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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71
라오서 지음, 김의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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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영재 출신 작가. 자기 실력 하나로 어려운 시절에 나름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숱한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문화혁명 와중에 당한 린치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험한 한 세상을 등진 라오서가 어쩌면 자신의 특기인 블랙 유머를 유감없이 펼친 작품이 <이혼>이다.
1933년 작품. 서른네 살의 라오서는 이제 결혼 3년차였다. 영국에서 다년간 살다 온 그가 보기에 당대,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중국은 여전히 봉건적 잔재로 뒤덮여 있었는데, 작품의 무대인 베이펑,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침략과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국민당, 공산당의 투쟁과 별로 관계없이 그나마 이럭저럭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별 탈 없이, 그러나 나중에 보면 폭풍전야의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베이펑에서 그나마 좀 깬 사람들은 일부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나 그걸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행처럼,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공산주의 참칭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작품 속에서도 진정으로 혁명을 믿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반면에 당시 베이펑을 지배하던 세력, 그게 누구인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인지 그저 막강한 군벌 호족인지 알 수 없지만, 지배권력은 공산주의를 불가촉의 악으로 규정하여 무분별하게 체포, 처형했던 모양이다. 이런 시대상은 그의 대표적인 희곡인 <찻집>의 2막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찻집> 역시 읽어볼 만하고 권할 만한 작품이니 참고하실 사.
제일 먼저 라오서가 볼펜에 힘을 주었던 인물은 중요한 조연인 ‘장다거’. 이게 이이의 본명은 아니다. 성이 장張 씨인 50대 남자로 관청 재정소의 2급 사무원이다. 중국에서 ‘다거’는 우리 발음으로 대충 다꺼, 따꺼 등으로 들리며, ‘대가大哥’ 큰형이나 형님을 뜻하는, 남자를 향한 존칭이다(우리나라 TV에서 나이 든 딴따라 조용남을 향해 누군가가 ‘조다거’라고 말해 설화를 빚은 적도 있다).
하지만 재정소 사무원은 얼핏 보면 그냥 부업 같다. 그깟 봉급으로 어떻게 무절제한 낭비를 미덕으로 믿고 있는 맏아들과 딸을 대학과 기숙 고둥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주 수입원은 직접 살고 있는 집 말고 가지고 있는 두 채의 집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업무상 물품 구입처에서 받는 리베이트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이가 무턱대고 활수한 것은 아니다. 원래 부자들의 씀씀이가 그렇다. 필요한 것엔 과감하게 쓰되 허튼 것에는 한 푼을 무서워하는 법이다. 장다거의 본업은 공무원이라기보다 차라리 중매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루고 싶은 신성한 사명은 중매, 그리고 이혼의 퇴치다. 그가 중매를 할 경우에 긴 대저울의 끝에 신랑과 신부가 될 인물 둘을 앉힌 다음 저울 추가 평행과 매우 유사한 균형을 잡을 때에 한해 신주단지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이혼의 원인이 중매쟁이의 저울이 부정확한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왼쪽 눈에 심각한 안검하수 기가 있어 눈꺼풀이 눈을 덮을 정도라도 이 덮은 눈이 사물과 사건을 보는 혜안이라서 세상과 사람들과 심지어 시장판 물가까지 훤히 내다보는 터, 베이펑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하나 빠짐없이 장다거에게 중매를 부탁하는 판이었다. 이런 판세라면 당연히 장다거의 가장 중요한 생활은 사람들을 두루두루 잘 사귀어 두는 것일 터이고, 그러기 위하여 얼마나 큰 마당발을 가져야 하겠는가.
딱 이때,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작품의 주인공이자 자신과 함께 관청 재정소에서 함께 2급 사무원으로 일하는 라오리. ‘라오리’ 역시 본명이 아니다. 나이 든 리씨, 그러니까 우리나라식 표현으로 하자면 “리형” 정도나 그것보다 약간의 존칭으로 보면 좋다.
이 양반은 장다거와 거의 반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다. 크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라오리는 “일처리가 꼼꼼해서 온갖 고생을 도맡아야 하는 바람에, 외부출장이나 돈을 나누어 갖는 일, 승진 등은 모두 다른 사람 차지가 되는” 것에 조금도 유감을 가지지 않는 이른바 바른생활 사나이다. 많이 문학적인 인물로 오직 시정詩情, “시적인 정취” 만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주장한다. 시정이 정말 문학의 시적인 정취냐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정’을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라오리 스스로 “봉건제도는 낭만의 역사적 흔적이고 계급투쟁이 ‘시정’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적도 있다. 꿈만 꿀 것인가, 절실하게 살 것인가? 꿈을 꾸는 것은 시정이고, 절실하게 사는 것은 생활. 이 진퇴양난의 벼랑에서 우리의 주인공 라오리의 고뇌는 깊어 간다.
좀 부유한 집안에서 낳고 자란 라오리. 그러나 부잣집이라도 시골 부잣집이니 베이펑 수준으로 그냥 그런 부자였겠지만 하여간 베이펑, 당시 이름으로 베이징으로 유학을 와 대학을 졸업을 하고 그길로 관청에 취직을 해 수도에 눌러앉은 라오리. 그는 대학 다닐 당시 부모가 일찌감치 점 찍어 둔 아가씨와 하기 싫은 결혼을 해야 했다. 파혼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까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너무하다 생각해 두 살 많고 봉건잔재의 대표로 상징하는 전족을 한 아가씨와 할 수 없이 결혼을 했고,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결혼만 하면 생기는 것이 아이들이라, 위로 아들, 아래로 딸, 이렇게 자식 둘을 두었으며, 처자식은 시골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딱 그림이 그려지시지?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조선의 모던 보이들. 고향집에 두고 온 사철 발 벗은 아내를 향한 짜증과 후회와 기타등등.
라오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차츰 결혼제도의 근본적인 부조리로 바뀌고, 이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라오리 말대로 언젠가는 이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눈부신 조연, 장다거가 자기 집에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양고기 샤브샤브를 요리해주며 시골의 처자식을 베이펑으로 데려오라고 설득한다. 라오리 입장에선 조금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이미 양고기 샤브샤브를 배불리 먹은 다음이라 차마 그가 하는 말을 안 된다고 거부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베이펑 최고 마당발을 자랑하는 장다거는 자기가 적당한 셋집도 물색해줄 것이며, 살림살이 역시 지원을 해주겠노라 했고,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했다. 대단한 장다거다. 그리하여 전족을 한 촌 여인 리부인이 아들 잉과 딸 링을 데리고 베이펑의 좐타 후퉁(골목)에 있는 디귿 자 삼합방의 다섯 간짜리 북채에 살게 되며, 이로써 라오리는 자기 혼자도 버거운 엉망진창의 베이펑, 봉건과 혁명과 부패의 와중에 아내 그리고/또는 결혼제도와도 한 판 맞짱을 떠야 하는 숙명을 맞이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 관청 재정소를 구성하고 있는 공무원들. 심지어 글자도 많이 알지 못하는 전직 군인도 있고, 표준어 사용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직원도 있으며, 대단한 사기꾼, 이것을 넘어 천하의 악당, 인신매매 같은 것도 서슴지 않는 진정한 악당 샤오자오, 작은 조趙씨도 있다. 당연히 작은 조씨, 샤오자오가 문제다. 이이는 소장의 아내와 ‘매관매직’을 매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 거래를 통해 약 2백명과 연결이 되어 있는, 직급은 겨우 2급 사무원이지만 관청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는 악당이다. 처음엔 악당이라기보다 좀 지나친 장난꾼으로 등장하다가 조금씩 역할이 넓어지면서 나중에 가서는 수십만 위안 정도를 보유한 검은 재산의 소유자요, 흉악범죄를 눈꺼풀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저질러버리는 범죄자로 등장한다. 20세기 초반의 중국문학이니까 권선징악일 터이고 그러니 불행한 종말을 맞지 않겠느냐고? 왜 이러셔, 명색이 근현대 중국문학의 큰 별로 추앙받는 라오서인 것을.
샤오자오가 본격적으로 뜨는 계기는 어처구니없게 장다거의 아들 톈전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포승줄에 묶인 채 쥐도 새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 이후다. 어찌 어처구니가 없느냐 하면, 장다거가 생각하기로, 공산共産, 물자의 공동생산, 공동소유를 이루면 이후에는 당연히 공처共妻, 마누라를 공유하자는 주장을 할 것인 바, 공처를 하면 중매쟁이가 필요 없게 되니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장다거가 평소에 늘 주장하는 바가 바로, “공산당은 당연히 총살감”이었기 때문이다. 샤오자오는 장다거의 이런 불행에 편승해 선한 부르주아 장다거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물론 그게 쉽게 되지는 않지. 장다거의 옆엔 정의파이지만 냉소파이기도 한 라오리가 있으니.
내용 소개는 이 정도면 적당한 거 같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위의 스토리에 거짓말이 하나 있다. 그러니 믿으면 안 된다. 그러니 유머와 풍자를 잔뜩 섞어 재미있게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그린 라오서의 대표작이 어떤지 아시려면 정말로 책을 읽어보셔야 할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머라서 가끔 키득거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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