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법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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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곳은 상수동의 어느 카페였다. 3월이었나 4월이었나 어쨌든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이 출간될 무렵의 봄날이었고, 우리가 모여 있는 테라스는 너무 따뜻했다. 후장사실주의라는 모임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볼라뇨 전집 편집자, 소설가 셋, 펜싱 선수처럼 생긴 소설가 지망생이 모인 자리였다. 애 딸린 서평가도 있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오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p.248)


​이 장소에 모인 “소설가 셋”은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지만 나이 순으로, 정지돈, 박솔뫼, 오한기이었을 확률이 높고, 소설가 지망생은 작품집 《프리즘》을 낸 이상우이었을 것이며, 훗날 이들 연대에 동참하는 애 딸린 서평가는 《의인법》의 해설을 쓴 금정연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20대 초반의 젊디젊은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내장사실주의”는 초현실주의 등의 전위문학을 추구했다. 이들은 차차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나름대로 글을 쓰는 시늉도 하고, 조국의 변두리에 남은 한 시절 전위문학의 대표선수들을 찾아보는 등의 작업을 하는데, 위 인용문에도 나왔다시피 <2666>이나 <야만스런 …> 기타 숱한 볼라뇨의 작품에서 그대로 노출하는 볼라뇨 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의인법》에서 주장하듯이 이미 오한기는 볼라뇨에 대한 열광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태였(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우의 《프리즘》처럼 책 전반에 폭력과 섹스의 소스가 현란하게 살포되어 있다.

책의 제일 앞에 실린 작품은 오한기의 데뷔작인 <파라솔이 접힌 오후>다. 1983년이고, 작가 오한기가 태어나기 2년 전이었으며, 미국 “텍사스 주 외곽에 위치한 브라니스 모텔에서 컨트리 가수 W가 시체로 발견된” 날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제 우리 문학도 어느 정도는 세계화되어 있어서, 무대가 텍사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 한 끗 차이로 후장사실주의의 좌장 자리에 있는 정지돈이 쓴 흥미로운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의 무대도 1950년대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서 나는 자동적으로 1983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로 죽은 컨트리 가수 W, 미국에서조차 지명도가 거의 없어서, 시골 도시의 바에서나 공연을 할 뿐이고, 생전에 취입한 음반도 딱 한 장에 불과한 무명가수를 거론하는 바에야, 무대가 적어도 미국 땅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상가 저 구석에 자리잡은 고서점의 주인이 W의 광팬이라서 그가 손에 쥐고 늘 읽는 책의 제목이 바로 <파라솔이 접힌 오후>이며, W에 관한 평전이다. 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W와 별 상관없이 오한기가 원하는 대로 W에 대한 상상에 의존하기 시작하며, 이 와중에 오한기는 별의 별 거짓말을 벌여 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무 기초적이어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범했다고 봐야 마땅한 “시점의 혼란”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린다. 고서점 사장이 하도 W에 경도되어 있어 W의 버릇을 모방하다가 급기야 자신의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 두 가지 있다는데, 처음 예로 든 “눈두덩을 긁으며 머릿속으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는” 행위는 고객이었다가 아르바이트 일을 하게 된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자연스럽지만, 두 번째로 예를 든 “성관계 중의 습관”이라고 단정하는 건, ‘나’가 사장의 정사 장면을 봤다는 묘사가 없이는 반칙이다. 요즘엔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무척 많아서 이런 것에 좀 관대한지 모르지만 20세기였다면 심사위원이 여기까지 읽고 원고를 내려놓았을 확률이 95%이다.

책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맨 앞에 실린 <파라솔이 접힌 오후>는 섬과 비슷하다. 외딴 섬. 몇 줄 읽지 않아 나는 자동적으로 딱 한 권 읽은 정지돈이 생각났는데 적어도 이 단편의 앞부분에서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출신이라고 구라를 치는 W를 좇는 작업이 제법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W와 KKK단의 보스 헤링턴(이란 작자),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는 “바카렌토 증후군”, 포르노 소설 <혀끝으로의 여행>, <베테랑 형사 뒤퐁> 등등, 무수한 농담을 시현한다. 심지어 같은 주의(ism) 동인이며 작품의 해설을 쓴 금정연도 눈치를 보니까 지구상에 “바카렌토 증후군”이란 것이 진짜로 있다고 믿는 기색이다. (믿지 않았거나, 바카렌토 증후군이란 게 진짜로 있으면 미안하게 됐다.)


​이 <파라솔이 접힌 오후>라는 섬에서 나와 다른 집합으로 넘어가면 모든 작품이 서로 연결이 된다. 두 번째 단편 <더 웬즈데이>부터 마지막 <새해>까지 모든 작품은 폭력과 살인과 섹스와 강간과 가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게, 좀 까진 독자인 내 눈에는 작가나 등장인물들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위악”을 떨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진짜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작품의 조인트 기어로 역할하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은 시인으로 나오기도 하고 소설가로 나오기도 하는, 하여간 작가의 행위를 하는 “한상경”이란 인물이다. <파라솔…>을 제외하고 한 작품도 빼지 않고 다 등장시키면서도 오한기의 농담, 지독한 농담은 계속된다. 심지어 엄마뻘인 여성 시인과 같은 이름의 여자와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하고, 체인징 파트너도 하고 그렇다. 2012년이니까 최승자의 나이 환갑 맞지? 이때 오한기 나이 스물일곱이니까, 아들이라도 늦둥이 아들뻘인데, 뭐 좋다, 좋아. 픽션인 걸 뭐. 글 써서 먹고 사는 동네에선 이런 게 다 뭉개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겠다.

최승자보다는 덜 심한 농담이지만 오한기는 또, 알고 있는 독자들만 알고, 나머지는 몽땅 속아버려라, 라고 휙, 하나를 던져버린다. <유리>라는 작품에서는 시체를 묻는 행위가 나온다. “시체를 묻어봤는가?” 작가 ‘나’가 소설을 쓰다가 이 장면을 묘사해야 해서 작가는 “시체를 묻어봤는가?”라고 심각하게 자문한다.


​“백민석도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총잡이가 아닌 사람이 총잡이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지 않았나. 존 파울즈도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이태준이 만들어낸 『장한몽』의 도시 빈민들처럼 공동묘지를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라고 쓰는데, 백민석과 존 파울즈는 그렇다 해도, 취직이 안 돼 전전긍긍하는 친구에게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 해체작업 일거리를 주는 <장한몽>은 이태준이 아니라 이문구가 명동성당 근처 다방에서 하루에 원고지 백 장씩 메꾸며 쓴 소설이다. 비록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에 밀려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문구 표 골계미가 탁월한 장편인데 그걸 슬쩍 이태준으로 바꿔버렸다. 속으로는 “아는 놈만 알아라.” 이렇게 생각했는지 누가 알아? 금정연도 몰랐는데. 오한기가 책을 통해 자주 거론하던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 조이스 캐롤 오츠다. 차라리 이이가 쓴 무덤 파는 사람을 칭하는 제목 <사토장이의 딸>을 거론하지 그랬을까?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오한기 식의 농담으로 꽉 차 있는 작품집. 아쉽게도 그의 농담은 내 코드와 맞지 않는다. 다른 권총도 아니고 콜트 45구경으로 사람의 대가리를 날려버리며,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변태 가학적 섹스, 하여간 겉으로 보면 창작행위를 위한 것이지만 과도한 역경의 호소, 토마토 즉 술을 마셔도 토하고 마시고 다시 토할 정도의 행위 같은 건 영 아니라서 읽다가 말려고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굳이 악착같이 끝까지 읽은 건, 이제 오한기도 읽어봤으니 일단 후장사실주의자, 이 장난꾸러기들의 작품들을 한 번씩은 다 경험하게 된다는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장난꾸러기들이라는 사실. 나처럼 입 험한 독자의 축복을 받아준다면, 그대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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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2-18 07: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팬텀 이미지였나 거기서 오한기 등장하는 부분도 웃겼는데요 ㅎㅎ저는 의인법은 안 보고 나중에 나온 가정법이랑 토끼머리에게랑 인간만세를 봤는데 의인법보다는 순한 맛이었어요 ㅋㅋㅋ한국 문학의 마릴린맨슨 같은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맨슨을 안 좋아하게 되서 지금 읽으면 오한기 욕하지 않을지...ㅋㅋ골드문트님 뭔가 안 읽은 책 못 읽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같으십니다ㅎㅎㅎ

Falstaff 2023-02-18 11:23   좋아요 3 | URL
ㅎㅎㅎ 지금까지 이 사람들의 책은 다 한 권 씩만 읽었는데, 색다르고 좋더라고요. 요즘 우리 작가들 작품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조금 멀리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실제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거 같다라고요. ^^

유부만두 2023-02-18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그 모임 명칭 나오는 인용부분을 여러 곳에서 읽고 책에 대한 궁금증보다 싫은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장난꾸러기, 농담의 선을 (있다면) 넘나들며 노는 것 같군요. 그런데 어쩐지 좀 구식 아닌가 싶고요. (읽지도 않은 주제에 투덜댔습니다)
윗 댓에 나온대로 골드문트님은 안 읽고 못 읽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같아요.

Falstaff 2023-02-18 11:25   좋아요 3 | URL
저도 명칭이 싫습니다. 좀 튀어 보이려고 그런 거 같지 않나요? ㅎㅎㅎ 젊은 시절에 지은 이름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젠 후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다 그렇게 사는 거죠 뭐. 저질러 놓고 나중에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또 저지르고 또다시 후회하고..... 인생이 뭐 별 겁니까. ㅋㅋㅋㅋ

moonnight 2023-02-18 08: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ㅎㅎ 너무 귀여운 묘사입니다. 반유행열반인님께 동의하게 되네요^^

Falstaff 2023-02-18 11:25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어려서부터 귀엽다는 얘기를 무척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건수하 2023-02-18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후장사실주의 명칭에서 좀 거부감을 느꼈고… 아주 흥미롭진 않더라고요.

골드문트님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샤라랑 😊

Falstaff 2023-02-18 11:27   좋아요 3 | URL
맞아요, 모임 이름을 좀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지돈하고 박솔뫼는 괜찮더라고요.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만. ^^

수이 2023-02-1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장사실주의, 귀엽지 않아요? 전 이름 처음 듣고 참 개떡같이 지었구만, 근데 또 듣는 순간 머릿속에 뿅 박히더라구요.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뭐든지 다 쉬이 까먹는 정보과잉화의 시대에서. 듣는 순간 이름이 뿅 박히니까 이런 걸 다 예상하고 지은건가 그들은! 싶었어요. 오한기는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지만 정지돈이랑 금정연이 하도 말해서 아 읽은 거 같아 라고 착각하곤 했는데 골드문트님 말씀 들어보니 안 읽을 거 같아요. 박솔뫼도 한 번도 안 읽었다!! 박솔뫼는 읽어봐야지.

Falstaff 2023-02-18 13: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차라리 항문사실주의, 했으면 조금은 더 예쁘게 봐줬을 거 같아요. 아니면 똥꼬사실주의라도. ㅋㅋㅋㅋ
박솔뫼는 이번달에 한 권 더 읽었습니다. 며칠 후에 독후감 올릴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