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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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산세계문학총서 71번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별과 사랑>을 흥미롭게 읽어 포니아토프스카의 1988년 작품 <아이리스>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했지만, 정기구매 예정인 도서라 해서 신청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달 후, 정말 개가실 신규 도착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마치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챘더니 책의 첫 번째 독자로 등록되는 순간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다른 사람이 갈피를 넘겨본 적이 없는 새 책은, 책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법이다. <별과 사랑>은 사실 읽은 지 오래라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할 줄 아는 건 천문 관측밖에 없는, 그래서 다른 방면의 것들에 관해서는 재수없기 그지없는 멕시코 과학자가 자기한테는 오직 천문학 연구가 낙후한 멕시코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애정이었다는 것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유행한 환상문학적 요소를 제거한 포스트 붐의 한 형태, 리얼리즘 방식으로 쓴 것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작품을 읽고 시간이 오래 흘러 확정하지 못한 채, 그저 “것 같다.”라 말하는 것을 양해해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가 내 기억에 새겨진다.

  그저 작품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이의 독특한 신분도 흥미를 끌었었다. 25년 정도 오래된 인터넷 동무님이 일러준 내용.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우리가 마리 퀴리로 알고 있는 퀴리 부인이다.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에브 퀴리가 어머니 마리 퀴리의 전기를 썼고, 전기의 일부가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 나왔다고 한다.


​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예.”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아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는 1764년에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보호하고 나라의 결점을 알아 대책을 궁리했지만 용기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  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라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인 스타니스와프 2세이며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고조 할아버지다.

  그리하여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가 프랑스에서 살 때의 베스 할머니는 당연히 공작부인이었고, 네 아들, 블라디미로, 에스타니슬라보, 미겔, 카시미로와 네 명의 며느리와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열 명의 공작과 공작부인이 밀접하게 지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아이리스>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걸 밝힌 셈이다.

  그러면 어머니 쪽은? 작가의 어머니는 멕시코 사람이다. 그것도 고위 귀족이어서 부르주아 귀족은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늘 타도의 대상이 되는 법이라,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에서는 혁명이 하도 많이 일어나 언제, 어떤 혁명을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건너와 살다가 폴란드 왕족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파리에서 엘레나를 낳았다. 이때가 1932년. 잔나비 띠 소녀 엘레나가 열 살이 되던 1942년엔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비시 괴뢰정부가 나치에 협력하던 시기. 이미 연합군에 입대해 전투중이었던 아버지 때문에라도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사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아 어머니의 고향 멕시코로 떠나고, 작품에서도 아버지를 뺀 가족 모두가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같다. 맞다니까, 자전적 소설이.


​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는 자매 가운데 언니다. 한 살 적은 동생 소피아는 매사 반항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시끄러운데다가 활발해 자유스럽게 춤추는 걸 즐기는 반면, 마리아나는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으니 세상살이에 온갖 걱정거리가 많은 동시에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자기 주장이 있어도 그걸 굳이 주장해서 세상 시끄럽게 만드느니 차라리 입 속에 담아 놓고 조금 불편하지만 일신상의 편안함을 중요시한다. 하기 싫은 피아노 교습도 꾸준히 받지만 당연히 성과가 큰 건 아니다. 책 읽기와 엄마 루스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많이 받기를 소원하는데 어떤 성향인지는 이 정도면 아실 듯. 자매는 파리에서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다. 완벽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 프랑스 여성 가정교사 마드무아젤 뒤랑의 요강을 비우지 않았다고 귀싸대기를 맞으며. 물론 마리아나는 한 가지 이유로 두 번 따귀를 맞는 적이 없었지만 소피아는 마드무아젤 뒤랑에게 눈길로 칼날을 던지면서도 줄창 따귀를 얻어터졌다. 엄마 루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 매일 그리도 파티며, 쇼핑이며, 바람 피우는 거 같지는 않지만 그리도 맨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지 마리아나가 엄마 얼굴 한 번 보기도 바쁠 지경이었다. 이렇게 살았다. 금발을 가진 마리아나는 자기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며, 엄마 역시 프랑스 사람이 아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미국 출신인 베스 할머니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에 나온 사진을 통해 보여준 멕시코는 가슴이 아래로 축 처지고 머리뼈가 울퉁불퉁한 흑인 여자들투성이며, 이 여자들은 사람을 통째로 구워먹고 삶아먹는 식인종으로, 이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었거늘.

  왜 할머니가 멕시코 사진을 나쁜 의도로 보여주었을까? 전쟁의 전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일단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조부모댁으로 거처를 옮긴 마리아나 가족은 이미 어머니가 멕시코 행을 결심한 상태였다. 폴란드 공작인 할아버지와 미국 출신 할머니 기준으로 삼류국가에 지나지 않는, 심지어 미국의 변소로 불리는 멕시코로 친손녀들을 아빠도 없이 데리고 가겠다니 사실 손녀들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진짜로도 그렇다.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없었겠지. 하여튼 그래도 갔다. 몇 달 걸리는 항해 동안 소피아는 죽기 바로 전까지 뱃멀미를 했지만 멕시코에 어쨌거나 도착을 했고, 이때부터 마리아나는 다시 갈등 속으로 던져진다.

  “넌 멕시코인이 아냐.”

  “아냐, 난 멕시코인이야.”

  “아니라니까. 넌 양키야.”

  “난 멕시코 사람이야. 내가 멕시코 사람으로 살고 싶으면 멕시코 사람인 거야.”

  “아냐, 넌 금발의 양키야.”

  마리아나는 엄마가 멕시코 사람이리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으면서 열 살 먹은 자신은 벌써 멕시코 사람으로의 정체성을 가지기로 작정을 한 것처럼 묘사를 했다. 뭐 그럴 수 있지. 라틴 아메리카 백인들의 문제는, 아직도 자신들이 유럽인인 것으로 아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로마 가톨릭 신부 자크 퇴펠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럽에서 건너와 멕시코 사람들의 고혈을 뽑아 돈을 벌어 저택을 짓고 살며 여름마다 두어 달씩 유럽으로 휴가 떠나는 것들. 마리아나 식구들이 프랑스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주로 프랑스 출신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그이들한테 너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한단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멕시코 국적으로 가지고 있는 프랑스 이민자들을 동포라고 생각도 안 하는데 말이지.

  갑자기 자크 퇴펠 신부? 마리아나는 멕시코에서 살면서 드디어 중학교에 들어가고, 전쟁이 끝나서 아빠도 멕시코로 이민 와서 제약 사업을 하게 되는 세월 속에서 스카우트, 즉 소녀단 수련 과정에서 이 자크 퇴펠 신부에게 크고 크고 또 큰 영향을 받는다. 유럽 출신의 부르주아들이 멕시코 현지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기름과 피를 빨아 치부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등의 혁명성을 심어준다. 이에 깊이 영향을 받은 마리아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부모를 설득해, 멕시코에선 흰 피부의 남자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짓, 예를 들면 가래침을 힘껏 뱉는다든지, 만인이 바라보는 데도 나무 이쑤시개를 쓱 뽑아 이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튕겨버리는, 손톱 밑이 새까만 신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이 결과, 아버지와 소피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반면에 어머니 루스와 마리아나는 완전히 자크 퇴펠 신부한테 반해버린다. 사회주의적 혁명을 웅변하는 신부는 식비와 주거비를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백인 부르주아의 저택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되며 어머니와 큰딸을 현혹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성장소설적 분위기로 탈이 바뀐다.

  재미있다.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나는 신부 등장 이후에 오히려 흥미가 반감했지만 종교를 가진 분들은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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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0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소설가가 왜 이렇게 많은지요!^^
내용의 배경으로는 프란츠 파농도 생각납니다.
이 책도 저장합니다~

Falstaff 2023-05-02 11:38   좋아요 1 | URL
파농은 프랑스라도 앤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유색인이니까, 포니아토프스카보다는 다음 주에 독후감을 올릴 마리즈 콩데와 더 비슷할 듯합니다. ㅎㅎㅎ
파농.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

그레이스 2023-05-02 11:41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읽었는데, 유색인으로서의 심리와 문화정체성을 너무 잘 파헤쳤더라구요. 자신에 대한 정직한 탐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자냥 2023-05-02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왠지 금수저일 거 같았는데, 은수저였군요...
근수저인 저랑 다락방이 곧 읽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5-02 13:34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정도의 출신 성분은 아직 구경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쟁 당시에 꼼짝 않고 파리에 있다가 아빠 따라 폴란드로 갔으면 숙청 최우선 순위였겠지만요.
이 책 역시 별점을 네 개 줄까, 다섯 개 줄까 고민하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ㅋㅋ

stella.K 2023-05-02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채시다닛!
정전기가 파박 일어날 것 같습니다.ㅎㅎ
그런데 책을 잘 안 읽는 울나라 정서상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책은
그렇게 재빠르지 않으셔도 되지 않았나 싶네요.ㅋ
근데 평소 소설에 조예가 깊으신 문트님이나 재밌게 읽지
저같이 실팎한 사람은 읽을 수 있으려나 싶은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니
정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부가 등장하니 정말 구미가 당깁니다.ㅋㅋ

Falstaff 2023-05-02 19:26   좋아요 2 | URL
아주 재미나요, 신부가 등장한 다음 부터는요.
사춘기 소녀들이 딱 그 시절에 얼토당토 않는 사람을 흠모하는 감정이 드러나는데,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더 흥미로웠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

coolcat329 2023-05-03 0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조 할아버지가 왕이었다니 소설가들 중 최고 계급아닌가요? ㅎㅎ
지금 아는 작가도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자꾸 알게되네요~^^

Falstaff 2023-05-03 16:1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한 제일 높은 귀족의 자제입니다.
그럼 뭐해요, 벌써 21세기인 걸요. 촌스럽게 귀족은 무슨... 그죠? ㅎㅎㅎ
이 사람 작품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