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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끝 ㅣ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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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반 만에 프루스트를 읽는다. 9년 반 전에 읽은 책?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명 깊었냐고? 그럼. 감명 깊고말고.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신이 있다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신님, 나로 하여금 이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를 읽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미 대가리라고는 1도 없으면서 길기는 더럽게 길어, 읽는 내내 청화집의 오소리감투에 쐬줏잔 기울이는 딴 생각을 품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활자만 11권 4천8백페이지를 읽는 인내심을 함양할 기회를 주신 신님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그래, 그래.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 페이지도 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별로 안 되는 독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건 맞지만 조금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철저하게 활자만 읽었을 뿐이라서. 아무 생각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감명 깊게 읽은 분들께도 진심어린 존경과 질투를 보낸다. 천성이 고귀하지 않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이 고평가된 작품 가운데 저 위, 꼭대기에 혹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지 않을까, 하고 심통부리는 많고 많은 덜 떨어진 독자 가운데 한 명이다. 요즘 들어 이 생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단편집 《질투의 끝》은 2년 전부터 도서관 홈페이지에 “관심도서” 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이다. 아무리 <잃어버린…>을 그리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프루스트인지라 무시무시한 11권, 4천8백쪽짜리 장편이 아닌 얇은 문고판 단편집이 나왔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겠느냐는 말이지. 그런데 읽으려면 동네 도서관에서 다른 도서관으로 상호대차 서비스 신청을 해야 해서, 차일피일하다가 날들만 날리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주로 비밀댓글을 주시는 동네 서재 쥔께서 이 책을 거론하시기에 이르러, 아차, 맞아, 《질투의 끝》이 있었어, 기억이 새로워 서비스 신청을 해, 책을 받고,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걸 여태 게을렀구나, 싶었다.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책 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 네 단편은 1896년, 스물다섯 살의 프루스트가 출간한 첫 작품집 『쾌락과 나날』의 수록작 가운데 네 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독후감을 쓰기 직전에, 도무지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임에도 문장이 매력적이라,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궁리하던 중이었다. 25세 이전의 젊은 프루스트가 쓴 단편. 소년시절부터 허약체질에다 꽃가루 알러지 즉 건초열과 만성 천식으로 고생하던 작가는 여기에 세기말적 분위기까지 보태 죽음 혹은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 천착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럼에도 20대 초반의 남성으로 넘치는 리비도는 또한 쾌락에 집착하게 만들었겠지. 평생 노동하지 않고도 전업작가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일찌감치 사교계 문턱을 넘은 병약한 도련님. 이이의 작품은 그리하여 바로 앞 시절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선배들과 완전히 맥을 달리해, 귀족계급과 사교계와 불륜과 관능을 포함한 사랑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사랑하는 공작부인 피아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무도회에서 코티용 춤을 추리라는 상상을 하며 최후를 맞는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고, 마지막에 실린 <질투의 끝> 역시 사고를 당해 죽어가며 자신이 정리하고자 했던 손느 부인 프랑수아즈의 손을 잡을 다른 남자를 질투하는 내용이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은 시골 스티리아 출신의 매력적인 아가씨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파리의 사교계에 진출해 보헤미아의 공작부인이 되는 이야기이며,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결혼을 앞두고 집에서 연 파티 도중에 한 방에서 외간남자와 진한 페팅을 하다 벽난로 거울을 통해 관능에 절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켰다고 생각한 아가씨가 심장에 권총을 발사하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세기말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퇴폐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세기말이나 퇴폐를 이미 졸업한 젊은 부르주아 작가가 실제로 체험해보지는 않은 채 머리속에서 상정한 인물들의 심리를 탐색해 글로 써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든데, 책을 읽는 내내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 속 상황을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에서 작품의 내용을 죽 써 놓으니 정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단연 문장이었다. 근데 이게 프루스트의 문장인지, 책을 번역한 윤진의 문장인지 나는 모른다. 프루스트보다 훨씬 긴 문장을 장황하면서도 아름답게 구사했던 알베르 꼬엔의 <주군의 여인>을 읽을 때도 《질투의 끝》의 인상깊은 길고 유려한 문장을 경험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군의 여인> 역시 이 책의 역자 윤진 번역이다. 단편소설을 읽으면서는 메모를 하지 않아 어느 문장을 특정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비교하기 위해 프루스트의 <게르망트 쪽> 몇 페이지를 읽어봤다. 흠. 그렇군. 프루스트의 문체였네. 스물한 살 때 문장이 죽을 때까지 갔네 그려.
갑자기 파박, 떠오르는 생각 하나. 그렇다면, 활자만 겨우 읽어냈을 뿐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시간을 무지하게 길게 잡고 《질투의 끝》을 읽는 식으로 조금씩, 하루에 몇 십 쪽씩 읽을 수 있기만 하면 그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까? 아오, 프루스트는 내 스타일이 확실하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을 때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요새 왜 자주 할까, 주책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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