서 평등하게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자주 얘기했듯 마르크스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최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본격적으로 독재에 나서자마자, 국토 위에는 공포의 유령이 배회하고, 사찰하고, 불순분자를 검거하고, 고문하고, 총살해버리기 시작한다. 이런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니 더 이상 하지 말자. 남은 건 영화 제목처럼 인민들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 공포와 불안. 심지어 최고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을 포함해 모든 인민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오해가 쏟아져 신체상, 재산상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여 살 수 밖에 없던 체제. 최고 지도자조차 자기 눈앞에서 아첨하며 충성을 맹세한 수다한 부하 가운데 누가 갑자기 자신에게 총부리를 거두게 될지 불안에 떤다. 이게 독재자의 마지막 발로. 독재자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로는 조금만 더 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해 모든 인민이 태평세월을 맞을 거 같다. 2단계는 일이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3단계는 이제 권력을 놓으면 누군가 자신을 죽일 거 같다. 그래서 살기 위해 권력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단다. 그러니 정점의 단계에 와 있는 독재자는 항상 반역의 기운을 먼저 눈치 채 근본을 없애기 위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뿌리를 뽑아야 했겠지. 심복 가운데 심복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놓고 스카치를 마시던 농군의 아들의 머리에 권총이 발사될 때까지. 그래 1981년 12월을 살던 알바니아 인민들이 살아가던 사회적 분위기를 1970년대를 살아본 대한민국 국민이, 불행하게도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집단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듯했던 시절. 혹시 모른다. 독재 체제라는 것이 정말로 모든 인민들을 공황장애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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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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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올려주시어 내게 좋은 책을 선택할 기회를 주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알제리.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만만하게 봤던 나라였지만 뚜껑을 따보니 쌕쌕이 엔진을 장착한 놀라운 속도를 이용해 우리나라를 2:4로 유린했던 기억이 앞설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시에 우리나라가 알제리에게 1:4로 진다는데 만 원 걸었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시 뫼르소, 이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가 엄마가 죽은 날 땡볕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멀쩡한 아랍 청년 하나를 권총으로 쏴 골로 보낸 걸 기억할 듯. 나? 나는 알렉시 제니가 쓴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나치에 의해 국토가 점령당했을 때는 프랑스 국민들이 그들의 장기인 복종과 순응으로 어려운 시기를 겨우겨우 넘기더니, 연합군에 의해 해방이 되고, 전쟁이 끝나고, 다시 군비를 확장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자,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무자비하게 식민지 저항세력을 탄압했다는 지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떠올랐다”고? 맞다. 작가 아시아 제바르가 알제리 출신 작가라는 출판사 책 광고를 읽자마자, 뫼르소도 아니고, 카뮈가 쓴 <최초의 탄생>도 아니었고, 월드컵에서의 2:4 패배도 아니었으니, 바로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제니가 보여준 무자비한 학살, 그 피해자로서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제3세계를 바라보면, 우리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다.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이왕 알제리가 무대니까 알제리를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1954년부터 무력 독립투쟁에 접어든다. 독립전쟁은 이후 8년간 지속되었는데,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프랑스에 어디 맞상대가 되기나 했을까. <프랑스식 전쟁술>을 인용할 것도 없이, 1960년대 초반에 수도 알제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에 식민모국인 프랑스는 실탄 사격과 무차별 체포와 고문, 감금 등을 저지른다. 1960년대 초반에 독립하고(실제로 나이지리아가 1960년, 알제리가 62년, 케냐가 63년 등), 신생독립국답게 한 5년 정권투쟁을 하다가 내전 3년 정도를 겪으면 이미 1960년대 후반. 극동 아시아의 신생독립국에선 벌써 포항제철이 거의 완공단계에 접어드는 등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거기다가 알제리가 더욱 암울한 것은, 무려 182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는 점. 너무 오래 굴종과 예속의 상태에 처해 있다 보니, 그나마 알제리 사람들은 회교적 윤리로 버티긴 했으나, 경제, 정치, 문화 등 거의 모든 것, 심지어 언어조차도 프랑스의 부속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을 터이다.
 이 책은 크게 두 시기를 선택해 시대를 왔다 갔다 하는 방식으로 전개를 한다. 처음엔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주인공 베르칸이 청소년 시기를 보내는 시점이 알제리에서 민족해방전선이 해방투쟁을 본격화하던 시기와 딱 겹친다. 머리통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베르칸은 당시 초록, 빨강, 흰색으로 된 알제리 삼색기를 작대기에 매달고, 알제리를 알제리 사람에게! 구호를 외치다가, 다행히 총을 맞지는 않는데, 붙잡혀 돼지우리 같은 감방에서 몇 달을 보내며 정기적인 고문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베르칸은 사실 별것도 모르면서, 어찌 보면 군중심리에 휩쓸렸다고도 할 수 있는 지경에서 붙들려 경을 쳤으나, 막냇동생이 보기엔 자기 둘째 형이야말로 대단한 독립 영웅으로 비칠 수밖에. 이 때의 장면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등장한다.
 이후 베르칸은 파리로 건너가 출판사에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글을 쓰면서 차분히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마리즈라는 프랑스 여성과 동거도 하면서. 이렇게 근 20년을 살다가 1991년 가을에 여전히 마리즈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이지만, 조만간 분명히 서로 다른 애인을 찾게 될 것임을 알면서 귀국길에 오른다. 못다 한 소명, 글을 쓰기 위해. 이때부터 2년 동안이 두 번째 시점. 베르칸은 참으로 험난한 시절을 택해 귀국한 꼴. 1991년 12월에 투표가 있었고, 투표에 불만을 갖고 있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 독립의 영웅 부디에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곧바로 내전에 돌입해 부디에프마저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제 알제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내전과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마치 문화혁명 당시의 중국을 보는 듯이 프랑스 말을 쓰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베르칸은 비록 출판이 된 적은 없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문자로 글을 써왔고, 고국 알제리로 건너와서도 못다 한 집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문자로 글을 쓰는 작가. 필연적으로 그에겐 고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 가르쳐드린다.
 여기까지 써놓고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이런 건조한 감상문이라니. 내가 읽어도 한심하다. 이 책은 이렇게 스토리의 나열만 가지고 설명을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자유스럽게 과거와 현재, 비극의 역사와 에로티시즘의 경계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현실 위에 처진 딱 한 줄 위에서, 안전그물도 쳐놓지 않은 채 이렇게 멋진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책 뒤에 역자가 작품을 해설해 놓은 글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프랑스어의 실종>을 해체해 설명을 해놓고 있으나, 그런 건 모르겠고, 참 재미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을 오랜만에 한 편 만났으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책을 덮자마자 곧바로 이이가 쓴 다른 작품을 책방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여기까지 짧지 않은 감상문을 읽어주신 분들이여, 불민한 나를 믿고 이 책을 선택하시라. 물론 직접 읽고 난 다음의 소감에 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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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club 2019-06-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이, 콜

Falstaff 2019-06-01 16:04   좋아요 0 | URL
후회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