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밍고 섬의 약혼 서문문고 17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박종서 옮김 / 서문당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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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시절을 잘못 만나 하필이면 괴테와 실러의 전성기 때 작품활동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거나 공연하지도 못한 불운한 (극)작가 클라이스트. 군인의 아들로 자신도 근위대 연대에 들어갔다가 잠시 제대해 수학과 물리 공부를 했으나 뭔 병이 있었든지 요양을 위하여 산천초목 경계 좋은 뷔르츠부르크에 갔다가 산세 수려함에 반해 오래 억눌렀던 창작의 불꽃을 피운 작가. 그러면 뭐 하나. 아리따운 약혼녀, 장군의 딸인 미네 아가씨한테 파혼도 당하고 나폴레옹은 조국 땅을 초토화시켜, 군인 가계의 형제 가운데 한 명인 클라이스트는 몸과 마음이 번다했던 19세기 초엽. 이때 한 모임에서 재색을 겸비했지만 병이 깊어 늘 우울한 유부녀 헨리에테를 알게 되고 1911년 포츠담에서 헨리에테와 함께 모습을 감춘 클라이스트는 호숫가에서 이미 숨이 넘어간 연인의 시신 옆에서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김으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니 당년 34세. 그는 몰랐지. 불과 1년만 기다리면 1812년, 프랑스 군은 러시아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큰 패배를 당해 14년에는 부오나파르테가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할 예정인 건. 그래도 백년이 더 지나 20세기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고 선언해주니 지하에서라도 조금의 기쁨을 누리기를.

  대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라고 하면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미하엘 콜하스>를 연상할 듯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극작가로 더 유명한 것 같다. 책방을 뒤져보면 희곡 작품이 소설보다 단연 많다. 하지만 당대의 독일어 권 지역에선 거의 신격화 수준이었던 괴테한테 찌그러져 별로 공연도 해보지 못했다 하니 거 참. <깨진 항아리> 같은 건 꽤 괜찮은 데 말이지. 내가 읽은 클라이스트는 전부 다 유럽, 독일 지역을 무대로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이번에 알았지만, “성 도밍고 섬”이 어딘가 하면,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이다. “산토도밍고”는 아시다시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이다. 그러나 작품의 무대는 도미니카보다 아이티 쪽.


  모두 세 편의 중단편을 실은 작품집이다. 이 중에서 표제작품 <성 도밍고 섬의 약혼>에 대해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산토도밍고 섬의 한 시절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섬을 차지한 프랑스의 큰 고민 하나가 점령한 이후에 원주민들을 노예 이하, 짐승 수준의 노동을 강요하고 동시에 픽션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폭력과 학대와 학살을 서슴지 않아, 사실상 아이티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의 원주민은 멸종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가동시키려 하는데 농장일을 할 일손이 있어야지. 그리하여 당시 서인도제도를 점령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 버릇 개 주지 못한 유럽 백인들은 과거 원주민한테 했던 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폭력과 학대와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과 노동, 그리고 성폭력을 저질러 흑인들의 불만이 꼭대기까지 쳐 올라왔다. 고통이 극단까지 치달으면 무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민란과 마찬가지 경우로 서인도제도의 거의 모든 섬에서도 흑인에 의한 폭동이 자주 발생했다. 이들이 프랑스인, 영국인, 스페인인을 가릴 수 있지 못하여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표식인, 흰 피부를 가진 종족이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없앴다. 마리즈 콩데의 소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를 비롯해 숱한 소설 속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세기 초, 흑인들이 백인을 학살한 산토도밍고 섬의 프랑스 영토 포르토프랭스의 기욤 폰 비누브 씨 농장. 이곳에 콩고 호앙고라는 이름의 늙은 흑인이 살았는데 아프리카 황금해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노예선을 타고 왔다. 평소 성격이 착하고 정직한데다가 주인과 함께 쿠바 섬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가 불어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인 비누브 씨의 목숨을 건져주었다. 이 일에 감격한 주인은 당장 호앙고에게 자유를 부여했으며 집안과 농장 일체의 관리를 맡겼다.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정직해 셈이 흐트러지지 않아 더욱 호의를 품은 주인은 방대한 농토의 총 관리자로 임명하고 전처의 먼 친척뻘인 혼혈녀 바베칸을 아내로 맡게 하였다.

  호앙고가 60세가 되자 적지 않은 퇴직금을 주어 은퇴를 시키고 비누브 씨가 죽은 후에 유산의 일부로 연금도 배당하게 해주었으니 세상에 이런 주종이 없었다. 그러나 황금해변 출신의 강건한 전사의 피는 속일 수 없어서, 식민지 내 프랑스 국민회의의 경솔한 결정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복수가 농장마다 요원의 불길처럼 휘몰아치자 모든 호의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비누비는 콩고 호앙고의 총구를 피할 수 없었다. 비누브 씨의 머리통은 호앙고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처음으로 닿은 곳이었다. 비누브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백인들과 피신했는데 호앙고는 기어이 그 농장까지 쫓아가 불을 지르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백인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제는 흑인들이 몇 명씩 단위를 이루어 백인 여행자를 습격하고, 멀리 까지 가서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는 백인들도 습격해 죽이는 일이 늘 발생했다. 호앙고는 백인 격멸을 위하여 아내를 닮아 피부색이 연한 열다섯 살 먹은 딸 토니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구 비누브 저택이 길가에 있어서 여행하는 백인들을 콩고 호앙고의 무리가 도착할 때까지 안심시키고 방비를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이를 위해 친엄마 바베칸은 딸 토니에게, 직접적인 교접을 제외하고 백인이 시도하는 모든 애무를 허용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1803년 경을 무대로 한 1811년 작품이다. 흑인들에 관한 인종 의식을 지금 수준으로 기대하면 곤란할 듯하다.

  콩고 호앙고가 약탈, 학살, 강도 업무차 출장을 간 시기의 한밤. 이 집의 현관을 두드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엄마 바베칸이 나가보니 백인 남자다. 백인은 흑인 남자들이 집에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를 멈추지 않는다. 바베칸과 토니는 그를 집으로 끌어들여 주민등록 조사를 먼저 한다. 그랬더니 프랑스 군인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스위스인 장교. 구스타프 폰 데어리트. 포르도 항에서 내려 포르토프랭스를 향해 가는 중이란다. 흑인 군대를 거느린 데살린 장군이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하기 전에 가야 하는 명령을 받았지만 어느 곳에서 흑인들의 공격을 받을 지 몰라 밤에만 이동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단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점잖은 나이 많은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아이들 다섯, 하인 몇 명과 하녀. 다 합해 열 두어 명. 지금 1마일 떨어진 갈매기 늪 근방의 동굴에 숨어 있다고. 이들 모두 몹시 배가 고픈 상태여서 음식물을 급히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한다. 바베칸 노파는 마치 동정심 많은 순박한 시골 농부처럼 위장해서 구스타프를 옛 주인인 비누브 씨의 방에 들여 푹 쉬게 해주고 음식물도 아이에게 들려 갈매기 늪으로 보낸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 속셈.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콩고 호앙고 일당이 도착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일은 끝난다.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구스타프에게 발 씻을 따뜻한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열다섯 살 먹은 딸 토니. 얘가 문제다. 흑인들도 피부색이 진하고 옅은 차이에 따라 우월이 있는 모양이다. 토니 자신이 보기에 자기는 백인의 후예라서 지금 집에 있는 흑인들하고는 당연히 차별을 둘 만큼 다른 신분으로 착각하고 있다. 구스타프가 봐도, 원래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마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다는 것처럼, 전혀 희지 않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토니가 뇌쇄적으로 어여뻐 보여 순간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토니 생각에도 조금 후, 길어도 내일 밤이 되면 또 수 십 명의 피가 튈 터이니 감자기 에스트로젠이 분비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했다. 하고 나니까, 이게 원래 그런 건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한다고 오해하는 감정이 폭발적으로 넘쳐난다. 가뜩이나 피곤했던 구스타프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지고, 내일 밤이 아니라 오늘 밤에 난데없이 콩고 호앙고가 들이 닥친다. 토니는 깜짝 놀라 구스타프의 방에 가보니까 노끈이 벽에 걸려 있어서 그걸 이용해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구스타프의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내버려두었으면 싸우려 들고, 그러면 여지없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포로로 잡힌 구스타프. 그러나 늙은 삼촌과 아이들이 도착하는데, 자세하게 보면 “늙은” 삼촌의 아이들이라 해도 스무살에 육박하는 장정들이다. 폰 데어트리 집안이니 귀족 떨거지 자제들이었을 테고, 그러면 총칼 다루는데 아주 익숙할 것.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눈치를 탁 채고 오히려 콩고 호앙고 일당을 제압해버린다. 그리고 토니와 함께 구스타프가 묶여있는 이층 방에 올라가니 눈이 뒤집힌 구스타프는 묶이 손이 풀리자마자 피스톨을 들고 토니의 가슴을 쏴버린다.

  1811년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영낙없는 낭만주의자였다. 이 시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총을 심장에 맞아도 할 말은 다 하고 죽는다.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안 알려줌.


  이 작품 외에 1807년작 <칠레의 지진>과 1808년 작 <O 후작부인>이 실려 있다. 다 수준 이상의 작품이다. 다만 번역한 박종서 전 고대교수가 우리나라에 독일문학을 번역 소개한 공로가 지대한 양반이긴 하지만 생몰이 1922~1983이다. 그러니 번역하고 적어도 40년 이상이 지났다. 다른 번역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젊은 분의 경우 읽다가 조금씩 어색한 곳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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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3-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창비세계문학에 클라이스트의 중단편 소설집 <미하엘 콜하스>가 있는데 이 책에 세 작품이 다 있어요. 한 번 찾아보시길요.

<미하엘 콜하스> 볼 때마다 그냥 지나쳤는데 어떤 분위기인데 알겠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3-12 16:3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저도 창비 <미하엘...> 읽었는데 전혀... ㅋㅋㅋㅋ 오래 전이라서 그랬나요? -_-‘‘

coolcat329 2024-03-12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미하엘 콜하스>를 가지고 있네요! 🤣🤣

잠자냥 2024-03-12 09:28   좋아요 2 | URL
창비 <미하엘 콜하스> 엄청(?) 재미나요. 번역이 뭔가 박력 넘쳐서 전 더 재미나게 읽었는데, 번역 문장 아무튼 아직도 칭찬하고 싶습니다. ㅎㅎ (진짜 진짜 아니 번역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신기& 감탄!)

coolcat329 2024-03-12 11:00   좋아요 1 | URL
오! 재미에 번역도 좋다니 사두길 잘했네요. 다음 읽을 책으로 찜!

Falstaff 2024-03-12 16:40   좋아요 0 | URL
음... 한 번 다시 읽어볼까.... 하다가, 안 그럴 거 같네요. 흑흑...

stella.K 2024-03-12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도 번역이지만 서문당 출판사가 아직도 있군요. 역자가 독일어 번역 1세대였을테니 그 공로는 인정할만 하지만 역시 혁신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저도 기회되면 창비걸로 읽어보겠슴다.

Falstaff 2024-03-12 16:42   좋아요 1 | URL
옙. 아직 연명은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휴... 생로병사가 다 그렇지요.

그레이스 2024-03-13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하엘 콜하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까지 생각나는 연쇄반응!

총을 맞고도 할 말 다하고 죽는...낭만주의! 그렇네요!^^

Falstaff 2024-03-13 16:24   좋아요 1 | URL
앗, 애너벨 리까지 연결이 되는군요!
라 트라비아타에선 20분 후에 죽어갈 비올레타가 극강의 고음으로 악을 악을 쓰기도 하는 걸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