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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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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 모리에, 하면 뭐니뭐니 해도 첫째가 <레베카>, 둘째가 <나의 사촌 레이첼>. 맞지? 그리고 현대문학에서 나온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 10번. 이 책 《인형》도 현대문학에서 찍었다. 그러면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이거 혹시 단편선 시리즈하고 겹치는 거 아녀? 하는 의심. 하, 참.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쓸데없이 믿지 못하는 시절을 살게 된 거야? 걱정하지 마시라. 겹치는 작품 1도 없다. 명색이 현대문학인데, 아마 지금까지 생존하는 우리나라 문학잡지 가운데 제일 오래 됐을 걸? 그걸 만드는 회사가 양심불량… 그런 일도 있기는 있겠지만 대놓고 양심불량한 짓은 하지 않을 터. 걱정하지 마시고 사 읽으시라. 사 읽으라고? 아니 뭐, 책장 좁아 터질 지경이면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시고. 하여간 좋으실 대로 하시라. 20세기 최고는 아닐지라도 두번째 자리를 줘도 아쉬워할 듀 모리에의 엽기발랄 작품들을 오랜만에 읽으실 수 있을 터이니.
아, 그리고 독후감 마치면서 쓸려고 했는데 혹시 깜박 잊을까봐 미리 이 자리에서 말해야겠다. 《인형》도 뭐 그렇고, 현대문학단편선 시리즈 10번 《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도 그렇다 하더라도 이이의 두 장편 <레베카>와 <나의 사촌 레이첼>은 웬만하면 놓치지 마시라. 최고의 대중소설 두 편이다. 물론 내 기호에 그렇다는 거니까 당신이 사 읽은 다음에 책값 물어내라 하실 생각은 접으시고. 나는 누가 나 한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거 열 권을 가져다줘도 책장 속에 박힌 이 두 권하고는 절대 바꾸지 않는다.
아, 자꾸 말이 옆으로 샌다. 지금 마음이 조금 급하다. 조금 있다가 5시, 우리는 주로 “오시”라고 하는데, 다섯시까지 미락횟집에 가야 한다. 삭힌 거 말고 연평도 앞에서 잡은 제철 생 홍어에 쐬주 여러 잔 하러. 아마 이 포스트가 3월 9일, 꽃피는 봄까지는 아니고, 매화가 질랑말랑 할 초봄에 올라갈 거 같은데, 오늘은 아침 최저 온도가 영하 11도를 찍은 한 겨울이다. 홍어가 제철인 거 맞다.
각설.
책의 제일 앞에 실린 작품이 <동풍>. 끝장난다. 읽어가면서 저절로 듀 모리에, 날 배반하지 않는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국 서남쪽 끝자락인 실리 제도에서 서쪽으로 160킬로미터쯤 더 벗어났고, 선박들의 주요 뱃길하고도 동떨어진 작은 작고 험준한 섬. 이름이 세인트힐다섬. 섬의 규모가 겨우 5~6제곱킬로미터. 즉 섬이 정사각형으로 생겼다 치면 가로 세로 각 2.4킬로미터. 동그랗게 생겼으면 한쪽 끝에서 제일 먼쪽까지 2.7킬로미터. 근데 숲도 별로 없어 사시사철 소금바람에 몰아치는 북풍한설로 땅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고, 포도라고 키울 수 있으면 이런 땅에서 나는 포도주가 대낀이긴 하겠건만 그럴 일도 없어, 기껏 농사 짓는다는 것이 감자와 귀리, 그리고 난바다도 아니고 연안바다에서 생선 몇 마리 잡아먹는 것이 일상인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땅이다.
그러니 주민들은 점점 야생화되어 거칠기 이를 데 없어서, 듀 모리에의 특기인 엽기 잔혹한 일이 벌어질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게다가 제일 인구가 많았던 시절이라봤자 일흔 명에 불과한 적은 수의 주민들이 육지와 교통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꽤 오랜 동안 근친혼의 결과 의욕도 없고, 말도 없고 뭐 그런 처지였다. 소돔에는 그나마 술과 고기라도 넘쳐 흘렀지.
가끔가다가 더 이상 섬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조각배를 타고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공장노동자를 하러 아일랜드나 웨일스에 가 도시빈민계급을 형성했지만 단 한 명도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고, 편지 한 장도 없었다. 편지를 쓰려고 해도 글자 읽는 법을 배운 적이 있어야지. 그래도 그들이 이루지 못하면 2대, 3대… n대 중에 언제 한 번은 함포고복 하며 “내 배 부르고 등 따시면 그게 제일이지 세상에 잉글랜드 수상이 누구인지 내가 알 바 뭐 있겠소!” 할 날도 있었겠지 뭐. 그게 인생이니.
듀 모리에는 <동풍>을 1926년에 처음 스케치했고, 작품 속에 이게 60년 전 일이라고 주장하니까 무대가 1860년대 중반의 외지고, 외지며 외딴 섬으로 보면 좋겠다. 무역선의 동력도 아직 석탄 엔진이 완비되지 않아, 뭐 부sub동력 정도로는 사용했겠지만, 주동력은 여전히 풍력을 사용했다고 믿자. 그래야 속이 편하다. 작품의 주인공 거스리가 언덕 위의 자기 집에서 하늘을 보니 동풍이 몰려오는 거다. 아무나 언덕 위의 오두막에 사는 게 아니다. 섬의 지도자 겸 어부들의 우두머리니까 거기 사는 거다. 동풍이 불 조짐이 보이니 그는 서둘러 언덕 아래로 내려가 주민들한테 폭풍우가 불 터이니 배들을 안전한 장소에 대고 배끼리 단단하게 묶어두라고 지시한다. 똑소리나는 지시와 충실한 이행 덕에 섬의 배들은 아무 험한 일도 당하지 않고 새벽을 맞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큰 범선이 섬의 부두로 밀고 들어와 턱, 접안을 하고 있는 거다. 과감히 말하자면 섬의 주민 가운데 아무도 이렇게 큰 범선을 본 적도 없고, 범선을 타고 온 선원만큼 많은 육지 사람들을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태산인 건, 이들 무리, 섬의 주민하고 선원들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 하도 오래 격리해 살아와 이젠 극악의 사투리로 변해 의사소통은커녕 하고 있는 말의 대강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디 랭귀지. 생긴 것만 비슷하게 생기고, 특별히 살 껍데기 색깔이 거의 같으니 서로 죽고 죽이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둘 다 영국 그 동네 인간들이잖아, 야만인들.
아이고,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그것도 18쪽짜리 단편소설이. 그리하여 뚝 잘라버리면.
선원들은 주민하고 잘 어울려 이들에게 브랜디를 마시게 하고, 밴드도 불러 노래와 춤을 즐기기도 한다. 당연히 바람과 비가 멈출 때까지는 섬에서 나갈 수 없으니 그나마 물과 여자들이 있는 이곳에서 한 사나흘 실컷 즐기다 가자는 셈이겠지. 섬사람 특히 남자들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브랜디라는 술을 마셔보는 거다. 근데 그게 정말 맛나거든. 독하기도 하고. 독해서 쓰러지면, 거기가 천국 아냐? 쓰고 텁텁하고 약하기만 한 감자술만 찔끔거리다가 독약 같은 브랜디를 마시니 기분이 어떻겠어? 선원이 아니라 전부 천사들처럼 보였겠지.
근데 세상에 어디 좋은 일들만 있나? 이러면 꼭 사달이 나요, 사달이. <동풍>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선원 하나가 하필이면 주인공이자 선원들의 우두머리이자, 섬사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거스리의 아내, 특별히 금슬이 좋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얺은 그냥 그런 보통의 부부사이이긴 하지만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알통을 자랑하는 거스리의 아내를 찍어 안다리후리기에 이은 잡치기로 자빠뜨려버렸다. 듀 모리에가 여기서 끝나면 모리에가 아니라서, 거스리도 이를 알게 되는데, 어떤 결말이 날까?
배따라기? 아니면 바다를 닮은 사내니까 그저 너그러이 두 연놈들을 용서해줄까? 배따라기와 달리 무역선 선원놈을 찾아가 냅다 머리통을 부숴버린다고? 에이, 못 가르쳐드리지.
앞에서 말했듯이 <동풍>을 읽는 내내, 대프니 듀 모리에는 날 배반하지 않았어! 감탄하며 읽는데, 문제가 있다. 전부는 아니고 거의 다 흥미진진한 모리에 식 엽기발랄 아니면 삶의 빈틈을 콕콕 찌르는 송곳 같은 작품인 건 확실한데, 이게 연속으로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어버리니까 나중엔 그게 그거, 다 비슷한 거 같아서, 그것 참. 안타깝게 됐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시간을 여유롭게 두고 하루에 두 편씩, 모두 열세 편이니까 일주일 정도에 걸쳐 읽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끝내려 하는데, 잊지 않았다. 이 책은 몰라도 하여튼 <레베카>와 <나의 사촌 레이첼>은 읽어 보시라. 소위 강.추! 도서관 책은 아마 손때가 겁나게 묻어 퉁퉁 불었을 걸?
난 이제 홍어, 아마 홍어 애탕일 건데 하여간 그거 먹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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