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지막 연인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평점 :
.
작년, 2022년 초에 독자들이 열광했던, 그러나 생각만큼 흥분이 오래 가지는 않았던 작가 찬쉐(殘雪)를 읽었다. 당시 나는 중국의 3세대 소설 작가들의 문법에 조금은 식상하고 있어서 찬쉐가 여성작가이며, 제목이 <마지막 연인>이란 것만 가지고 징글징글한 중국의 현대사를 다룬 남성 3세대 작가들과 달리 조금은 달달하고 도시적 감수성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생각했으며,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 보기는 하겠는데 찬쉐에 대한 찬사가 좀 가라앉은 다음에 그리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코피 터졌다. 시대가 2020년대에 징글징글한 남성작가, 달달한 여성작가, 제목 가지고 스토리 짐작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이 말짱 헛생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짐작한 내가 참 한심했다. <마지막 연인>은 참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좀 야릇한 소설이 등장하면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잇는 작가가 등장했다.” 라고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찬쉐의 경우에도 “중국산 카프카”라 칭하는 작가/평론가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래. 작품을 해설하기 힘들 때 카프카나 포크너 비슷하다,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하면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내가 읽은 <마지막 연인>은 자전적 이야기 같던데. 물론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릴 경우에 “자전적 이야기” 운운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기는 마찬가지다. 즉 나처럼 <마지막 연인>을 달달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책을 사거나 빌려 읽은 사람은 초장부터 보기 좋게 코피가 터질 것이다. 찬쉐는 자신의 이야기, 부유하게 살다가 폭삭 망했으며, 자기를 돌보던 외할머니마저 굶어 죽는 참화와 스스로도 심각한 결핵을 겪었으면서도 문학의 꿈, 작품 속에서는 책을 읽고 읽은 책의 스토리들을 다 합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는 등장인물 존처럼 소설쓰기를 운명 또는 세상에 자신을 밀어낸 저 지하 또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부터의 운명이다, 라고 작품의 주제를 밝혔고, 형식적으로는 그걸 “초현실주의”에 발을 담그고 쓴 작품이라고 읽었다.
“옮긴이의 말” 속에는 “중국의 초기 선봉파 작가들이 평이한 현실주의로 선회할 때 찬쉐는 오히려 30여 년 동안 꾸준히 가장 전위적인, 때로는 서양의 모더니즘 작가들보다 훨씬 더 모험적인 실험을 감행했다.”라고 쓰여 있다. 선봉파?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선봉파先鋒派. “문학예술에서의 선봉, 아방가르드란? 20세기 초에 기성의 문학예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등 첨단의 문예사조를 말한다. (중략)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개방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상품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조성된 사회, 경제적 환경의 변화 때문이며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쏟아져 들어온 외래사조의 영향도 선봉문학이 등장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출처: 씽크존)
찬쉐는 1986년, 33세 때 <황니거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또래 작가들은 시작은 선봉파로 했을지언정 점점 중국 안에서 잘 팔리는 현실주의로 선회했고, 찬쉐를 비롯한 골수 아방가르드 들은 끝까지 선봉파의 선봉에 섰다는 의미다. 그러면 옮긴이 강영희의 말마따나 초기 선봉파 작가로 훗날 평이한 현실주의로 선회한 대표적인 작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칭한 것일까?
내가 꼽기로는 찬쉐보다 3년 아래, 중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옌, 아닐까 싶다. <홍까오량 가족>, <열세 걸음>, <술의 나라>, <인생은 고달파>, <달빛을 베다>, <풀 먹는 가족> 등등의 작품 속에 일정한 만큼 또는 적당할 정도의 (포스트)모던한 향미 첨가물을 살포해 놓았다. <개구리>는 좀 덜 그렇지만. 모옌과 비슷한 경우를 현실주의로 선회한 작가 그룹으로 봤을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단언하는 건 아니니 이 대목을 어디 가서 써먹지 마시라. 망신당할 수 있다.
하여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거장으로 이름 높은 모옌 선생의 이름까지 끌어들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지 찬쉐가 강단있게 중국의 아방가르드, 선봉파의 입장에서 굽힘 없이 작품을 썼으며, 그것으로써 중국 소설계의 다양성 확보에 크게 복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작 읽어볼 것을 그랬다. 소설, 또는 문학을 포함한 모든 세상살이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바로 다양성일 터이니. 나하고 맞고 맞지 않고는 관계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과 표현법과 문자놀이로 감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서로 관계가 있는 세 커플이 등장한다. 장소는 특정하지 않은 세상의 어떤 곳, A나라 B시. 그곳에서 의류회사 “로즈”를 차려 사장으로 있는 빈센트와 발랄하고 영리하면서도 요염한 중년여성인 아내 리사. 회사 “로즈”의 영업부 매니저로 작은 키에 고집스러운 중년과 노년 사이의 남자 존과 존이 벌어오는 돈으로 귀금속 같은 장식품을 열라 수집하다가 정신차려 이제 직기를 사용해 벽걸이 카펫 작업을 해 제법 돈을 벌고 있는 아내 마리아. 존과 마리아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부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열일곱 살 먹은 아들 대니얼이 있다. 얘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 때려치우고 정원사가 되려 알아보고 있는 중으로 나중에 꽤 그럴듯한 정원사가 된다. 다행이다. 그리고 “로즈”의 오래된 고객으로 온열대 지방인 남부지역에서 거대한 규모의 고무나무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는 레이건 씨와 그가 오랑우탕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갈색 피부와 새까만 곱슬머리를 한 아시아 여자 에다.
이 A나라 B시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여인이 있으니 도시 청소부로 아침부터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깨끗이 쓸고 있는 흑인여성 조이너. 조이너는 이 B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빈센트의 아내 리사는 도박의 도시 출생으로 나이든 빈센트가 한 번 마음먹고 아내의 고향인 도박의 도시로 길을 떠나 기차에 내렸을 때 텅 빈 도시에서 단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바로 흑인 여성 청소부 조이너였다. 도박의 도시에서 조이너가 말하기를 B시의 조이너가 자신의 자매라고 하고, 도박의 도시에서 사용하는 룰렛을 비롯한 모든 도박 장비는 벽 속에 들여놓았으며, 사람들은 지하 또는 동굴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언제 지진이 나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는데 지하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란다. 그렇게 조이너의 말에 따라 여관 지하에 숙소를 정하고 무작정, 조이너의 약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의 옛집을 찾아갔더니, 이게 웬일?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는 리사의 부모가 안락의자에 누워 앵무새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면 이곳은 시간의 차원이 없는 곳.
존, 사실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일의 기단을 만드는 인물이다. 존은 영업부 매니저 일을 하면서, 워낙 머리가 좋아, 서류 아래에 소설책을 한 권 깔고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어가면서도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해 사장조차도 존이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며 그만두지 않을 거란 다짐을 받고 싶어한다. 존은 또 사장의 태도를 자신이 그만두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표시하는 것으로 여기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하여간 엄청난 독서량은 서재에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게 했으며, 그의 소원은, 물론, 당연히, 자연스럽게, 틀림없이 작가 찬쉐와 같은 소원으로,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웅대한 계획이다.
뭐라고? 존의 계획이 존을 태어나게 한 작가 찬쉐의 계획이라고? 당연하지. 그리하여 이후의 작품은, 비록 상충하고 연결되지 않으며 버석거리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막 흐트러져버린 것처럼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행위, 겪었던 경험, 그들의 공통점인 ①지하 또는 동굴, ②불운과 불행을 상징하는 뱀, 까마귀, 늑대, 말벌 같은 토템이랄까 상징, ③지진과 산사태로 입은 피해와 정신적 외상, ④몇몇 선한 동물에서 뿜어 나오는 자기장은 모두, 적어도 책의 앞갈피에 쓰인 극히 짧은 찬쉐 소개글과 “옮긴이의 말”에 나온 작가에 관한 정보 만으로도,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때로는 직접 말하고 거의 대부분은 변형하고 비튼 이야기임을 “추리”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사를 따라가보려 노력할 필요 없다. 나는 습관적으로 스토리 전개의 요약을 위해 메모를 하며 읽기 시작했다가 금방 때려치웠다. 책의 초반을 읽을 때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수면에 문제가 있어요. 잠이 모자라요. 그러니 낮에 졸려요.) 많이 헤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는 오히려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문장/문단이 독자를 흡인하는 파워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작품은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아마 독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선봉파 문학을 조금 하다가 적지 않은 작가들이 괜히 평이한 현실문학으로 노선을 바꾼 건 아니다. 찬쉐처럼 평단과 독자들의 박한 평가를 무릅쓰고 자기의 길을 걸은 외고집이 가끔은 멋있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