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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ㅣ 큐큐클래식 6
미시마 유키오 지음, 정수윤 옮김 / 큐큐 / 202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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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대표선수 미시마 유키오. 유럽에서는 세기말부터 시작해 늦어도 1920년대엔 서쪽 고개로 해 넘어간 사조였다. 그걸 죽자사자 70년대까지 부여안고 있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인기는 나한테는 도저한 수수께끼다. 일본문학에 관한 한 대단한 편식을 하고 있어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 문학에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잘 몰라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미시마 유키오의 인기는 어처구니없게 시인 김후란이 번역한 학원사판 <우국>의 한 구절을 한때 소설가라고 주장했던 신모가 슬그머니 카피했다는 말이 나온 이후인 것 같다. 중학교 다닐 때던가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금각사>는 읽어본 적 있는데, 그땐 입 안에 여전히 젖내가 가시지 않았던 때라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몰랐다. 이후 그의 군국주의적, 천황제를 옹호한 이력을 들어서인지 여간해 손이 가지 않다가 <가면의 고백>과 《오후의 예항/짐승들의 유희》를 읽었다. 이 두 권으로 미시마 유키오는 끝을 냈으면 좋았겠는데, <오후의 예항>과 <짐승들의 유희>의 실망, 실망이라기보다 허탈을 기억하지 못한 채 기어이 도서관에서 상호대차까지 신청해 <금색>을 읽고 말았다. 금색禁色. 황금빛이 아니다. 금주, 금연하듯이 색을 끊으라는 금색이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색은 연애가 아니고 다분히 허리하학적인 의미에서 색이다.
탐미주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아름다움에 탐닉한다는 건데, 이게 조금 발전하면 다른 모든 질서를 무시하더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세기말 풍의 작가들, 별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카이절링이나 위스망스 같은 이들도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도덕의 파괴가 거의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기존 질서와 권위, 율법, 현존하는 미적 감각을 부정하고, 파괴한 후 극복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인지는 조금 아리송한 결과를 초래하여, 작가들이 주장하는 퇴폐주의 비슷한 아름다움을 당시와 후세의 독자들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지는 그이들이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는 <금색禁色>에서 65세의 원로 유명 소설가 히노키 슌스케와 이폴리트처럼 아름다운 청년 스무 살의 미나미 유이치를 등장시켜, 객관성을 극단적으로 희생시켜 감각적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노 소설가가 유이치의 청춘 시절을 리모컨 컨트롤하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1894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타고난 문재로 일본에서 명성을 누리는 소설가가 된 히노키 슌스케는 아쉽게도 대단히 못생긴 얼굴과 보잘것없는 체구를 지녔다. 그럼에도 이이의 소설이 워낙 좋은 평가를 받아 일문학사에 대단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건 나중 일이고 20대 초반에 결혼을 한다. 처음 얻은 아내는 집안의 물건 가운데 좀 쓸만한 건 죄다 내다 팔아 돈으로 만드는 습관이 있어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아내는 조현병 증세가 있어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해 방지하는 주술을 쓰느라 상대 여성의 옷을 구해(왔다고 주장해) 그걸 페르시아 양탄자 위에서 불을 피우는 등 히스테리 증상이 도져 결국 또 한 번 이혼을 해야 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는 젊은 시절부터 우유배달 총각 등과 가리지 않고 바람을 피우다가 쉰 살이 됐을 때 슌스케와 함께할 추한 노후가 두려워 자기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청년을 부둥켜안은 채로 겨울 바다로 몸을 던져 동반자살을 하고 만다. 사체는 후에 파도에 떠밀려 아누보곶으로 떠밀려 올라왔는데 이미 용해된 두 육체는 젖은 닥종이처럼 붙어버려 피부를 서로 공유한 모양새였단다. 이를 억지로 분리해 아내는 화장을 원했지만 굳이 관에 담아 매장을 했고, 시신에 처리한 방식은, 내가 자판을 두드려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세 번의 결혼과 열 번의 꼴사나운 추태로 끝난 연애 이후에 슌스케는 여성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증오에 싸이게 된다.
올해 5월에 하코네 온천에다 작업실을 차리고 소설을 쓰던 슌스케 앞에 가벼운 늑막염 때문에 요양차 하녀와 둘이 내려온 열아홉 살 여자 손님 야스코를 알게 됐다. 도쿄의 유명 백화점 지배인의 딸인 야스코 역시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아가씨로 한눈에 할아버지가 히노키 슌스케 선생인 줄 알아채고 금방 친하게 지낸다. 이후 도쿄로 돌아온 야스코는 종종 슌스케의 집에 놀러 오는 사이가 됐다. 책을 열면 첫 장면이 야스코가 놀러와 등의자에서 쉬는 슌스케의 무릎 위에 스스럼없이 앉는 장면이다. 아무리 여자가 열아홉 살 처녀라도 비록 못생기고 늙고 점잖은 작가이기는 하지만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아양을 떠는 장면을 읽으면서 둘이 이미 깊은 관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독자는 파렴치한이나 변태일까, 정상일까? 게다가 65세의 슌스케가 손으로 야스코의 턱을 들고 키스를 하는 장면도 있는 바에. 하여간 이러다가 야스코는 집으로 돌아가고 이후 몇 주 동안 연락이 없다. 궁금해진 슌스케가 야스코의 집에 가서 하인에게 물어보니 친구하고 이즈 반도로 여행을 떠났단다. 하인에게 연락처를 얻어 득달같이 이즈 반도에 도착해 같은 여관에 체크인한 슌스케는 야스코를 찾아 해변가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슌스케의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청년. 못생긴 외모로 태어나 평생 열등감에 시달린 슌스케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청년을 끔찍하게 증오한다. 타당한 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그가 바로 세가와 야스코의 약혼자이자 도쿄의 유명 사립대학에 재학중인 스무 살의 미나미 유이치. 완전한 청년, 완전한 외면의 미를 구현한 모습으로 평생 작가 히노키 슌스케의 꿈이었다. 그리하여 슌스케-야스코-유이치가 삼자대면을 하게 되고, 상황을 알아챈 유이치가 그날 밤 슌스케의 방으로 찾아와 둘 만의 대화를 나눈다. 슌스케는 아직 천사같이 순결한 몸이라는 것. 비록 어제 밤을 야스코의 옆자리에 누워 잤지만 결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두 명 다 방을 거의 꼴딱 세우며 자는 척을 했단다. 이게 가능해? 깜짝 놀랄 일이지만 가능하다. 미나미 유이치는 오직 남자만 관심이 있었던 거였다. 그걸 야스코에게 말은 못하고, 대화는 얼마든지 좋지만 직접 피부가 닿는 일은 끔찍하게 어색해서, 견디다 못한 유이치는 노인 슌스케에게 선생께서 야스코와 혼인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쳐죽일 말까지 하고야 만다. 집안이 점점 곤고해져 자신이 결혼하기엔 돈도 모자라다면서.
슌스케는 유이치의 성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야스코와의 결혼을 권유한다. 그가 슌스케의 관념이자 예술 작품의 화신이라 생각해서이다. 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기존 질서와 율법의 해체에 관한 많은 말을 하고, 괜찮다고, 괜찮으니 자신이 45만 엔을 무상으로 줄 터, 야스코와 결혼을 하란다. 이 늙은 잡놈 소설가 히노키 슌스케 하는 짓을 읽으면 저절로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쓴 <위험한 관계>에서 발몽 자작과 메르퇴이유 남작부인을 생각하게 된다.
“결혼에 욕망은 필요 없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은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잊었네. 상대를 그저 장작개비라고, 방석이라고,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이라고 생각하게. 자넨 분명 거짓 욕망에 달아올라 상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걸세. 다만 거듭 주의할 것은 상대의 정신을 인정해선 안 된다는 점이야. 자네 역시 정신의 찌꺼기조차 남겨선 안 되네.”
이렇게 아름다운 청년 유이치는 야스코와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서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고, 유이치는 곧바로 도쿄 시내 곳곳을 다니며 게이 사회의 총아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작품은 유이치의 문란한 행각이 중심이 되면서, 야스코의 가정생활과 출산, 슌스케 주위의 거물 등으로 확장한다.
내가 경끼를 일으킨 것은 아무리 1950년대가 그랬다고 해도 슌스케와 기타 남자 등장인물들이 거침없이 여혐 대사를 쏟아내는 것과, 도대체 뭘 주장하는지도 헷갈리게 현학적인 단어와 구절을 쏟아내며 정신과 도덕률과 질서를 파괴하자는 “멀미할 정도로 과도한” 주장이며, 촌스럽게 게이 문학 자체가 아니라 천편일률적으로 젊고 어린 연애 상대를 찾아 문란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잊지 않고 하나 더, 슌스케의 세번째 아내 시신처럼 저절로 떠오르기까지 하는 잔혹한 장면의 여과되지 않은 묘사도 포함하자. 처참, 참혹한 시신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별개로 하지만. 또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도 안 되고 마땅하지도 않은 마지막 장면. 그게 뭔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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