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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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0월에 출간할 계획으로 쓰고 있는 작품을 포함해 세 편을 발표한/발표할 뉴저지 출생 작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국문과, 우리 입장에선 영문과를 졸업하고 편집자 생활을 좀 하다가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구글 검색해도 르쿨락에 관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필라델피아에서 오래 살았고, 지금도 가족과 많은 애완동물을 키우며 살고 있다고 한다.

  <히든 픽처스>는 매력적인 B급 소설이다. 아마존 식 분류법에 따르면 “미스터리 스릴러.” 오늘이 7월 16일.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매스컴은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폭우를 예보하고 있다. 요즘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소설. 모르기는 해도 독일의 그림 형제가 지은 이야기에 힌트를 받지 않았나 싶다. 아동용 동화로 각색해 널리 퍼진 버전 말고, 원래 그림(들)이 쓴 이야기. 예를 들어 신발이 발에 맞지 않으면 신발을 신기 위해서 발가락을 잘라버리는 거 같이. 그래서 <히든 픽처스>에 다섯 살 난 천진한 아이가 주인공(의 한 명)으로 등장하지만 제이슨 르쿨락이 자기 홈페이지에 딱 박아 놓았다. 이 책은 “성인용”이라고.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성인용. 약물 중독이 조금 나오고, 과하다고 볼 수는 없는 폭력/피폭력 장면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르쿨락의 “성인용” 선언은 조금 과한 듯. 아니면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한 꼼수이든가. 아동만 아니면 추천도서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읽지 말라고 금줄을 달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저 그렇지도 않다. 매력적인 B급 소설이다. 그래 B급이다, 어쩔래! A나 B, 계급장 떼고 맞짱 한 번 떠 볼래? 웃통 벗어제칠 정도로. 한여름 밤을 위한 킬링 타임용으로 이만한 소설 찾기 쉽지 않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늦여름이라도 읽기에 늦지는 않을 터.


  화자 ‘나’ 맬러리 퀸의 불행은 단순한 천골 피로골절에서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남부, 운동경기장 바로 위의 조금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대개 그렇듯이 범죄율도 낮지 않은 셩크 스트리트에서 자란 맬러리는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동선수 특기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 진학할 예정인 육상선수였다. 그러나 마지막 졸업 학기 때 천골 피로골절, 즉 꼬리뼈에 미세하게 실금이 가서 몇 주 동안 달릴 수 없었고, 동생 베스는 자기 친구 첸구앙과 함께 한심한 놀이공원에 놀러가기로 엄마한테 허락을 받았다. 하필 토요일이었던 그날 엄마가 직장인 병원에서 특근을 해야 해, 엄마는 맬러리에게 베스와 첸구앙을 차로 실어다 주라고 똑 부러지게 “명령”을 하는 바람에 맬러리는 시합에 나간 팀원들을 응원하지도 못하게 되어 주둥이가 댓발 나온 상태로 동생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토요일 아침이니 고속도로는 한가했고, 시합 때문에 마음이 바빴던 맬러리는 당연히 과속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시합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에 팀원한테 온 문자에 답신을 하기 위해 시선을 휴대전화로 돌렸고, 시선과 함께 일시적으로 주의력도 전화기에 집중되는 순간, 앞선 SUV 차량에 묶여 있던 산악자전거가 풀려나 도로에 떨어졌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급하게 핸들을 틀었다. 맬러리가 운전하던 차도 이것들 가운데 한 대였다. 병원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맬러리는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갈비뼈 세 대에 금이 갔다. 

  바버라 킹솔버의 작품 <내 이름은 코퍼헤드>에서 보듯이 미국 의료체계는 부유하지 못한 자들에게 참혹하다. 2주 후 퇴원하는 맬러리한테 의사는 옥시코돈, 마약성 진통제의 상품명인 옥시콘틴을 처방하면서 “통증이 있을 때만 사용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맬러리는 킹솔버의 코퍼헤드와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빠른 속도로 옥시코돈에 중독되어갔다. 맬러리는 옥시코돈을 처방받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구했으며, 이 중에는, 입학하지 못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의료센터에서 진행한 심리연구 프로젝트의 인간 마루타 자원도 포함되었다. 이 장면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19세의 맬러리는 연구소에서 대기하는 도중에 옥시콘틴 한 알을 입에 넣고 빨아먹다가 삼분의 일 남았을 때 손바닥에 뱉어 엄지로 으깬 다음에 분말 옥시콘틴을 코로 흡입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킨다. 어떻게 첫 실험이 끝나고 흰 가운을 입은 박사가 일주일 후에 두번째 실험을 제시해 시간당 50달러를 요구했지만, 쓰던 아이폰을 옥시콘틴 80mg 다섯 알에 팔아 연락을 받을 수 없을 거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맬러리. 그러나 다행스럽게 이후 곧바로 자기 발로 재활 시설에 걸어 들어갔고, 18개월의 프로그램을 수행했으며 이젠 스물한 살 먹은 여성으로 더 이상 알코올이나 마약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재활 12단계를 밟아 지금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할 찰나였다.

  이때 맬러리 앞에 오랫동안 단거리 육상 코치를 했으며 88 서울올림픽 때 선수단 코치를 했던 러셀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메스암페타민에 취해 운전하다가 옆집 이웃을 과실치사한 죄로 5년 형 수감 중 목사 안수를 받은 68세의 재활 도우미. 이 양반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사생활보다 재활중인 피 도우미를 보살피는 데 전력과 전심을 다하는 선한 인물이다. 실제 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 스스로 약물 중독에 빠진 전력이 있어서 그렇게 변모했을 것이다. 이 러셀의 도움으로 재활의 막바지에 이른 맬러리는 부르주아들의 집단 거주지인 뉴저지 스프링브룩에서도 가장 큰 저택 가운데 하나인 맥스웰 씨의 집에서 거주하며 매우 훌륭한 보수로 9월까지 육아 돌보미, 베이비시터로 일할 기회를 잡는다. 9월 이후에도 맥스웰 가족이 만족한다면 아들 테디를 위한 전담 고용인으로 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재향군인병원에서 심리치료 및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는 캐롤라인과 필라델피아 중심가의 최고급 고층 빌딩에서 IT 관련 사업을 하는 테드 맥스웰 부부. 이들이 러셀 씨와 아는 사이라서, 해군 퇴역병이나 아프간 참전 군 같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을 전문으로 다루는 캐롤라인 씨의 이해심 깊은 선의로 재활치료를 거의 마친 약물중독 출신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자를 찾았던 터다. 이들 가족은 바르셀로나에서 최근에 귀국해 웅장하고 고전적인 빅토리아 풍의 3층 저택을 구입했는데, 이는 캐롤라인이 친정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서 가능했다. 저택 뒤에 곧바로 깊은 숲이 펼쳐져 밤이 되면 토끼 같은 설치류부터 크고 작은 사슴까지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천혜의 자연환경. 셩크 스트리트 출신인 맬러니는 이 집과 캐롤라인, 그리고 다섯 살 난 아들 테디가 너무 좋다. 그러나 당신 같으면 남들보다 훨씬 후한 임금을 주는 입주 베이비시터로 아무리 재활의 막바지에 이르렀다지만 약물 중독의 경험이 있는 사람한테 흔쾌히 맡길 수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라. 아빠 테드도 그랬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을 선택하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인 거 같다고. 그러자 맬러리는 러셀이 건네준 비장의 방어 무기를 꺼낼 수밖에. 마약 복용 여부를 시험하는 다섯 개 들이 키트를 내민다. 아마존에서 하나에 1달러 하는 검사기. 원하는 날짜에 무작위 검사를 받겠다고. 테드는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 같아요. 진심으로 행운을 빕니다. 하지만 난 매주 컵에 소변을 볼 필요가 없는 육아도우미를 고르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지요?

  걱정 마시라. 이 집에 들어가야 소설이 진행되니까. 천사 같은 캐롤라인, 테디의 엄마가 나이든 남편 테드를 설득해 맬러니는 이 집의 육아도우미로 들어가고, 창고로 쓰던 별채를 깨끗하게 치운 독채를 거실로 삼았으며, 천사같이 귀엽고 착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다섯 살 난 테디와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입주 전에는 지독하게 잘난 척하는 댄디 밥맛인 줄 알았던 아빠 테드도, 막상 입주를 하고 함께 생활해야 하는 환경을 만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에 그렇게 인간적이고 부드럽고, 신사적일 수가. 그러나 딱 하나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었으니 테디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유령. 이게 ‘나’ 맬러니에게 골치거리를 안겨주는 유일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테디의 상상 속의 단짝인 유령, ‘애냐’였다. 테디에게 맬러니의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옆에서 부추기는 짜증스러운 습관의 유령. 애냐는 테디의 침대 밑에서 살며 예를 들어 지저분한 옷가지는 빨래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거나, 붉은 고기가 든 햄버거 보다는 두부와 흰 밥을 먹어야 한다는 자잘한 규칙을 안 지켜도 된다고 속살거리고 있었다. 맬러니는 당연히 의심한다. 어리지만 어려서 어린아이다운 사악함으로, 유령 애냐를 핑계 삼아 자기 뜻대로 하려는 거라고. 자기 생각을 엄마 캐롤라인에게 말했더니, 엄마도 맬러니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끈기있게 기다리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겠느냐고, 정신의학 전문의다운 소견을 개진한다.

  그런데, 왼손잡이 테디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다섯 살 난 아이의 단순한 그림에서 점점 전문화가 같은 드로잉으로 진화하더니, 그림 속에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21세기에 웬 유령 타령?


  B급 소설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이렇게 재미있을까? B급 소설의 특징은 읽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용을 모두 잊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는데, 이 책 <히든 픽처스>는 안 그럴 거 같다. 그림 안에 뭔가가 숨겨 있거든. 원래 숨겨있던 걸 발견하면 기억이 오래 가는 법이거든. 여름의 막바지. 당신도 좋은 피서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웬만하면 가족들 잠든 밤에 읽으시라. 오소소 소름 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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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22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은 네 개 반. 다섯 개는 좀 과하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진리를 따라가자.

coolcat329 2024-08-22 0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샀어요. 매력적인 B급 소설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근데 글을 오전 4시에 쓰셨네요. 일찍 주무시나봐요.

Falstaff 2024-08-22 07:08   좋아요 1 | URL
여름 가기 전에 얼른 읽으셔요! ㅎㅎㅎ 납량물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꽐라가 되어 좀 일찍 잤습니다. ^^ 더운 데 무슨 짓인지...ㅠㅠ

stella.K 2024-08-22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은 한 달 전에 리뷰를 쓰시나봐요. 가끔 그런 리뷰가 있더라구요. 대단하세요. 저는 한 편의 리뷰를 한 달 가까이 붙들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ᆢㅋㅋ
역시 여름은 납량물이죠. 소설이든 드라마든. 저는 야한 사진관이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원래 본방은 지난 봄에 했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으시시한 호러물인데 괜찮은 것 같더군요.
이 책 지난 5월에 나왔네요. 좀 된 소설인 줄 알았는데. 기억하겠슴다.^^

Falstaff 2024-08-22 16:38   좋아요 1 | URL
7월엔 세 권짜리 <삶과 운명>이 있고, 8월 초엔 두꺼운 하인리히 만 <충복>을 읽을 예정이어서 미리미리 속도를 좀 냈었습지요. ㅎㅎㅎ

다락방 2024-08-22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후훗 이 책 진작 사놓은 저를 칭찬합니다. 너무 기대되네요. 지금 읽는 책들 다 읽으면 바로 시작해야겠어요. 슝-

잠자냥 2024-08-22 10:25   좋아요 0 | URL
나도!!!😤

다락방 2024-08-22 10:27   좋아요 0 | URL
지금 읽는 책이 여러권에 두껍기도 한게 함정.. 🙄

Falstaff 2024-08-22 16:39   좋아요 1 | URL
죽여주는 킬링 타임. 더위 가기 전에 읽으시면 좋을 텐데요.

잠자냥 2024-08-22 16: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요즘 날씨보니까 9월에도 30도 넘을 거 같아서 그때 읽어도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