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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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라스의 1953년 발표 작품. 30대 후반에 쓴 장편소설. 아직 누보로망으로 선회하기 전이라 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여기서 “수월하게”라는 건 뒤라스의 작품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평온한 삶>이나 <태평양을 막는 제방> 같은 초기작품이 아니라서 이미 스토리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내 경우엔 딱 적당할 정도의 건조함이 있어서 좋았다. 완전한 심리소설. 사람이 품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 얼핏 보기엔 변덕일 수도 있고, 질투, 신경질, 히스테리일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 삶의 저층을 이루어 삶을 지탱해 나가게 만드는 장치인 인내와 배려에 더 가까워 보이는 감정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지를 보여준다. 얼핏 읽으면 <모데라토 칸타빌레>와 비슷한 느낌이다. 대서양-겨울과 지중해-여름의 차이는 있으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모데라토…>보다는 덜 버석거린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정강이뼈 부근 바닷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 한결 같은 무더위가 대기를 지배하는 이곳은 밤조차 누구에게도 휴식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더위에 땀을 많이 흘리며 힘들게 잠에 빠져 있건만 함께 온 젊은 가정부는 창문을 활짝 열어 두라는 주인의 말을 결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라와 자크가 어린 아들과 함께 이곳으로 휴가를 와 보니, 여름 휴가지로 자크는 아주 싫지는 않다고 하고, 사라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이 이 해변가로 온 이유는 사라와 오랜 우정을 맺은 남자 루디의 추천 때문이었다. 루디 역시 아내 지나와 함께 조금 떨어진 숙소를 빌려 지내고 있는데, 이 커플은 12년 전부터 이곳에서 휴가를 나고 있으며 12년전 보다 이전에 이곳에서 만나 결혼까지 했다. 이 두 부부와 친하게 지내는 다이아나는 호텔에 숙박하고 있어서, 아이까지 합해 여섯 명이 일행을 이룬다. 이상 기후 때문에 파리와 베를린은 섭씨 42도를 넘어서고 로마는 45도까지 치솟는 여름이다.

  이들이 도착한 휴가지는 산에 둘러싸이고 바다에 면해 거의 완전히 고립된 지형으로 산에서 바다로 사라 부부가 묵는 별장 몇 미터 앞에 너르게 은빛 강물이 흐른다. 이 강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곳이라고 사라는 생각한다. 고립된 바닷가라서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무덥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대전에 휩쓸리는 등 역사의 풍파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고립 지형이 전력적으로 보면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으니까. 이레 반이라니까 한 열흘 전쯤 루디의 별장 뒷산에서 지뢰제거 작업을 하던 청년이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폭사해서,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산에 도착해 아들 시신의 파편을 찾고 있었다. 이제 작업은 끝났지만 갑자기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아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 나이든 어머니는 청년의 사망확인서에 서명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동네의 식료품점 주인은 이 노부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늘 산에 올라 함께 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은근히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기 바라는 것 같다. 이 사건 때문에 여름휴가지인 이곳에선 모든 무도회가 취소되었으며 마을 전체가 상중으로 변한 기분이어서 많은 휴가객은 죽은 청년의 부모가 빨리 떠나주기 바란다.

  산기슭의 강을 따라 모여 있는 삼십여 채의 집. 이들과 나머지 세상을 잇는 건 오직 바다로 가로막힌 7킬로미터 남짓한 흙길 뿐이라서, 삼십여 채에 세든 세계 각지의 휴가객들은 서로가 어떻게 휴가를 지내고 있는지 훤히 눈치를 채고 있다. 모든 휴가객은 사라와 자크 커플, 그리고 루디와 지나 커플이 왜 그런 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로 격렬하게, 자주 싸움을 하는 지는 알고 있다. 원래 이런 곳에서 여가, 수영, 보트, 낚시 다음으로 재미있는 건 같은 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라서.


  실제로 두 커플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결혼한 대다수의 커플은 늘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는 거 아닌가? 극소수는 커플 중 한 명이 그냥 죽어 지내는 거고. 위에서 말한 동네 식료품점 주인이 그런 경우이다. 어찌어찌 결혼을 했는데 도무지 아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거 같지 않다. 자신은 아내를 정말 사랑하건만 아내는 오직 가게를 운영하고 확장하는 것에만 모든 정열을 쏟는다. 식료품점 주인은 아내가 하필이면 나 같은 남자를 만나서 사랑이 없는 삶을 사는 거라고 짐작해서, 아내를 위해 남자들과 가깝게 지낼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남자한테도 관심이 없고 남편의 이런 노력에 격하게 화를 낸다. 오직 가게 확장과 돈벌기에 몰두하던 아내는 결국 카운터에서 장부를 검토하다가 그 자세를 그대로 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자신은 그만두고 아내가 하다못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가능성이 있으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던 남자. 뭐 그렇다는 거다. 그게 진실인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 등장인물, 그리고 독자들도 알 방법이 없다.

  루디와 이곳 출신인 것 같은 아내 지나도 비슷하다. 루디는 지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나 지나는 루디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사람들은 안다. 역시 독자도 안다. 지나 역시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지나의 생각과 다르게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지나는 매사에 남편과 부딪히고 그때마다 화를 폭발시키며, 그 강도가 가볍지 않아서 이곳의 휴양객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지나 역시 식료품점 주인과 함께 매일 산에 머물고 있는 지뢰 폭발로 죽은 청년의 부모를 만나러 가며 그들의 점심식사를 챙겨준다. 남편 루디는 점심을 먹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으면서.

  산에서 청년이 지뢰폭발로 죽은 다음 날, 이곳 해변에 멋있고, 빠르고, 어떻게 봐도 비싸게 보이는 보트를 몰고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장Jean. 약간 차갑지만 호감 가는 스타일의 남자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30대가량으로 보이는 싱글이지만 집에 아내가 있다고 나중에 말한다. 멋진 배를 아직은 얻어 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그룹 가운데 두 명이 남자의 보트를 타고 싶어한다. 루디와 (사라의)아이. 이틀 전 사라가 호텔에 가서 친구 다이아나를 부를 때 남자와 처음 대면한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떨떨하게 인식했고, 사라는 그가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런 건 원래 순식간에,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니까. 이후 이들은 이틀 연속 이 시간에, 이 자리에서 만나 대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말한다. “원하시면 제 배로 해안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어요.”

  이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역시 남편 자크는 본능적으로, 즉각적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아내에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 늘 하던 대로 호텔의 캐노피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프랑스인들이 즐기는 쇠공 놀이를 하는 시간에 사라가 남자와 슬쩍 자리에서 사라져도 알고만 있을 뿐 뭐라하지 않는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말릴 필요가 없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크가 다이아나와 깊은 사이가 되는 것을 사라가 눈치를 챘으면서도 남편한테, 다이아나한테 말하지 않는다. 서로가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보다 만일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면 자신들 사이의 사랑이 한 순간에 증발할 것 같아서.


  자크가 짧은 여행을 제안한다. 지금 처한 상황을 바꿀 전환을 마련하기 위해서이지만 사라는 별로 관심이 없다. 처음엔 그랬다. 옛 로마 사람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의 후예, 고대 에트투리아인들의 공동묘지를 보러가자고. 그곳에 가면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볼 수 있다면서. 사는 게 다 그렇다. 위기를 맞고, 전환을 하고, 그래서 다시 조금 더 살고. 그게 인생이지.

  흥미롭게 읽었다. 어떻게 이리 세심하게 그것도 건조한 문장으로 사람의 심상을 그려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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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2-23 0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채영주, <크레파스>
회요일. 조엘 해링톤, <뉘른베르크의 사형집행인>
수요일. 이스마엘 카다레, <잘못된 만찬>
목요일. 정지돈,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
금요일. 이언 매큐언, <암스테르담>

반유행열반인 2024-02-23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ㅋㅋㅋ팔백작님 일목요연 한바닥 정리 보니까 소설 읽은게 다시 살아나는 것 같네요. 사람들이 독후감만 읽고 책 안 읽게 되면 어쩝니까? ㅋㅋㅋ 저는 뒤라스 소설에 비교적 젊은 애들이 유럽 여기저기 휴양 다니고 권태 느끼고 하는 거 보면 부럽다 못해 배아프더라구요. 야 그렇게 무료하면 책 읽어 책, 헛짓거리 말고… 난 이놈들처럼 지겨워 죽을라고 안 하고 잘 놀 자신 있는데…보내줘 지중해ㅋㅋㅋ

Falstaff 2024-02-23 16:39   좋아요 0 | URL
앗, 독후감이 그리 상세합니까? 에구... 조심해야겠네요. ㅜㅜ
ㅎㅎㅎ 휴가 다니는 거 저는 별로 부럽지 않던데요. 걔네들도 결국은 인구의 1~5% 인간들한테만 허용되는 거더라고요. (수치는 믿지 마시고요. ㅋㅋ)

blanca 2024-02-23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최근 <모데라토 칸타빌레> 읽었는데 스토리가 사라졌네요. 대체 어디까지가 서사고 어디까지고 상상인지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 Falstaff님 리뷰 보고 <태평양 옆 제방> 읽었는데 저의 최애 작품이 되었답니다. 진짜 잘 쓰는 작가인 것 같아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4-02-23 09:57   좋아요 0 | URL
<태평양 옆 제방> 저도요! *덥석!* 사람들이<연인>보다 이걸 읽어야 하는데....

Falstaff 2024-02-23 16:42   좋아요 0 | URL
아휴,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저는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좀 더 좋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뭐 중요한 건 아닙니다. 뒤라스가 매혹적인 작가니까요. 저도 아래 잠자냥 님 댓글처럼 <연인> 또는 <애인>이 뒤라스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것이 싫은 인간입니다. ㅎㅎ

잠자냥 2024-02-23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폴스타프 님이 5별 줄줄은 몰랐어요. ㅎㅎ

Falstaff 2024-02-23 16:43   좋아요 1 | URL
세련된 심리묘사가 있잖아요. 그것만 가지고도 별5 안 되겠습니까? ㅎㅎㅎ

moonnight 2024-02-23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 구판으로 읽었는데 어렴풋이 줄거리가 떠오르네요^^ 예쁜 책으로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Falstaff님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2-23 16:4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진짜 별 거 없는 독후감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