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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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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인물 소개를 하는 게 새삼스럽다. 1922년생, 2010년 몰. 미국의 역사학자, 정치학자, 사회비평가, 사회운동가, 극작가로 <미국 민중사>의 저자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비롯해서 모든 평등과 평화를 위한 운동에 참가한 골수 진보 좌파 인물.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의 원래 제목은 <Marx in Soho>다.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을 당해 프랑스에서 장가들어 살다가 치사하게 조국이, 얘 위험한 애래요, 프랑스 정부에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벨기에로 갔고, 거기서도 추방당해 런던으로 옮겨 진짜로 살던 곳이 ‘소호Soho’다. 진은 미국과 현대를 무대로 마르크스를 초청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무대를 영국의 Soho가 아니라, 마침 뉴욕에도 Soho라는 동네가 있어서, 마르크스가 귀신이 되어 뉴욕의 소호에서 예수도 못한 재림을 하는 것으로 정했다. 여기서 “예수의 재림”은 나 같은 유물론자가 불경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귀절이 아니다. 진이 작품 속에서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 한 말을 따왔을 뿐. 하워드 진은 열일곱 살 때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은 이후에 마르크스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연히 반은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 아니면 적어도 마르크스 주의자로 살다가 1989년에 충격을 먹는다. 세상의 모든 볼셰비키는 쿠바나 북한 등 극도로 좁은 땅에서만 억지로 숨을 유지한 채 근근이 명을 이어가고, 소비에트, 동독, 동유럽, 남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한 순간에 증발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근데 말은 정확하게 하자. 공산주의가 사라졌다고?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진 건 확실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내 생각을 밝히자면, 인류는 공산주의를 한 번도 실천해본 적이 없다.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공산주의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태까지 몇 번 강조한 거 같은데,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를 흔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해서 공산주의 체제는 애초에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심각한 오해다. 20세기 이후 공산주의를 하겠다는 국가에는 하나같이 공산주의를 빙자한 골통 파시스트들이 창궐, 번창했을 뿐. 카를 마르크스는 애초에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봤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하나. 천생 마르크스 주의자인 하워드 진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보고 있다.
여태 인간의 역사는 한 번의 공산주의도 실현시키지 못했듯이, 앞으로도 공산주의는 결코 인간의 손으로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하게 순진하고 낙천적이지만 바쿠닌이 옳을 지도 모른다. 모든 특권과 특권적 위치는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죽이는 것이라고 애초에 권력 자체를 부정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마르크스의 유령이 (1999년 작품이니)20세기 말 뉴욕에 나타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모노드라마다. 그리하여 그라운드 제로 이전인 1999년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하워드 진은 공산주의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 이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혁명이 유효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인류 역사에 마지막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지막” 혁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말 하워드 진의 전망이 옳을까? 나는 어떻게 1999년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99년이라면 당연히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해 자유무역협정 같은 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진은 이런 현상을 미국, 아니다, 세계의 모든 부를 극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는 반면 부자/자본가들은 대다수 임금노동자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착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하여 딱 이렇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모든 (주식회사를 포함한)개인(들의)기업은 사회적인 악이라고.
언제나 문제는 권력이다. 마르크스의 입을 빌린 하워드 진은 새로운 공산주의의 모델을 프러시아-프랑스전쟁 당시의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독자적으로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키고 수립했던 “파리 코뮌”을 제시한다. 프랑스 제3 공화국이 다시 왕정을 복고하고 독일과 굴욕적인 정전협정을 맺으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궐기한 사건이다. 당시 프러시아 출신으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여우 재상 비스마르크가 당당히 군대를 파리에 입성시켜, 시민들로 하여금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음을 시위만 하고 살짝 빠져버렸다. 보불전쟁을 프랑스 측에서 발발하게 만들고 정작 전쟁이 터지자마자 초장부터 프랑스를 싹 쓸어버렸던 비스마르크는 파리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데도 성공하여, 시민들은 객관적 전투력의 불리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조건의 정전협정에 크게 불만을 갖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여간 이렇게 정부를 뒤집어 엎은 파리 코뮌은 불과 2개월 열흘 만에 정부군의 진압으로 3만명을 한 자리에서 총살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진은 코뮌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평가하지만, 그의 말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코뮌이 두 달이 아니라 반년, 일년을 가도 마르크스가 원했던 선한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누군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 필연이기도 하다. 아니라면 단박에, 적어도 일정한 가속도를 가지고 코뮌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 상태로 떨어질 것이란 점은 역사를 통해 너무도 많이 보아왔지 않나. 저 멀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좋다, 코뮌이라 하자!)부터 시작해서.
만일 극소수의 부자들이 전체 부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들의 부를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고, 합상식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위 몇 퍼센트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고,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이며 부작용도 적을 것이다. 이게 21세기의 진보, 21세기의 좌파가 따져야 할 과제 아닐까 싶다. 자신의 평생 소원이 강남 건물주인 사람은 이제 좀 왼편에서, 진보에서 꺼져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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