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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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객관식 문제 하나 풀어보시라.


  문제)  당신은 오늘 출근하면서, 또는 쇼핑 몰에서 한 명의 잘생긴 이성을 봤다. “봤을 뿐”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폰 번호 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오늘 출근 길에, 또는 쇼핑 몰에서 당신이, 만났다기 보다 스치고 지난 이성의 모습을 “2백자 원고지 50장 이상”으로 가장 충실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다음 중 누구일까?


  ① 찰스 디킨스

  ② 오노레 드 발자크

  ③ 빅토르 위고

  ④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⑤ 헨리 제임스


  답은 없다. 각자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정답인데, 나라면 ②번 오노레 드 발자크를 고르겠다. 나머지 인간들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발자크와 함께 제안을 한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세묘사에 관해서는 발자크가 끝장을 본다. 이 책도 ‘미쉬’라는 사나이의 생김새를 상세 묘사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새 세기가 열리고 겨우 3년이 지난 1803년 11월 15일 오후 네 시. 샹파뉴 지방 오브 현의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자이며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첫 장면에선 초록 단추가 달린 초록색 즈크천으로 만든 사냥복 윗도리와 같은 천의 바지를 입고, 정성을 들여 소총을 손질하고 있다. 그런데 보아하니 능란한 사냥꾼은 아닌 듯하다. 사냥에 필요한 기타 도구들이 보이지도 않고 총기도 필요 이상으로 육중한 모습이다. 이어서 미쉬의 생김새를 발자크스럽게 유장하게 그리다가 두 가지의 인상적인 코멘트를 한다. 만일 작가가 묘사한 미쉬의 모습 전부를 그대로 여기에 적어놓는다면, 그게 하도 길고, 자세하고, 장황해서, 적어도 절반의 서재 친구가 ‘친구 취소’ 버튼을 클릭하시리라 믿어 딱 두 개만 소개해보자면 이러하다.

  1.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

  2. 고장에 퍼진 미쉬의 별명은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였다.

  소설책 좀 읽는 독자들은 위 두 가지 문장만 탁 읽어도, 아하, 이자가 악행만 저지르다 비명에 가겠구나, 하고 짐작할 것이다. 짐작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키가 작고 뚱뚱하며 냉정한 성격임에도 원숭이처럼 거칠고 민첩한데다, 하얀 얼굴에 붉게 충혈된 자국이 있는 노란 눈동자의 사나이 미쉬는, 보잘것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고아 신세가 됐는데, 공드르빌 영지의 드 시뮈즈 노후작의 며느님이 거두어 보살피다가,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와 글 읽기와 쓰기, 셈법을 가르치다가, 나이가 차니 공드르빌 소유지의 관리자로 승격을 시켜주었다. 1789년에 프랑스에서는 귀족 부르주아에겐 지옥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고, 공드르빌 성château도 시민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게 된다. 이어 1790년, 노후작의 아들 내외는 쌍둥이 아들을 서둘러 국외로 망명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체포 당해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이때 미쉬는 영지의 관리인 자격으로 단두대 곁에서 목 두 개가 육체에서 분리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

  같은 지역 주민들이 미쉬를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인 가롯 유다로 여기는 건, 기묘한 방식으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생김새와 언변에도 이유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1789년 이후, 특히 산악당 자코뱅 일파에 의한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3년 이후에는 미쉬 자신이 마치 공드르빌 땅의 주인이나 다름없이 행동을 한 것에 있다. 여기에 근동에서 보기 힘들 막강한 위력을 지닌 소총도 가지고 있지, 시간만 나면 아예 내놓고 그 총을 분해, 수입(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 조립을 반복하고 있어서 국가에 의하여 몰수당한 드 시뮈즈 후작의 영지를 새롭게 구입한 마리옹조차 미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해고하고 다른 이를 관리인 자리에 앉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치기는커녕 미쉬에게 연 3천 리브르의 급여를 보장하고 여기에 따로 매매이익을 분배해주기로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으니, 어느 정도의 악명인지는 아시겠지?

  한 가지 더 드 시뮈즈 후작에 관해 말하자면, 1790년에 시민들에 의하여 체포당해 아르시의 트루아 혁명법정이 사형을 선고했을 때, 당시 법정을 주재한 사람이 누군고 하니, “고대의 조각상 같은 몸매에 깊은 상념에 잠긴 푸른 눈의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지만 음울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한” 여인이자 미쉬의 아내로 그와의 사이에 열 살 난 프랑수아를 생산한 여성의 아버지, 쉬운 얘기로 미쉬의 장인이다. 피혁제조인 출신 장인이 보기에, 무려 1만 프랑의 재산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큰 영지를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미쉬에게 자기 딸을 결혼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장인 자신은 바뵈프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을 피하기 위해 자살해버리지만, 미쉬가 어려서부터 큰 은혜를 입은 드 시뮈즈 후작 부부의 목을 딴 사람이 장인이고, 자신은 당시 단두대 옆에 서 있었으며, 이후 후작의 영지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좋은 평판은 아예 날 샌 거였을 수밖에. 그러나 1만 프랑이 넘는 재산이라니.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순식간에 오브 현의 아르시에선 미쉬가 서민들 가운데 재산가이자 애국자라는 명성도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프랑스에서도 인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 측정의 도구는 돈이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1799년이 되어 나폴레옹이 쿠데타에 성공한 시점엔 어느덧 야금야금 사들인 미쉬의 토지 가치가 10만 프랑에 육박했으니, 이는 매년 받는 급여와 이윤이 6천 프랑에 이르렀고, 마르트가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과 장인한테 받은 상속분으로 이루어진 합법적인 재산이었다. 하지만 유다의 명성은 더욱 굳건해져 잔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작가가 보기에도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 같은 것이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읽힌다. 여기에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과 왕정복고에 이은 공화정과 다시 왕정 때까지 살아남을 시민 말랭이 등장해 마리옹으로부터 공드르빌 영지를 백만 프랑에 구입한다. 땅 매매에 관한 소문을 들은 미쉬는 득달같이 마리옹에게 달려가 자기가 사겠다고, 말랭처럼 은화 백만이 아니라 금화 8십만으로 사겠으니 넘기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금화 8십만? 그게 어디서 나서? 미쉬가 직접 말한다. “그건 알 거 없어. 그러나 안 팔면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야.”


  미쉬의 이웃에 있는 생시뉴 성. 1790년에 공드르빌 성을 함락시킨 시민들이 생시뉴 성에까지 몰려왔을 때, 성 안엔 시민들을 피해 공드르빌 성의 드 시뮈즈 후작 부부가 미리 보낸 쌍둥이 형제가 사촌 누이이자 고아인 드 생시뉴 양 남매와 함께 있었다. 이때 겨우 열두 살이었던 드 생시뉴 양은 시민들의 협박을 무시하고 오빠들에게 싸울 것을 독려해, 스스로 총탄을 장전하고 화약을 날라 오는 등 대단한 활약을 해, 저항군은 열한 명의 시민을 죽이고 끝끝내 성을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 오빠는 독일로 망명을 가 전투 중 전사를 해버려 본인이 직접 여백작으로 작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곳으로 몸을 피했던 쌍둥이 오빠들 역시 후에 라인강을 넘어 망명을 했다가, 나폴레옹을 척살하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조직의 일원으로 귀국, 생시뉴 성에 잠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것이 작품의 커다란 분기점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 아버지를 단두대에서 몸과 머리를 분리시키게 한 인간을 장인으로 둔 남자, 여태껏 자신의 집안 영토를 마치 자기의 개인 땅인 양 아무 거리낌 없이 활보하며 사냥을 즐기고, 나무를 베고,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자신의 살림집으로 삼고 있는 미쉬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뻔하다. 딱 이럴 때, 공드르빌의 영지를 금화 8십만에 사들이는 걸 거절당한 미쉬는, 새로운 땅 주인 말랭이 아르시의 이름난 공증인 그레뱅과 사방으로 넓은 벌판이라 누가 접근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언덕 위의 한 그루 나무 아래에서 드 시뮈즈 후작 가문의 쌍둥이 형제가 프랑스에 잠입해 오브 현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었는데 자기는 어떤 줄에 서야 유리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이때 나무 위에서 정말로 말랭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총을 겨누고 있던 미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말랭 따위를 죽일 시간조차 없다는 절박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예전에 모셨던 영지의 적법한 주인이지만, 자신이 금화 8십만으로 사려고 하는 땅의 원래 주인이기도 한 쌍둥이 형제의 등장에 온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미쉬. 이 유다 같은 외모의 남자가 과연 무슨 짓을 벌이기에 소설작법 8장 1절. ‘소설 속의 불운한 예언은 언제나 틀림없이 들어맞는다’에 의거해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의 여로를 걷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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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9-20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6쪽의 각주 109에 역자가 썼듯 딱 하나의 명백한 오류가 매우 아쉽다.

그레이스 2022-09-2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발자크...
계속 주행중이시군요!

Falstaff 2022-09-20 13: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도 뵈는 족족 읽어 치우는 증세가 있습니다. 여간해서 고쳐지지가 않는군요. ㅜㅜ

잠자냥 2022-09-20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일단 2번하고 5번이요... 리뷰는 책 다 읽고 다시 읽으려고 실눈 뜨고 스킵 ㅋㅋㅋㅋ
아, 최근에 이 책으로 땡스 투 120원? 받지 않으셨나요? 그거 저예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9-20 13:57   좋아요 3 | URL
옙. 발자크와 제임스는 말 할 필요가 없습죠. 디킨스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ㅋㅋㅋ
줄거리요? 뭐 2백년 전에 쓴 거니까....는 아니고요, ㅋㅋㅋㅋ 아무리 읽으셔도 스포 거리는 아예 하나도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아이고, 그게 잠자냥 님이셨구먼요. 크.... 고맙습니다. 백수한테 120원이 얼만데요!!!

stella.K 2022-09-20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요즘 사람들 고전들을 안 읽죠.
옛날이야 영화를 맘대로 봤겠습니까? 그래서 자세한 묘사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장면전환이 얼마나 빠른데요.
저 다섯 사람은 가히 묘사에 있어서 악마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독자야 어떻든 작가는 묘사를 잘해겠죠.
그래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요? ㅋ

Falstaff 2022-09-20 19:1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요즘이야 고전이 아니더라도 재미난 게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예시를 든 다섯 사람들을 젊은이들은 TMI 라고들 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2-09-21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굴에 죽음의 낙인 찍히고 유다같은 남자가 주인공이라니 발자크의 묘사가 얼마나 굉장한지 저의 구매욕을 자극하네요. 존경하는 골드문트님! 추가 120원은 저입니다. 원래 땡투 발설 안 했는데 다들 하시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한게 좋네유~^^

Falstaff 2022-09-21 15:16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 땡투 고맙습니다.
예수의 열세 번째 남자의 진짜 정체, 아주 예상 밖일 겁니다. ㅎㅎㅎ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