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막간극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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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월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작품. 당시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해 1부 공연하고, 디너 브레이크 한 다음 다시 2부 공연, 11시에 막을 내렸단다. 실제 공연에만 다섯 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대작이다. 소설보다 읽는 속도가 빠른 희곡 읽기도 하루 가지고는 무리다. 이 책 본문이 472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러나 독자는 몰입한다. 얼마나 막장인지 한 번 빠지면 헤쳐 나올 수 없다니까. 역시 드라마는 막장으로 갈수록 재미있다. 뭐가 막장이냐고? 미리 좀 알려드리지. 주인공 니나 리즈의 방종한 프리섹스. 결혼 후 남편 가계의 정신병력, 유전으로 정신병의 내리 물림을 막기 위한 낙태, 혼외자 임신과 출산 등등. 이리하여 <이상한 막간극>은 애초부터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라는 극찬과 3류 멜로극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고, 특정 주state에서는 공연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뭐 누구나 쓸 수 있겠지만, 이만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극작가는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이 유일하다는 게 내 의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시간을 넘기는 큰 작품이라 아직 시도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도 초연할 거 같지 않으니 오늘은 마음대로 스포일러 신경 쓰지 않고 써보겠다. 하긴, 연극 공연은 미리 줄거리를 알고 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이래저래 부담 없네.


  뉴잉글랜드의 작은 대학 도시에 있는 리즈 교수 댁의 서재가 1막의 무대이다. 리즈 가문은 소위 와스프 중에서도 와스프, 미국판 귀족 가문이라는 자만심에 도취된 집안이다. 그런데 이집 따님 니나 양이 겨우 시민계급인 고든 쇼와 연애를 했다. 교수께서 어떻게 하면 둘을 갈라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방법이 없어 애만 태웠다. 그러다가 교수에게는 하늘의 도움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미식축구와 조정 등 대학스포츠의 별이자 학업성취도 최고 수준이었던 고든 역시 참전 신청을 했다. 전쟁을 앞둔 청춘남녀는 뜨거워지는 법. 니나와 고든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한다. 이때 리즈 교수는 고든을 불러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한다. 만일 고든 자네가 전쟁에 나가서 전사라도 하는 날이면 니나는 어쩌면 아이 하나 딸린 과부가 될 것이고, 자네가 재산이 없으니 정부에서 주는 쥐꼬리 만한 전사자 연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가 될 터. 니나 정도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네가 돌아와 자리를 잡은 후에 결혼하는 것이 정당하고도 공명정대하며 명예로운 일 아니겠느냐, 하는 거였다. 평민계급에겐 개념이 없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일부 귀족들의 명예, 공명정대,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젊은 커플은 둘 다 몸의 교환을 뜨겁게 바랐으면서도 결혼도 하지 않고, 침상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로 유럽행 배에 올랐다. 고든이 무사히 귀환해 결혼을 해버렸으면 드라마가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전투기를 몰던 고든은 적군의 기총소사를 받아 기체에 불이 붙어 좁은 조종석에 앉아 새카맣게 타 죽어버렸다. 고든의 전사는 니나에게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고, 고든이 무슨 이유 때문에 결혼도, 섹스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던 니나는 아버지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해 뉴욕의 군인병원 간호사로 취직해 집을 나가버린다.

  여기까지 1막이다. 근데 한 명이 빠졌다. 끝까지 별 무게감 없는 조연이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찰스 마드슨. 이이도 귀족. 게다가 소설가이다. 예비학교에 다닐 때라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고등학교 시절일 거 같은데, 열여섯 살 때 친구 따라 사창가에 가 나폴리 출신의 못생기고 뚱뚱하고 분가루와 립스틱을 처바른 나이든 창녀에게 동정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엎어져 엄마 생각하면서 질질 짰던 인간이다. 찰스는 이 첫경험, 딱 하루 때문에 심각한 생식기 질병이 생겨버렸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병이라서 거의 미신에 입각한 민간치료에 기댔다가 그만 생식불능을 넘어 성기능 불능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겪게 된 인간이다. 니나가 어렸을 때부터 예뻐하고 늘 가까이에서 관찰해 로즈 가족에게는 아주 친숙하다. 찰스 마드슨은 니나가 고든의 전사로 인해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 상흔이 니나의 전 생애를 걸쳐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간파했으나, 자신이 니나의 상대일 수도 있는데, 혹은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니나에게 충실한다. 니나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 죽은 고든, 남편 샘 에번스, 연인 에드먼드 대럴을 초월해 어쩌면 니나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뉴욕의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자신을 원하는 거의 모든 환자에게 무료로 몸을 제공하는 니나는 아마도 그것이 죽은 고든을 위한 씻김굿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이때 니나의 나이 스무 살이 채 안 됐다는 것도 감안하자. 사고가 극단으로 치닫는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을 때였으니. 방종한 뉴욕 생활을 1년 하다가 아빠 로즈 교수가 죽어 다시 뉴잉글랜드 고향집으로 온 니나. 이때 죽은 고든 쇼의 대학동창 샘 에번스가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한지 3년이 된 스물다섯 살 총각. 니나가 오기 전까지 집을 보고 있던 마스든 씨가 관찰하기에 똑똑하지 않고 그냥 웃자란 사내 아이지만 호감가는 면이 있는 그저 보통 수준. 고든과는 달리 스포츠에 젬병이요, 공부도 그냥 그럭저럭 했던 범재 출신이다. 하도 꺼벙해서 학창시절 룸메이트이자 3년 선배였던 에드먼드 대럴이 심장 전문의로 근무하는 군인병원에 놀러갔다가 니나를 만나 알게 된 사이로, 니나가 아무한테나 치마를 걷어올린 건 몰랐다. 로즈 가에 오기 전에 벌써 니나에게 청혼해 둘은 결혼한다.

  니나는 샘과 결혼해 북부 뉴욕주에 있는 에번스 가문의 농장으로 엄마를 보러 간다. 니나는 임신 2개월차. 니나는 샘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인 에이머스 에번스한테 천둥 같은 말, 에번스 가의 저주를 듣는다. 샘의 할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외증조할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서 죽었으며, 샘의 고모도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집의 꼭대기 층에서 자신이 돌보고 있다고. 샘의 아버지는 발병을 하지 않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나서 자기한테 집안의 비밀을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러나 샘이 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에게도 증세가 나타나 샘을 기숙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같은 증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심각한 정신병 내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샘을 임신한 어머니는 정신병을 유전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지만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의 권유로 샘을 낳아 이제 결혼을 시켰더니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어머니는 심각하게 유산을 권한다. 그러면서 샘의 안정을 위해서, 즉 정신병의 발현을 막거나 늦추려면 샘의 아이를 낳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렇다고 정신병 유전자가 있는 샘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 혼외로 다른 괜찮은 유전자를 가진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만들어 샘의 호적에 올리기 권한다. 어때? 진짜 막장이지? 정신병에, 낙태에, 혼외정사에, 혼외자 출산 권유까지 한 방에 다 몰렸다. 나는 이 때 소름이 좍. 곧바로 떠오른 것이 알코올 중독 증세가 농후한 어머니가 등장하는 <밤의로의 긴 여로>. 그게 괜히, 우연히 나온 드라마가 아니었던 거다.

  그리하여 충격을 먹고 니나가 고른 애인이 에드먼드 대럴. 심장외과 의사에다 빵빵한 체격에 제법 잘 생긴 외모.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데럴 역할을 클라크 게이블이 맡았으니 알아서 상상하시라. 나 같아도 좀 모지리 같은 에번스보다는 대럴이 좋겠네. 하여간 낙태를 하고 다시 생리가 터지자 곧바로 대럴과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한테 차마 몸의 교환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생전 처음 사랑을 한 남자 ‘고든’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섹스라는 것이 그렇다. 좋아서,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섹스를 하고난 다음에 사랑하게 된 커플도 있다. 딱 니나와 대럴이 그랬다. 특히 대럴이 그랬다. 그러나 유부녀이고, 친한 후배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대럴은 니나를 포기하기 위해 도망치듯 유럽으로 가 몇 년을 머무른다. 자기 연인과 아들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대럴의 가슴이라니. 메지다 못해 아주 무너지지 않겠어? 크.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1부 5막이 끝난다.

  1부 5막 끝나고 뭐? 디너 인터미션. 밥 먹고 2부 6막이 올라 9막에서 대단원을 맞는데, 2부는 아무래도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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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03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찬쉐, <격정세계>
수요일. 셸리 리드, <흐르는 강물처럼>
금요일. 츠쯔젠, 《가장 짧은 낮》

stella.K 2024-05-03 09:57   좋아요 0 | URL
엇, 일주일에 세 작품으로 줄이셨네요. 암튼 기대하겠슴다.^^

Falstaff 2024-05-03 16:58   좋아요 2 | URL
넵. 4월 들어와서 가만 보니까 여차하면 재수 없게 1년에 2백 권 넘게 읽을 거 같더라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1년 2백 권 이상이랍니다. 그리하야... 두꺼운 책을 집중적으로 털었습죠. ㅋㅋㅋㅋ 뭐 다 제 맘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05-04 23:33   좋아요 1 | URL
격정세계
기다리겠습니다.

Falstaff 2024-05-05 10:25   좋아요 1 | URL
컨닝해보니, 별4더군요. ^^

은하수 2024-05-03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부터 너무하시네요 ㅠㅠ
이리 끝내버리시다니... 몰입최고조였는데 말이예요!
이상한막간극2로 후속리뷰 어떠세요?~~ 하하하하

Falstaff 2024-05-03 07: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내용을 다 밝히는 건 좀 그렇잖아요. 혹시 읽어보실 분이 미리 내용을 알게 될까봐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어보셔요. 이 출판사 책이 워낙 비싸서 직접 구입하면 어질어질 하거든요. ㅋㅋㅋ

stella.K 2024-05-03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극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야회 나온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감히 시도하기는 어렵겠죠. 코로나 전인가 카망마조픈가? 4시간인가 몇시간 하는 작품 울나라에서 올렸다는데 다시 그런 시도 안하잖아요. 3시간이 맥시멈인것 같습니다. ㅋ

Falstaff 2024-05-03 17:01   좋아요 1 | URL
들리는 말로는 ˝까라마조프...˝ 일곱 시간 했다는데 그건 일단 열외로 봐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건 작품 자체가 정말 재미나요. 시엄마가 며느리한테, 얘야 애 뗴고 다른 멀쩡한 남자 씨 받아라, ㅎㅎㅎㅎ 막장 자체라니까요. ㅎㅎㅎㅎ

잠자냥 2024-05-03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두껍다고 진짜 비싸게 받아처먹네요.
저 그래서 이거 출간 때 도서관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어요. -_-;
전자책으로 사봐야겠습니다.......근데도 2만원 넘음... 흐아.

Falstaff 2024-05-03 17:03   좋아요 1 | URL
아효, 저 사는 소도시에서도 냉큼 사주는데 서울에서 그리 야박해요? ㅎㅎㅎ 고향 뜨기 잘 했네. ㅋㅋㅋㅋ
재미나요. 근데, 그래도 <밤으로의...>가 더 좋더라고요. ㅎㅎㅎ 첫정이야, 첫 정.

잠자냥 2024-05-03 17:40   좋아요 1 | URL
한정된 예산 안에서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책으로 구입한다…. 고 ㅋㅋㅋㅋㅋㅋㅋ 아, 유진 오닐도 까이는 세상!

그레이스 2024-05-04 23:34   좋아요 1 | URL
올해 도서관 예산이 반토막 났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