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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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에 업로드할 마지막 독후감이 파트릭 모디아노가 됐다. 특별하게 고른 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모디아노가 걸렸다. 지금은 창밖 아파트 마당 느티나무의 낙엽이 절정이고, 독감 인플루엔자가 일찌감치 세상을 덮쳤다는데 실감은 나지 않고, 입법/사법/행정부는 유신 시절이나 당시 고초를 겪은 계파가 정권을 쥔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또 1년을 마감하려 한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모디아노를 읽고 보니 한 해의 마지막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도무지 이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가 (심지어 다시는 안 읽겠다고도 했었으니) 초가을에 <잃어버린 거리>가 재미있어서 다시 한 권을 골랐다. 때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도 김화영이 번역한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의 중판을 냈는데 그건 도서관에 있는 초판을 읽기로 했다. 좀 더 있다가.

  <잃어버린 거리> 독후감의 제목을 “재미있는 모디아노도 있네?”라고 했다. 근데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이후 “네가 길을”>가 더 괜찮았다. 당연히 내가 읽은 소감이 그렇다는 것이니 독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2014년에 발표한 작품. 이 해에 모디아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그동안 이이의 책을 찍어 판 문학동네, 이 문둥이들이 대박이 났었다. 대박 까지는 아니고 중박 정도? 한강이 수상했을 당시 판매량 이후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경우는 몽땅 중박 수준으로 내려 앉았을 걸?


  <네가 길을>은 본문이 164페이지에서 끝난다. 여유롭게 편집해 분량이 중편 수준이다. 그렇지만 읽기가 수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디아노가 늘 그렇듯이. 내 경우에, 이번 모디아노는 문장이 마음에 딱 들었다. 역자 권수연이 우리 독자 (또는 내) 취향에 딱 맞는 문체를 가진 것 같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을 정도로.

  주인공은 장 다라간. 소설가이고 처음엔 늙었다는 건 알겠는데 얼마나 늙었는지는 모른다. 한 시간 정도 읽고 나면 60대 초반 정도이겠다고 짐작할 수 있다. 파리의 넓고 좋은 집에 혼자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일찌감치 자신과 멀어진 부모 말고 가족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부모도 어머니가 파리 아르카드 가街에 있는 극장의 전직 배우였고, 아버지는 같은 길 끝 오스만 대로 73번지 건물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아들 장 다라간을 건사하기가 버거웠는지 어린 장을 파리 근교에 있는 한 시절 한센병 환자 전용 병원이었던 저택의 소유자에게 맡기고 이후 작품에서 두절된다. 이때 장 다라간이 여섯 살.

  여섯 살 시절 생뢰라포레에 있던 저택에서 한 1년 정도 함께 살던 아니 아스트랑.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여성. 여섯 살에 부모와 떨어져 외진 변두리에서 살았으니 이 시절의 손실과 고독과 슬픔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 게다가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니 아스트랑과 함께 집을 떠나 기차를 타고, 이름을 장 다라간에서 장 아스트랑으로 바꾼 위조 여권을 든 채 “로마”로 가려 했던 기억.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 세월이 15년쯤 더 지나 이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장 다라간은 생뢰라포레의 기억을 더듬어 <그 여름의 어둠>을 쓴다.

  그리고 또다시 흐른 세월이 40년. 인디언 섬머의 더위가 만만치 않은 오후 네 시경, 햇빛이 닿지 않는 구석의 소파에서 졸고 있던 다라간은 난데없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 기분이 언짢다. 전화를 건 남자의 목소리. 기분 나쁘다. 느른하되 위협적이다. 다라간이 잃어버린 연락처 수첩을 자신이 가지고 있어 전화를 했다. 수첩 첫 장에 쓰여 있다.

  “이 수첩을 습득하시면 다음 주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다라간은 수첩에 인쇄된 줄에 기계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다. 연락처 수첩에 든 이름들에 지금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중요한 사람은 모두 외우고 있어서 굳이 수첩에 적어놓을 필요가 없다. 수첩이 마음에 쓰이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정보가 다른 사람 손에 있다는 것 하나다. 위협적인 목소리가 계속 말한다. “댁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편하신 날 편하신 시간에요.” 아무래도 기분이 언짢은 다라간은 다음날 오후 아르카드가 42번지 카페에서 보기로 정한다.

  프랑스 소설판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예순 살이 넘은 장 다라간은, 어쨌든 내 눈에, 건방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다. 그는 카페에 여자친구 샹탈 그리펭와 함께 나타난 40 전후로 보이는 남자 질 오톨리니한테 수첩을 건네받고 무례하게 자리를 뜬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작품이 혹시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든다.


  왜 오톨리니가 굳이 다라간을 만나려 했을까? 수첩 속에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지금은 파스키가에 있는 광고회사 스베르트 에이전시에서 일한다는 오톨리니가 전에 언론쪽에서 일을 했는데 아주 오래된 사건에 관해 기사를 썼단다. 이때 경찰 쪽 아는 사람이 꽤 많은 정보를 주었고, 이 정보들 속에 기 토르스텔이라는 사람이 나온다고. 자신이 다라간이 쓴 소설 <그 여름의 어둠>도 읽어 보았으며 작품 속에도 역시 토르스텔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다고 말하지만 다라간은 <그 여름의 어둠>이란 작품을 자신이 정말로 썼는지도 너무 까마득한 과거라 가물가물하다. 토르스텔이라는 이름도 생소하고.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인물들. 아마도 이미 유령이 되었을 존재들이 갑자기 다라간의 앞에 튀어나올 수 없는 일. 다라간은 오톨리니를 돈을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기꾼 정도로 인식하며,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이런 작자를 떨구는 방법 정도는 쉰아홉 가지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카페에서 무례하게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힌 채 그리 무례하게 자리를 뜬 것일까? 유명해지면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내 의견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네 시쯤 다시 전화가 한 통 온다. 이번에는 오톨리니의 여자친구 샹탈 그리펭으로부터. 샹탈. 지금은 드물지만 다라간이 젊었던 시절엔 흔한 이름이었다. 자신과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성의 이름도 샹탈이었다. 파리의 그레지보당 지구에 있는 좁은 다락방에서 주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뜨거운 관계를 유지했던 여자. 샹탈의 남편 폴과 폴의 친구들이 파리 인근 카지노로 도박하러 가면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까지 둘 만의 시간이 생겼다. 이때 다라간은 폴과 폴의 친구들과도 안면을 텄고, 아주 가끔은 함께 이동하기도 했다. 가물가물한 기억들. 모든 기억은 다라간이 샹탈 그리펭의 아파트에 방문해, 샹탈이 전해준 자료를 받으면서 나눈 대화, 집에 가져와 작은 글씨로 적힌 것들과 복사본을 보면서 아주 어렴풋하게 떠올린 암각화였다. 이 암각화 가운데 한 장면. 한 사람. 기 토르스텔. 40년 전의 샹탈과 이이의 남편 폴이 뒷자리에 타고, 다라간이 앞자리에 앉았을 때 자동차를 운전했던 사람. 그가 기 토르스텔이었다. 이때 이름을 잊지 않아 당시에 쓴 작품 <그 여름의 어둠>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인물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이렇게 장면은 60대, 20대, 여섯 살의 장 다라간이 순서 없이 교차한다. <그 여름의 어둠>의 무대 생뢰라포레. 그곳에서 유일하게 장 다라간이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 아니 아스트랑. 40년 전에 소설을 쓸 당시에도 다라간은 생뢰라포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 아스트랑과 함께 어떤 이유로 로마에 가려 했는지를 유년시절의 막막한 외로뭉과 아니에 대한 그리움을 깔았던 것. 후에 듣기에 아니 아스트랑이 “감옥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왜 감옥살이를 했을까? 누구도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게 된 범죄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라간이 <그 여름의 어둠>을 쓴 후에 아니 아스트랑을 만난 적이 한 번 있기는 했지만 그녀 앞에서 어떤 잘못을 지었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또 40년이 흐른 지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단편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기억의 곳곳에 산재할 뿐 그것들이 정연하게 모아지지 않는다. 모든 게 그렇다. 어떤 기억도, 어떤 일도, 그래서 어떤 인생도. 이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또 일년이 갔다.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시라.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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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12-31 0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해피 뉴 이어!

Falstaff 2025-12-31 06:13   좋아요 1 | URL
곰돌이 님도요!!!

페넬로페 2025-12-3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stella.K 2025-12-3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둥이! 하긴 그렇게 부를만 하죠? ㅎㅎ 노벨문학상이나 받아야 눈 한 번 꿈적해 중박 정도하니 그러고도 울나라 세계 10위의 출판대국이라는 게참. ㅠ 그래도 알지도 못하는 책들 출판하는 거 보믄 기특도하고, 안쓰럽기도 해요. 좋은 책이라는 건 알겠는데 선뜻 손이 안 가고 이런 책 누가 사서 읽을까 싶은 책 있거든요.
내년에 또 어떤 책이 왕좌를 차지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어두운 구석탱이로 들어갈 책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네요. 사람 눈이 네개쯤 돼야하는데. ㅠ ㅎㅎ
올해도 폴님 때문에 즐거웠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책 부탁드립니다. 새해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