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73년 서울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하고 서울예대 문창과도 졸업했다. 흠. 병역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병역필이었으면 하여튼 험한 시절 살았겠다.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이면 대기업이나 연봉 빵빵한 금융회사에 이력서만 내면 합격, 하던 시절이 방금 끝나고 이젠 외환위기에 돌입해 아무리 명문대학을 졸업했더라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소위 IMF 시절을 만났었구나.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 <퀴르발 남작의 성>이 당선되어 34세에 등단하고, 2010년 “문학과사회”를 발간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첫번째 단편집을 찍으니 오늘 소개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인상깊게 읽었다. 책을 읽으며 종종 영국 고딕 소설의 큰이모 앤절라 카터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글 좋은 현대작가 답게 카터보다 더 매력적인 현대성까지 장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독후감에서 자주 “…라고 생각한다.”, “…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책 읽기에 전문성이 턱도 없는, 잘 봐주면 딜레탕트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잘 안 봐주면 당연히 어림없는 아마추어이고. 잘 봐달라는 부탁 아니다. 아마추어로 사는 게 뭐 어떤가.)

표제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으면서, 정말 퀴르발 남작에 관한 유럽의 민담이 있었는지가 궁금했고, 있었다면 퀴르발 남작이 젊음과 영생을 위해 17세기에 어린이를 사서 아이들의 고기와 내장을 요리해 먹는다는 내용의 소설을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페로”가 1932년에 미국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을까? <밤마다 페로에는>이라는 극작을 쓴 ‘미셸 도이치’라면 좀 수긍이 갈 텐데 어딘지 ‘밤마다 페로에’와 ‘미셸 도이치’의 혼용 같고 좀 의심스러웠다(이건 아닐 거다). 미셸 페로가 쓴 소설을 1953년에 명감독이라는 에드워드 피셔가 톱스타 제시카 헤이워드를 캐스팅해 찍었다고? 에드워드 피셔 감독? 거기다가 제시카 헤이워드라니 흠, 수잔 헤이워드가 아니라 1950년대에 제시카 헤이워드라는 여배우, 명감독 에드워드 피셔라는 작자(들)이 있었다고? 세월이 흘러 2004년에 일본 감독 나카자와 사토시가 에드워드 피셔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일본식으로 각색해 <도센 남작의 성>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킹을 한다? 나카자와 사토시라는 인물도 아마 분명히 없을 거야. 라는 의심이 팍팍 들었다. 지금 “의심”이라는 명사를 사용했다고 나쁜 의미의 의심이라 단정하지 마시라. 나는 최제훈에 의한 거대한 거짓말에 다분히 찬사, 갈채를 보내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라고 겁을 주고는 했었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겠지만 하여튼 전에는 그랬다. 최제훈도 어려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자랐을 터. 작가는 더 흉측한 인물 하나를 만들어 퀴르발 남작이라 짓고, 어린 아이, 반드시 어린 아이여야 하는데, 자신이 아이들의 육신을 굽거나, 삶거나, 찌거나, 튀겨 먹음으로 해서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남은 생과 젊음을 얻을 수 있다는 동종주술적 의식ceremony을 했고, 이 결과 무려 3백살에 가까운 세월동안 젊음과 영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유럽식 동화를 하나 만든다. 그래 미운 다섯 살 아이가 빽빽거리고 울면, 퀴르발 남작이 지금 온대, 울어라 울어, 더 울면 너 와서 잡아가라고 부를 거야. 라고 겁을 주고는 했다고 시치미 뚝 떼고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구라를 치거나, 혹은 ‘이 정도야 뭐 진짜 있을 수도 있으니’ 소개를 한다.

그리고 내 의견으로는 나머지는 전부 픽션, 거짓말이다. 물론 충분히 있음직한 거짓말. 그리하여 저 17세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민담에서 시작해 드문드문 지워진 진실을 픽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최제훈의 표제작은 당연히 한 시절의 기념해야 하는 멋있는 작품으로 위位를 누려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이토록 뻔뻔하게 할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독자들은 또 두번째 실린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도 열광하는 것 같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쓴 스코틀랜드 의사 코넌 도일은 과학수사와 정교한 추리 대신 엉뚱하게도 크고 비대한 몸을 이끌고 심령술에 관해 연설하다가 하트 브레이크로 숟가락을 놓고 마는데(줄리언 반스, <용감한 친구들> 참조하시압), 최제훈은 그가 런던 근교의 사우스 시의 민박집에서 흉기로 스스로의 경동맥을 잘라 자살했다고 딱 선언해버린다. 이것 역시 무죄다. 아무데서나 죽으면 어떤가. 정작 독자가 기함을 하는 건, 도일 경의 죽음을 수사하는 탐정이 바로 셜록 홈즈라는 사실. 홈즈는 성격상 소설은 하나도 읽지 않아서 죽은 스코틀랜드 의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자살은 틀림없이 자살로 확신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죽었을지 고민 고민하다가 역시 추리가 아닌 떠오르는 영감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이를 알리지는 않는다. 홈즈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전한 사람이 친구이자 의사인 왓슨이라고 알고 있다. 이 작품도 재미는 있다. 도일 경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작가-등장인물의 관계의 역행.

이런 사고의 역행은 자연스럽게 최제훈으로 하여금 다른 작품 속으로 직접 개입하는 순서로 발전한다. 아니면 계속 발전해온 것이 <셜록 홈즈…>이거나 <퀴르발….>일 것이다. 최제훈의 다음 마수에 걸린 작품은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 셸리를 읽어본 독자는 누구나 <프랑켄슈타인>이 그리 녹녹하지도 않고, 녹녹하기는커녕 진짜 철학이 스며든 명작 반열의 책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최제훈은 셸리의 원작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 “괴물”이 영화, 연극, 뮤지컬, 만화 등을 통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어우어, 우워워 하는 동물성 비명만 지를 줄 아는 진짜 괴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최제훈은 직접 지하에서 잠자고 있는 (보기와는 다르게)까칠한 성격의 원작자 메리 셸리를 소환해 인터뷰도 하고, 작품 가운데 슬며시 사라진 에르네스트, 그러니까 괴물의 창조자 빅터의 동생인 에르네스트 프랑켄슈타인을 불러내 주구장창 사빌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셸리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든 월턴 선장과 괴물의 실제 여부를 따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건 사실 그리 새롭지는 않다. 예컨데 한 시절 <투란도트>가 유행했을 때, 칼라프 왕자가 왜 목숨을 걸고 중화의 공주 투란도트에게 수수께끼 시합을 신청하고, 어떻게 해서 풀기 거의 불가능한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겠느냐, 하는 논의가 온라인에서 있었던 걸 기억하면 그렇다. 그게 감상자/독자의 권리이기도 하니까.

또 이 작품집에서 다른 중요한 방면은 다중인격 또는 선택적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이제 21세기 서울 시민들이 등장한다. 서울시민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도시인들이 등장해서, 주로 험한 꼴을 저지르고, 당하고 그런다. 하지만 이거라도 모른 척, 시미치를 떼야지 독후감이랍시고 재미있는 것을 미리 다 말해버리면 정작 진짜 읽어보실 독자는 재미가 들허잖어? 그렇겠잖어? 그러니 오늘은 내가 참는다. 얼른 독후감 마치고 조기 구이에 쐬주도 한잔해야 허겄고 말이지.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3-02-16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의 위시리스트 먼저 섭렵해주시는 골드문트님 ㅋㅋㅋ이 책은 저랑 제일 가까운 곳에 꽂혀 있습니다. 4년째 꽂혀만 있네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2-16 08:26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은 작년 1월 24일에 사서 올해 1월 31일에 읽었군요. ㅎㅎㅎ 도서관 다니기 시작하니까 사 놓은 책 읽기가 쉽지 않네요. ^^

coolcat329 2023-02-16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제훈 작가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발한 상상력을 지닌 멋진 작가였군요. 작가의 책들을 대충 살펴보니 미스터리한 내용들이 다 재미나 보여요. 저도 최제훈 작가의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3-02-16 10:34   좋아요 0 | URL
옙. 이 책 재미난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3-02-1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이 책을 만났을
때, 기대주라고 생각한 작가였
지만 후속으로 나오는 책들이
모두 데뷔 소설집만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래>로 인생작
을 찍은 천명관 작가 생각이
났습니다.

Falstaff 2023-02-16 10:34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 작품은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것으로. ㅎㅎ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3-02-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독특한 발상 좋아합니다. ^^

Falstaff 2023-02-16 22: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럼 읽어보셔야지요. ^^

그레이스 2023-02-1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딕소설이 생각나는 제목들이네요.
특히 퀴르발 남작.. ^^

Falstaff 2023-02-18 15:41   좋아요 1 | URL
예. 오죽하면 제가 앤절라 카터 언니까지 소환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