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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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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생 범띠 작가이자 법학박사인 율리 체는 도무지 가리는 소설 장르가 없다. SF, 범죄, 스릴러 등을 망라하더니, 이젠 코로나 19를 경험하면서 현 시점,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봉쇄정책 등 갇힌 시스템 속에서 사람에 대한 작가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래서 제목 자체가 “인간에 대하여”일 수 있었겠지. 이 작품은 출간했을 때부터 꼭 사서 읽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잠깐 깜박 잊었는데 갑자기 떠올라 (화들짝 놀라서) 먼 도서관에 상호 대차 신청해 읽었다. 역시 율리 체다. 이름만 가지고도 주저 없이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군 가운데 한 명.
율리 체는 워낙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쓰는 작가라서 책을 진짜로 읽기 전에 이게 어떤 내용일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을 쓴 작가가 <어떤 소송>은 그렇다고 쳐도, <새해>나 <잠수 한계 시간> 같은 작품도 쓸 수 있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 신선한 배신감 같은 걸 경험할 수도 있다. 한 번 더 말하자면, 하여간 나는 그랬다. 이제는 율리 체, 하면 일단 아무 예단도 없이 그냥 첫 페이지를 열려고 하는데, 참 나, 그러고 보니 동화책 한 권 말고는 이제 번역 출간한 책 다섯 권을 다 읽어버렸지 뭐야.
독일의 뮌스터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대표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대학 교수인 요하임 코르프마허 선생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내 없는 홀아비로 딸 도라와 아들 악셀을 성인이 되도록 키웠다. 아들 악셀은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했으면서도 하는 일이라고는 소파에 누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뿐 도무지 생산적인 활동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라도 구르는 재주 하나는 있는 법이라 조세법 전문 변호사 크리스티네라는 여성을 꼬드겨 결혼까지 해 쌍둥이를 낳아, 아내는 집안의 가장으로 모든 경제적 책임을 지고, 남편 악셀은 알고 보니 자신의 진짜 주특기인 주부(여성을 일컫는 주부主婦 말고 지아비 부를 써서 주부主夫라 쓰자) 노릇과 유아 돌보기를 아주 아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살고 있다. 악셀의 누나 도라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대학에 다니다가 뮌스터에 있는 작은 광고 에이전시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자신이 이 업계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일단 학교부터 때려치웠다. 견습생 하다가 인턴을 거쳐 순식간에 주니어 카피라이터로 채용되었으니 간이 부을 만도 하지. 이후 함부르크에 있는 카피라이터 양성학교 1년 과정을 마치고 여러 대형 광고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은 후, 급여 삭감을 무릅쓰고 주로 지속 가능 상품과 사회 생태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SUS-Y으로 옮겼다.
오래 전에 사귄 첫 애인 필리프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사회학 교수였는데 이 잡것이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에 헤어졌고,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그러니까 아직 찢어지지는 않은 두 번째 애인 로베르트 하는 일이 기온과 해수면 상승, 사막화 확대와 파괴적인 폭풍 등의 자연재해를 예방하자는 캠페인이라 자신도 지구에 해를 덜, 많이 덜 끼치는 사업에 공헌하기 위해 회사를 옮긴 것이었다. 즉 현재 애인 로베르트와 도라는 차도녀, 차도남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좌파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로베르트와의 사랑에 진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도라의 연애전선에 구름을 끼게 만든 건, 거참 스웨덴의 큰 부잣집 딸이자 환경운동의 선봉이라고 하는 그레타 툰베리였는데, 그레타가 시작한 금요시위에 로베르트가 참여하면서 로베르트는 환영을 보듯 소녀를 바라보았고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중요한 이슈는 하여간 기온 상승과 이에 따른 재앙의 예방이었다. 얘네들은 연애만 했다 하면 동거를 하는 모양이다. 그래 도라가 분리수거에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로베르트는 버글버글 입술 양쪽에 흰 거품을 물어가며 지랄지랄 해대기 시작했지만, 뭐 하는 일이 그 분야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그러다가 COVID-19 시국을 맞았다. 이후 로베르트는 갑작스럽게 기후보호 활동가에서 감염병 연구자로 변신을 해, 짧은 말로 성공했다. 각종 매체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고, TV에도 나오기 시작했으며, 극단적 봉쇄정책과 마스크 착용,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신앙처럼 설파하기 시작했다. 책 후반부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극단적 봉쇄를 풀려고 시도할 때는 적극적으로 이런 정책에 반대를 했으니 어찌 보면 좌파니 진보니 하는 건 자신의 진짜 정체성은 다음으로 하고, 그냥 자신이 그렇게 불리고 싶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는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도 충격을 주어 광고 에이전시 SUS-Y의 광고주들도 예산을 동결하며 다양한 광고 캠페인을 취소하고 조업도 단축해버려 SUS-Y의 직원도 이에 맞추어 될 수 있는 대로 재택 근무를 하게 됐고, 도라는 이런 조치가 심각할 수준인 베를린에 염증을 느껴 못생긴 강아지 ‘요헨데어로헨’만 데리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예를 들자면 오산이나 양평쯤 거리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주, 프리그니츠 군, 플라우지츠 읍 지역의 브라켄 마을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브라켄 마을은 전형적인 독일 변두리지역으로 브란덴부르크 사람들이 특유의 무뚝뚝한 관심이라는 지역색을 굳건히 간직한 작은 동네답게 벽에도 귀가 있는 건 물론이고 밟고 선 모래 속에도 귀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도라는 주민들의 이름도 모르지만 주민의 거의 대부분은 도라의 이름은 물론이고 도라가 관심 있게 하고 있는 텃밭 개간, 심고자 하는 품종인 감자 등에 관해서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다는 걸 오직 도라만 몰랐을 뿐이지. 이들이 도라를 보면서 공통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은 “당신 같은 대도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었다. 심지어 담 아래에 의자를 놓고 의자 위에 올라가면 상자 위에 선 남자와 같은 눈 높이가 되는 옆집 사람까지도.
옆집 남자 고트프리트 프로크슈는 도라가 이사온 지 며칠 안 되어 도라의 강아지 요헨을 담 넘어로 휙 집어 던졌는데, 책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에게 귀여움만 받는 이 개 요헨이 자신의 감자밭을 분탕질 해놓아 홧김에 던져버린 거였다. 애칭 ‘고테’라고 불리는 고트프리트는 사실 별로 말이 없는 남자다. 완벽한 대머리에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거한. 이 고테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말한다. 진짜 좌파처럼 악수 ‘금지 조치’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난 이 마을 나치요.” 실제로 담 옆에 의자를 놓고 위에 올라가 집을 바라보니 거대한 독일국기가 벽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고테는 “이 마을에 나치는 없다.”라고 말은 하지만 도라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고테가 나치다, 아니면 적어도 나치에 매우 가깝다, 라는 믿음은 바뀌지 않는다. 독일 극우파 정당인 AfD에 투표한 옛 동독 지역 브라켄 마을 주민은 총 27%로, 역시 동독 지역이었던, 그래서 AfD 투표율이 높은 모든 브란덴부르크 주의 평균보다도 몇 퍼센트 포인트가 높은 성향을 보인다. 이런 곳에서도 이민자와 난민, 동성애자에게 유난히 지랄맞은 고테. 도라는 이런 강적과 같은 블록 담의 이편, 저편에 살아야 하는 처지를 만난 것이다.
고트프리트 프로크슈 씨는 동독 시절엔 이웃한 슈테 지역의 넓은 평야에서 논밭을 일구어 제법 먹고 살던 농부의 아들이었는데, 독일 통일 후에 갑자기 자기네 살던 땅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 하루 아침에 쫓겨나 이웃 도시에서 도시 빈민 생활을 하다, 삶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는지 열서너 살 때부터 극우 스킨헤드 족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테는 자신이 나치라는 특별한 생각도 없다. 그냥 그저 자신이 부르는 “히틀러 깃발이 거리마다 휘날린다”는 노래가사가 나치 노래라는 건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냥 어려서부터 부르던 노래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걸 좀 확장하면, 고테가 난민과 이민자, 동성애자에게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것이 그저 어려서부터 학습이 된 시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테는 전형적인 “무뚝뚝한 친절”을 가지고 있는 이다. 원래 농장관리자의 집이었던 도라의 집이 비어 있는 동안 매 금요일에 한 번씩 둘러보며 손도 봐주고 했었고, 도라가 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도라의 침대와 의자도 뚝딱 만들어 가져다 놓고는 한 마디도 벙긋하지 않았을 정도다. 도라는 당연히 이를 알게 되고, 그의 무뚝뚝한 친절에 마음이 쓰이며,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천하의 불한당, 네오 나치, 의도를 가진 살인의 전과자인 무시무시한 거구의 냄새나는 남자와, 난데없이 등장한 그의 자그마한 딸 프란치, 도라와 도라의 개 요헨데어로헨, 이 네 등장(인)물과 중요한 조역으로 각기 좌파와 우파로 구성된 동성애 부부 톰과 슈테펜, 그리고 R2-D2라는 별명과 ‘하이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하인리히, 도라의 아버지 요하임(요요)박사. 여기에 엑스트라 역으로 브라켄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재미있고 맛있는 만찬이 펼쳐진다.
결론은, 동쪽과 서쪽도, 아래쪽과 위쪽도, 좌도 우도 없이, 서로를 조금이나마 좋아하여, 자신들 모두 이 지구라는 행성에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만을 축하하자는 것.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상대가 비록 네오 나치일지언정.
나는 율리 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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