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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고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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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작가의 매력적인 작품 <내 말 좀 들어봐>의 후속편이다. <사랑, 그리고>를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거의 반드시(꼭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를 먼저 읽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독후감을 쓰기에 앞서 전작의 스토리를 대강이라도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다. 웃기지?
주인공 격인 등장인물은 세 명. 스튜어드 휴스, 나이젤 O. 러셀, 반은 프랑스 반은 영국계인 질리언 와이엇. 스튜어드 휴스는 전형적인 잉글랜드 인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낭만이나 인생의 선망도 없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쌓아가는 범생이. 나이젤은 독특한 천재형으로 여러나라의 언어를 자유스럽게 구사하며 음악, 미술, 문학, 철학 등 모든 방면에 구애받지 않고 2박3일간 구라를 풀 수 있는 골통 낭만형 인간으로 그만큼 실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이젤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하다가 갑자기 나이젤을 버리고 O, 즉 올리버로 불리기 바라면서 자신의 은행 계좌마저 올리버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개설한다. 미술품 복원 일을 하는 질리언은 어린 시절에 영국인 아버지 고든 와이엇 씨가 아내와 딸 질리언을 버리고 딸이 아닌 질리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 질리언의 이복동생 질리언을 낳고 사는 바람에, 프랑스인인 어머니 마리-크리스틴과 함께 영국에서 살다가, 나이 서른이 가까이 오자 에잇, 결혼이나 해버릴까, 싶어서 짝짓기 앱에 접속해 만난 스튜어드와 사랑을 맺어 결혼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둘의 결혼식 때 신랑과 죽마고우 사이였던 올리버가 들러리 겸 증인으로 시청 공증센터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해서 그만 한 눈에 신부한테 반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신혼여행에 쫓아가 첫날 밤 술을 잔뜩 퍼마시고 신랑 신부 사이에 누워 까무러쳐버릴까, 잠깐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여행에 돌아오자마자 스튜어드의 출근과 동시에 득달같이 꽃다발을 들고 현관문을 쾅쾅쾅 두드려 질리언이 문을 열기만 하면 큰 소리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외치고 도망을 쳐버린다. 오후가 되어 스튜어드가 퇴근해 집에 들어온 것을 보면 속으로 시간을 재 퇴근 후 개인위생 시간이 분명한 짧은 순간에 전화를 해, 질리언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고백을 해버린다. 질리언의 기분이 어떻겠어? 어떻긴 어때, 한 남자가 자기더러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가만 보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 거 같은데 어떻게 불쾌할 수 있겠어? 그리하여 질리언은 거의 즉각적으로 스튜어드와 이혼을 감행하고 올리버와 새로 결혼을 해버렸다. 근데 스튜어드가 생각해보니 자기 결혼할 때 친구 올리버가 왔는데, 올리버가 결혼하면 자신도 가서 축하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갔다. 이것으로 세 명의 인생살이 난장판, 또는 난장판 인생살이를 시작하는데, 스튜어드가 이마빡으로 올리버의 콧잔등을 받아버려 코피가 줄줄 터지기도 하고, 프랑스 툴루즈에 그림 복원 일이 많다고 해 그리고 이사를 한 올리버-질리언 부부는 작은 마을의 한 가운데서 대판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올리버가 질리언을 두드려 패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딱 이 때, 맞은편 호텔 객실에서 창문을 통해 사진 한 컷을 찰칵, 찍은 인물이 있었으며, 그게 스튜어드였던 거다. 물론 뒤로도 여러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이 정도만 알고 <사랑, 그리고>를 읽기 시작해도 충분히 작품을 즐길 수 있다.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아쉬운 점을 먼저 밝히면,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 <내 말 좀 들어봐>와 <사랑, 그리고>가 지금 말로는 품절, 내용상 절판이어서 출판사 열린책들이 당분간 중쇄를 찍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역자 신재실 선생이 줄리언 반스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아서 지금 여든 둘이라 다시 판을 내는 건 쉽지 않다고 보고, 출판사가 자기 회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개정판을 내지 않으면 개인들이 책꽂이에 꽂아 놓기 쉽지 않을 터, 줄리언 반스가 노벨문학상이라도 받으면 그때야 개정판을 찍으라는 내 말을 들을 지, 갑갑하다, 갑갑해. 누가 번역을 하든지 나이든 신선생보다 더 좋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말씀이야.
<내 말 좀 들어봐> 이후 신자유주의의 시계는 능률능률 흘러가 어느덧 1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스튜어드는 워싱턴에서 금융회사에 근무하며 여전히 질리언의 엄마 마리-크리스틴 와이엇 여사의 재정을 관리해주다 볼티모어로 옮겼고, 테리라는 여자와 결혼해 몇 년 살다가 이혼해 버린 후, 그곳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미국이라는 나라, 기회를 잡아 한 친구와 함께 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크게 재미를 보고, 친구에게 적절한 돈을 받고 자기 지분을 판다. 이후 다른 동업자와 함께 다시 식당을 열어서 맛집으로 키워 또다시 돈을 받고 팔아, 이제 식당업은 그만 두고 유기농 식품 유통 사업을 벌여 다시 한번 대박을 친다. 꽤 돈을 모은 스튜어드는 영국으로 날아와 얼핏 시장조사를 해보니 영국, 런던 지역에서도 유기농 식품 사업을 하면 꽤나 전망이 밝을 것이라 여겨 정말로 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원래 진짜 사업을 할 목적으로 온 것인지는 좀 애매한 것이, 책을 시작하자마자 스튜어드는 10여년 만에 올리버 러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녕하신가!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스튜어드다. 스튜어드 휴스. 그래, 그렇고말고. 그렇다. 10년 전쯤 일이지. 그래 많이 변했어. 백발이 다 됐지. 반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야.” 어쩌고저쩌고, 전화번호는 전화번호부 책을 보고 알아냈지, 소통을 시작하면서 사달을 낸다.
에잇, 그것 참. 스튜어드는 왜, 어찌하여 이제는 잊거나 그저 가슴 속에서만 간직해도 마땅하고 충분한 옛 시절의 사랑을 굳이 오늘에 되살리려 하는 것일까? 아직 모른다고? 뻔하지, 십여 년 만에 귀국해서 처음 한 일이 질리언(분명히 올리버는 아니다)을 찾아내는 일이었으니 당연한 거 아냐? 정답은 책의 제목에 있다. “사랑, 그리고” 영어로 “Love, etc”. 스튜어드는 사랑에 인생을 건 인간형이기 때문. 반면에 올리버는 ‘그리고’, ‘기타etc’가 사랑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인간형이다. 질리언은 이 두 명의 극과 극 형질 사이의 한 점에서 적절하게 진동폭을 지닌 유연한 인간형이고.
10여 년 전에 재산을 분할할 당시, 스튜어드와 질리언이 살던 집의 적정가 절반을 스튜어드가 질리언에게 현금으로 주고, 질리언이 올리버의 거처로 옮긴 적이 있었다. 당시 질리언이 아무래도 조금 미안하던 바, 시세보다 약간 덜 쳐서, 나쁜 말로 좀 밑지고 나가줬던 거였고, 그걸 스튜어드도 알고 있어서 자기는 크기만 크고 썰렁한 셋집에 살면서, 여태 좁은 집에서 살림도 하고 그림 보수 작업실로도 사용하는 질리언 가족, 부부 외에 두 딸을 합해 네 식구한테 옛집에 들어와 살도록 조치해준다. 당연히 여전히 돈벌이와 세상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올리버의 처지를 감안하기도 했던 것. 그러나 세상에 좋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나? 한 사람이 보기에 정당하고 적절한 조치와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터무니없이 틀린 조치나 행위일 수 있으며 심지어 범죄행위일 수도 있는 것.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이 두 소설 <내 말 좀 들어봐>와 <사랑, 그리고>가 1인칭 소설인데, 수시로 화자가 바뀌면서 각자 1인칭 화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말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에게 배신을 당해 생각할 수 없이 깊은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스튜어드. 그는 미국에서 십여 년간 객지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즐기면서도, 인간에게 유일한 사랑은 첫사랑뿐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 강박이란 주변인의 끊임없는 조언에서 후천적으로 박힌 생각이 아니라 그냥 그런 체질이라서 그렇다. 전혀 밥벌이를 하지 못해 나중엔 하다못해 스튜어드의 사업체에 운송원으로 들어가 회사 사장 스튜어트한테 직원들이 훤히 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실실 농담처럼 보스를 대하는 태도를 숨기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 올리버 역시 어머니의 자살에서 비롯한 유추로, 학습한 사회부적응이 아니라 기질적 사회부적응과 우울증을 보유하고 있는 거다. 완전히 다른 형질의 사람들 사이에 혼인이란 제도로 강하게 끼였었거나 낀 상태의 질리언.
세상에나, 책 읽은 소감은, 스튜어드가 그냥 자기 혼자 잊고 살든지, 지 앙가슴에 묻고 살든지 했으면 자기는 자기대로, 올리버-질리언은 또 이이들 대로 불행하지만 이럭저럭 한 평생 살 수 있을 것을, 꼭 그렇게 인생을 주물러 터뜨려야 했을까, 하는 점.
줄리언 반스가 여전히 휘황찬란한 문장을 날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본편 만한 후속편이 드물 듯이 <사랑, 그리고>가 재미로 치면 <내 말 좀 들어봐>보다 약간 못 미치지는 않았어? 하여간 난 좀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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