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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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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헌책방에서 사놓고 일 년도 넘어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싫었던 이유는 도서관에 오스터의 최근 번역서 <4 3 2 1>을 희망도서로 신청할까 말까 고민했던 이유와 같다. <4 3 2 1>은 한 달을 망설였다가 신청하지 않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다음 달에 결국 신청을 했다. 2월에 도착할 거 같다(지금은 3월, 다 읽었다). 1,550 페이지에 달하는 <4 3 2 1>을 읽기 전에 워밍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드디어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어 치웠다. 여태 미루었던 건 오스터의 글이 비록 무지하게 재미있을지언정 그가 주장하는 바에 도무지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이의 작품으로 <달의 궁전>과 <뉴욕 3부작>을 읽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뉴욕 전문 작가.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인 “버터 맛”을 오스터만큼 진하게 풍기는 작가도 드물다. B급 헐리웃 영화, 볼 때는 정말 재미나고 흥미진진하지만 늘 비슷한 결말의 해피엔드를 장만해 극장을 나올 때 벌써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 그와 같았다고 할까? 하여간 나한테는 그랬다. 그리고 <브루클린 풍자극>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만일 별점을 준다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폴 오스터라서 별 넷은 주어야 마땅하다. 뻔한 미국식 스토리지만 오스터가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 역시 천생 이야기꾼이라서 일 것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의 주인공은 ‘네이선 글래스’라는 이름의 화자 ‘나’이다. 네이선, 애칭 ‘냇’이 비록 브루클린 태생이라도 세 살 때 부모 손을 잡고 뉴욕 교외로 나가 살다가 56년이 흘러 이제 쉰아홉이 된 중늙은이다. 몇 년 전에 폐암에 걸려 종양 제거술을 받은 다음 고통스러운 방사선과 화학요법을 거치느라 이런 병증을 겪은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기증, 탈모, 의지상실, 실직, 이혼의 과정을 겪고나서 이제 암은 조심스러운 낙관상태에 이르렀다. 31년 동안 미드애틀랜틱 생명보험회사의 맨해튼 사무실에 출근하는 생활도 종지부를 찍었고, 이름마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전처 이디스와 이혼하면서 브롱크스빌에 있던 집을 판 돈을 각기 절반씩 나누기로 합의해, 은퇴와 이혼에서 비롯했을 것이 분명하게 이제 서글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삶을 조용히 마감할 수 있는 곳으로, 상처입은 개가 그러하듯이 태어난 본거지로 기어들어온 것이었다. 프로스펙트 공원에서 반 블록 거리에 위치한 1번가의 뜰이 딸린 방 두 개짜리 저층 아파트에 세를 들어가보니 은행잔고가 40만 달러 정도.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지 충분히 버티고도 남을 형편이다.
중요한 전제사항이 바로 이거다. 은행잔고 40만 달러. 시공간이 2000년. 아무런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아침은 그냥 자기 손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달걀 프라이에 베이컨과 진한 커피로 때우든지 하고, 점심은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웨이트리스 마리너가 서빙을 하는 식당 코즈믹 다이너에서 해결한다. 저녁도 대충 식당에서 때우더라도, 사랑스럽기는 해도 골수 가톨릭에다가 의처증이 심한 남편을 둔 유부녀라서 전혀 가망이 없는 마리나한테 몇 백 달러짜리 목걸이를 기쁜 마음으로 선물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거다. 이걸 우습게 여기지 마시라. 세상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자본주의 나라 미국에서 남에게 비록 작더라도 선의를 베풀고 남을 돕고 살기 위해서는 Y2K 기준으로 은행잔고가 적어도 40만 달러는 있어야 한다는 거니까 독자여, 기만에 넘어가지 마시라. 근데 하는 거 보면 40만 달러가 아니라 4백만 달러 이상의 잔고가 있는 게 확실한 듯.
은퇴자 네이선 글래스가 브루클린 1번가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그는 남은 삶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나름대로 길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동안 저질렀던 모든 실수와 잘못과 어줍은 짓과 바보짓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이란 제목으로 종이에 옮기는 일. 이제 남은 냇의 유일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쓰고 있다가 자주 들러 책구경을 하던 헌책방 “브라이트먼의 다락방”에서 누이동생 준의 외아들이자 조카인 톰 우드를 만나면서 한 순간에 책의 주인공은 조카 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냇보다 세 살 적은 준은 24세 때 뉴욕타임스 경제담당 기자 크리스토퍼 우드와 결혼해 톰과 오로라를 낳고 15년 후에 이혼한다. 2년 뒤에 두번째 남편 필립 존을 거쳐 성년이 된 딸 파멜라를 둔 주식 중개인과 세번째 결혼하고 마흔아홉 살 때 뜨거웠던 8월 중순의 오후에 정원을 손질하다 뇌출혈을 일으켜 다음날 죽어버린다. 딸 오로라는 엄마의 재혼 이후에 삐딱선을 타기 시작해 벌써 가출해버렸고, 아들 톰은 코넬 대학을 우등 졸업한 후 4년 풀 브라이트로 미시간 대학에서 미국문학 공부를 이어가다 박사 논문에 너무 어려운 과제를 다루는 바람에 학문 자체를 포기, 낙담해 브루클린의 헌책방에서 희귀본과 필사본에 관한 월간 카탈로그 작업을 하고 있던 거였다. 한 시절 똘똘이 스머프였으나 이젠 볼품없이 뚱뚱한 체격에 군턱, 두툼한 손에 총기가 사라진 눈에는 좌절한 기색이 철철 넘쳐 흘렀다. 박사 논문을 포기하고 뉴욕에 와서 꽤 오래,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특별히 혹독한 고행의 한 형태이자 가장 소중하게 품어온 야망의 붕괴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택시운전을 하던 톰이 브라이트먼의 다락방에 와서 책구경을 하다 가게 주인 해리 브라이트먼에 의하여 스카우트되었다고.
동생 오로라는 가출 소녀들의 전형적인 최악의 코스를 따라 포르노 배우까지 하는 막장으로 흘러갔다가 오빠 톰에게 구조되기도 하고, 약쟁이 기타리스트 빌리, 약쟁이 바이올리니스트 그레그와 함께 각지를 떠돌며 음악활동, 즉 길거리공연을 하다 딸 루시를 출산한다. 약물중독에 빠진 오로라는 기적적으로 같은 약쟁이 데이비드의 도움으로 마약을 끊고 그와 결혼하지만, 아뿔싸, 데이비드는 광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고 말았다. 궁지에 처한 오로라는 자기 딸 루시 혼자 뉴욕행 버스에 태워 오빠 톰에게 보내고 남편에 의하여 집안에 유폐되어 버린다.
그리고 헌책방 주인 해리 브라이트먼. 양성애자에다 천부적인 사기꾼. 원래 이름은 해리 둥켈. 미국 중서부 지역의 기저귀 사업의 왕인 백만장자 칼 돔브로프스키의 못생긴 노처녀 막내딸 베트와 결혼해 아내의 돈으로 19년간 시카고의 화랑 “둥켈 플레르”를 호화롭게 운영하던 남자. 그의 복지와 사치를 보장해주던 천재 화가 알렉 스미스가 멕시코 옥사카에서 마흔 번째 생일날 술에 절어 지붕에서 뛰어내려 삶을 깨끗이 포기하는 바람에 덩달아 망할 처지에 속한 해리는 안 팔리는 추상화가의 제의로 알렉 스미스의 서명을 한 위조 회화를 세계 시장에 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꼬리가 잡힌 둥켈 씨는 결국 콩밥을 먹는다. 출소한 이후에도 자기 딸과 여전히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꼴을 보지 못한 장인 돔브로프스키 씨가 뉴욕에 작은 건물 한 채를 사주고 사업할 자금도 대주는 대신 이혼을 요구해 해리는 성을 둥켈에서 브라이트먼으로 바꾼 후 헌책방을 연 거다. 말이 헌책방이지 사실 희귀본과 작가 서명이 든 초간본, 필사본 같은 귀하고 비싼 책이 수입의 9할이 넘는, 우리가 아는 그냥 헌책방하고는 차원이 다른 가게를 열었다.
이렇게 네이선 글래스를 둘러싼 세 명의 문제적 인간. 외조카 톰과 오로라(종손녀 루시 포함), 그리고 해리 둥켈인지 해리 브라이트먼인지 하는 사기꾼. 이 인간들이 작품을 이끌어가는데 어째 정상적인 인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독후감 초입에 밝혔듯이 B급 할리우드 영화에서 너무 자주 본 것처럼 모든 것은 흘러가고, 결국 모두 잘 될 터이니. 해리는 지긋지긋한 사기와 양성연애 관계를 청산하고 드디어 즐거움을 찾아 구름 위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정신분열, 요즘 말로 조현병을 앓고 있는 서른한 살의 플로라한테가 아니라, 브라이트먼의 다락방 종업원이었던 톰 우드와 그곳에서 카운터를 보며 해리 자신과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나누던 에이즈 환자 루퍼스에게, 재산도 그냥 재산이 아니고 전 재산의 98퍼센트 이상을 몽땅 유증해버린다. 사실 이건 스포일러가 분명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이의 소설 결말은 그렇게 흘러가니까.
느닷없지는 않지만 하여튼 해리의 죽음으로 한 순간에 팔자가 바뀐 톰은 당연히 바로 직전에 한 아가씨와 사랑 비슷한 것을 시작했으니 이제 앞날엔 탄탄한 아스팔트 길만 남은 셈이다. 동생 오로라도 마찬가지로 새 삶과 새 사랑이 등장할 것은 뻔하고, 한 때는, 아니, 바로 직전까지,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부르짖었던 화자 ‘나’ 네이선 글래스는 유리glass가 한 방에 깨지듯 다 늙어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며 하느님과 화해하면서 미국인 누구나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 완성된다. 역시 미국, 아니 신자유주의가 팽만한 세계의 모든 곳에서 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바로 돈이다.
어때, 재밌겠지? 이보다 더 읽기 좋은 성인 동화는 아마 보기 힘들 걸? 너무 행복해져서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환상이 지랄로 변하는 현상도 겪을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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