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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삶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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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눈 여겨 보면 거의 모든 작가가 1961년 이전에 죽었다. 즉 지적재산권과 관계없이 번역서를 낼 수 있는 작품만 골랐다는 건데, 거 참 신기하지, 그래도 좋은 작품이 시리즈 곳곳에 숨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아직도 소개하지 않은 오래 묵은 작가들은 시장성을 확보하지 못할 작품을 주로 생산했기 때문이라 작품 역시 별볼일 없을 거라 여길 수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경탄을 거듭할 만한 걸작이나 적어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작품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 이야말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확률이 별로 없을 터이니까.
1892년생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데 올리베이라 Graciliano Ramos de Oliveira는 브라질 알라고아스주 케브랑굴루에서 태어났는데, 이때만 해도 부모는 이 아기가 16남매의 맏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우리나라에서도 10남매 이상 출산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은 몰라도 젊은 시절까지 종종 들어 익숙했어도, 아오, 열여섯은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어 이 많은 아이가 과연 한 여성이 낳은 동복의 남매인가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런 것까지 찾지는 못했다. 만일 그렇다면 하무스의 어머니 마리아 아멜리아의 생애는 임신, 출산, 그리고 수유라는 사이클만 계속 돌았을 것이고, 어쩌면 수유 과정은 생략할 수 있게 유모를 쓸 수 있는 중산계급이었을 것이다. 브라질 북동부에서 낳고 어린 시절을 보낸 하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 때부터 가명으로 잡지에 기사를 싣기도 하고 소네트 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잠깐 리우데자네이루에 살기도 했지만 스물세 살 때 아버지가 사는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로 가서 말뚝을 박았다. 스물셋에 결혼한 하무스는 부모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식력을 이어받아 출산 후유증으로 삶을 접는 첫 아내와의 짧은 결혼생활 동안 네 명의 자녀를, 두번째 결혼에서도 네 명의 자녀를 낳는 동안,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의 시장을 지냈고, 아쉽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사임을 하긴 했어도 어쨌든 그랬다는 건데, 시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기가 좀 남세스러웠던지 서른여덟 살인 1930년에 마세이오로 주민등록을 옮겨 6년 세월을 보낸다.
마세이오에서 소설책 두 권을 출간하는 한편, 정치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1935년엔 공산주의 봉기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하나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 하여간 이 시점이 이 양반의 문학적 전성기로 대표작을 발표하니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메마른 삶>이다. 이후 공산당에 입당하고, 유럽과 소련(과 그 부속 국가들), 같은 언어를 쓰는 포르투갈 같은 곳을 유람하는 등 잘 먹고 잘 살다가 1953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으니, 당시로 봐선 호상이다, 호상.
이이의 정치적 위치는 애초부터 공산주의나 공산주의 비슷하게 지극한 왼쪽이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주로 자기가 거의 평생을 보냈던 브라질 북동부 황야지대의 헐벗고 굶주린 문맹의 하층계급 남성이라 한다. <메마른 삶> 역시 마찬가지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의 주인공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욕, 여성혐오, 불륜 같은 주제를 단골로 채택하고 있단다. 얼핏 당대 식민지 조선의 카프 진영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말로 읽어보면 카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리얼리즘이다. 볼셰비키 전통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기보다 오히려 훗날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찬란하게 비추어줄 환상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토착적 공산주의” 또는 말로만 좌익문학 아닐까 싶은데, 또다시 비겁하게 한 마디 보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일천한 감상으로 말해서, 이건 덜 익은 리얼리즘 때문이 아니겠는가 싶다.
<메마른 삶>은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 부부, 이들의 두 아들과 (고래라는 뜻을 가진)’발레이아’라는 이름의 강아지, 그리고 앵무새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브라질 북동부의 건조한 내륙지역 세르탕에 최악의 가뭄이 들어 이른바 한발 피난을 가고 있다. 비토리아 어멈은 작은 아이를 들쳐 업고, 머리엔 양철 트렁크를 인 채, 어려서부터 소몰이꾼을 하느라 늘 말을 타고 있어서 오다리로 굳어진 작은 체구의 남편 파비아누를 따라가고 있다. 파비아누 역시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잡낭을 어깨에 사선으로 둘러멘 채 허리춤엔 끈으로 물통과 (부싯돌로 불을 붙여 격발시키는) 수발총을 매달고 있다. 황야에서 수발총 없이 산다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법. 하늘엔 죽었거나 죽어가는 짐승의 눈알을 쪼는 독수리떼가 큰 원을 그리며 떠 있고, 물 한 모금도 차마 벌컥벌컥 마실 수 없는 지극한 갈증과, 결코 이에 못지 않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어제 밤엔 비토리아 어멈이 힘들게 머리에 이고 온 새장 속 앵무새의 목을 비틀고 말았다. 애완 앵무새를 잡아먹었다고? 그렇다. 사흘 굶어 남의 담장 안 넘으면 보살이라잖은가. 그럼 강아지 발레이아는? 안 알려드린다.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상황. 이 정도로 브라질 북동부를 휩쓴 한발에 거의 절망할 무렵, 벌판 저 너머로 마치 그리스도의 손길 같은 검은 먹구름, 이른바 은총이랄 수도 있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 파비아누 가족은 텅 빈 농장에 무단으로 들어가 남의 집에서 그나마 이슬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갑자기 누리는 쏟아지는 폭우에 바싹 말라붙은 강바닥은 둔덕을 넘치게 흘렀으며 사방에 바싹 마른 풀과 덤불과 관목이 한 순간에 오색 꽃들과 함께 활짝 피어난 건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한 온갖 양서류, 파충류들의 짝을 찾는 울음이 가족들의 귀청을 메울 지경이었다. 파비아누는 결심한다.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도착할 농장의 주인한테,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를 것을.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정말로 농장주가 왔으며, 몇 번의 의례적인 거절 끝에 파비아누를 농장의 소몰이꾼으로 채용해, 이 집 가장은 전처럼 하늘 같은 말을 타고, 가죽 장화와 안장과 가죽 바지를 걸친 근사한, 당연히 작은 아들의 눈에만 근사한 잘 나가는 가우초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 욕심에는 끝이 없는 법. 비토리아 어멈은 가죽 시트가 깔리 침대를 원한다. 지금 부부가 자는 나무 침대는 한 가운데 볼록, 옹이가 박여있어 부부는 한 가운데 옹이를 깔고 눕지 않기 위해 서로 정 반대의 구석에서 몸을 굽힌 채 자고 있으며, 각기 차지하는 면적으로는 결코 셋째 아이를 만들기 위한 작업도 구상할 수 없다. 가죽 침대는 세탕가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던 제분소 주인 토마스 씨가 쓰던 것을 본 적이 있다. 부자면서도 이상하게 예의도 발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 토마스 씨에게는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을 했던 것처럼 파비아누 역시 평소 사람을 멀리하고 오직 동물하고만 잘 지냈음에도 토마스 씨의 말엔 고분고분하게 따랐었다. 당연히 파비아누를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토마스 씨의 겸손이 정말로 인격에서 우러나온 겸손인지, 아니면 주민들을 부리기 위한 배운 자들의 고도로 단련된 수법인지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토마스 씨 역시 이제 막 끝난 한발 때문에 제분소도 할 일이 없어 길거리에 나 앉는 수준의 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토리아 어멈의 머리 속에 남은 건 토마스 씨의 가죽 시트 침대. 어멈이 가진 로망 중의 로망.
정식 가우초가 된 파비아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흑백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카브라’ 가운데 한 명. 검게 그을린 붉은 피부와 파란 눈, 붉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남의 땅에 살며 가축을 돌보고 울타리를 수선하는 일꾼이자 짐승 가운데 한 마리일 뿐이다. 이제 주머니에 돈이 생기자 읍내에 나가 이나시우 씨가 경영하는 선술집에 가서 원래 독해야하지만 물을 탄 게 틀림없는 카샤사 한 잔에 취하고, 작은 체구에 보잘것없는 완력을 지닌 노란 군복을 입은 군인의 권유로 도박을 하다 몽땅 털린 다음, 이 군인의 군화 뒤꿈치가 자기 샌들을 밟아버리는 수모를 겪는 것도 모자라 마체테 칼날로 가슴과 등을 두드려 맞은 채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죽여버리겠어, 복수를 하고야 말 거야. 각오를 했음에도 정작 아무 목격자도 없을 벌판에서 노란 군복 군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자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한 파비아누. 결국 ‘카브라’이자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한 파비아누와 가족들은, 브라질 북동부 세탕가에 다시 한번 극한의 한발이 닥치자, 이해할 수 없는 농장주의 셈법에 따른 빚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또다시 비토리아 어멈은 머리에 양철 트렁크를 이고, 어깨에 사선으로 잡낭과 물통과 수발총을 매단 남편을 따라 밤길 황야로 나선다. 지난번과 다른 건 더 이상 아이를 들쳐 메지 않아도 좋을 만큼 컸다는 것하고, 이제 오직 사람 네 명만 길을 나섰다는 것.
이렇게 세월은 가고, 한발은 다시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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