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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76
허먼 멜빌 지음, 손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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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이라는 이름이 하도 입에 붙어서 그런가, 나는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그래서 뒤져보니까, 읽고 독후감을 쓴 책이 당연히 <모비딕>, <피에르, 또는 모호함> 그리고 《허먼 멜빌 단편집》 이렇게 밖에 안 된다. 그나마 <피에르, 또는 모호함>은 허먼 멜빌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영문학자가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아무 잘못 없고 전부 지적 수준이 일천한 내 탓이겠지만, 우리말 문장으로 바꾼 본문에 비문이라고 주장할 만한 보도 듣도 못한 문장이 왜란 전의 호환, 마마처럼 창궐하는 바람에 즐거이 감상하지 못해 사실 그건 읽었다고 주장하기도 쑥스러워, 그렇게 따지면 이제 겨우 세 번째 작품임에도, 나는 멜빌의 <모비딕>과 <필경사 바틀비>를 워낙 좋아해 그를 숭배하기로 했다는데, 뭐 아니꼬운 거 있으셔? 만일 당신이 이 <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를 가까운 시일 안에 읽으려 하신다면, 웬만하면 대산세계문학총서 176번으로 나온 이 책을 고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방송통신대학 출판부에서도 같은 작품을 출간해 판매가 기준 3,600원 저렴하게 팔긴 한다. 그러나 조심하시압! 방통대 출판부 책은 일찍이 읽다가 학을 뗀 <피에르, 또는 모호함>의 바로 그 역자가 번역을 했으니. 물론 전적으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
전형적인 19세기 사람인 허먼 멜빌. 19세기는 지금과 달라서, 뭐가? 강남 빌딩주는 강남 빌딩주하고, 의사는 의사끼리, 변호사는 변호사끼리, 전략까지는 아니더라도 끼리 끼리 혼인관계로 인맥을 도타이 해 한 쪽이 망가지더라도 다른 한 쪽이 그만큼 회복시켜 신분 세습을 가능하게 해주는 반면,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는 절대 한 번에 한 가지만 닥치는 법이 없는 불운이라는 발톱에 한 번 할퀴었다 하면 순식간에 집구석이 거덜이 나고는 했는데(그건 내가 잘 알지), 허먼 멜빌이 전형적인 그런 집안의 자손이라, 아빠가 잘 해오던 무역업에 실패하고 일찍 숟가락 놓는 바람에 허먼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던 형과 함께 여태까지 다니던 학교건 뭐건 일단 다 작파하고 농가 일꾼, 상점 점원 들을 전전해야 했으며, 뉴욕-리버풀 증기선 승무원부터 포경선 선원, 해군 입대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타이피>와 <오무>. 별로 읽고 싶지는 않을 만큼 박한 평가에 머무는 이 작품들이 당시 독자들에게 상찬을 받아, 멜빌은 이후 그의 대표작이자 처참한 실패작 <모비딕>을 발효한 바, 서점에 가서 <모비딕>을 찾으면 “해양 수산물 도서”에 꽂혀 있었다고 하니 알 만하지, 멜빌 살아생전 히트 작품은 <타이피>와 <오무> 둘 정도였단다.
<모비딕>은 다들 읽어 보셨을 터이지만, 너새니얼 호손 한테만 칭찬을 받았고, 이에 열을 받은 멜빌은 제2의 <타이피>를 원하는 대중의 바람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모비딕>보다 더 모던한 <피에르>를 출간하고, 당시에 출간해주지도 않았던 <십자가의 섬>에 이어 사실상 마지막 소설 작품이 될 <사기꾼>까지 연이어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게 말이 쉽지, 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가장이, 19세기에, 돈이 안 될 걸 뻔하게 알면서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암호해독기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난수표 같은 작품을 연이어 뽑아내는 건 보통 깡다구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구멍에 친 거미줄 앞에 장사 없는 법, 멜빌은 마흔일곱 살이 되는 1866년부터 20년 동안 우리가 아는 이이의 직업, 세관 공무원으로 죽기 5년 전까지 일해야 했다. 멜빌도 그놈의 우라질 연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없어서 펜을 던져버리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
<사기꾼>의 영어 제목은 “The Confidence Man”이다. “신뢰받는 사람.” 근데 왜 이걸 “사기꾼”이라고 번역했을까? 검색해보기 전에 역자 해설에 설명이 나온다. 아참, 위 문단에 쓴 대강의 멜빌에 관한 내력도 역자 해설에서 많이 인용한 거다. 고맙게도 굳이 검색해볼 필요 없을 만큼 나와 있다.
Confidence-man은 “1849년 이후에 쓰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며 피해자에게 신뢰의 징표로 시계나 다른 물건을 요구하여 받아내는 사기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사기꾼>은 1849년 이후에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1850년대의 사회를 풍자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게 본문만 480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인데, 1850년대 초의 어느 해, 4월 1일, 만우절부터 다음날 해뜨기 한참 전 새벽 두 세시까지, 미시시피 강을 왕복하는 증기선 피델 호의 세인트루이스 – 뉴올리언즈 구간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액자처럼 나열되어 있다.
작품 초장부터 독자들이 의심스러운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이 대거 출연한다. 먼저 피델호 선장실에 붙은 현수막을 소개해야겠다.
“동부에서 온 것으로 추측하는 사기꾼 수배. 눈에 띄게 어수룩해보이는 면이 있음.”
그러면서 생긴 모습을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글로 써 놓은 현수막. 이러니 독자가 모든 등장인물을 수상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눈 여겨 볼만한 인물은 특이한 바보다. 해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생각에만 집착하고, 그렇다고 전혀 불쾌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침입자로, 멀리 가는 건 아니지만 먼 곳에서 왔으리라 짐작하는 인물로, 현수막 앞에 스케치북 만한 종이에다 주로 (하도 많이 인용해 진부하기까지 한) 고린도전서 13장 구절을 써 들고 있다가 저 구석으로 찌그러져 까묵, 잠에 빠지는, 벙어리에 귀머거리로 밝혀지는(정말?) 남자.
두번째는 절름발이 흑인 거지. 괴상한 생김새에 뉴펀들랜드 종의 개 만한 키로 얼굴이 성인 남자의 허벅지에 부딪힐 정도라니 절름발이에다가 여차하면 난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밝은 얼굴로 군중들을 유쾌하게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자신을 “깜둥이 기니”라고 한다면서 정체는 주인 없는 개, 즉 해방 노예로 소개한다.
근데 여기 희한한 인간이 하나 등장한다. 남자다. 한 눈에 관세청 해고 공무원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다리를 절고 날카로운 눈매에 우거지 상을 하고 있다. 딱 봐도 허먼 멜빌 본인 아닌가? 하여튼 이 나무 다리의 사나이는, 절름발이 흑인 거지로 말할 것 같으면, 검둥이의 장애가 거짓이며, 심지어 원래 백인인 가짜 검둥이로 동부에서 사기행각이 발각되어 변장을 한 채 중남부, 당시 세인트루이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당시 의식으로 서부에 가까웠지만 하여튼 지금 지형으로 중남부로 숨어들어온 인간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승객들에게 경고하기를, 여보셔들, 여차하면 당신들 가운데 적어도 몇 명은 저 검둥이 기니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어. 조심하시오. 하고 무대에서 잠깐 사라진다.
여러 군중들은 목발의 사나이가 한 말에 동의해 검둥이한테 더 끈질긴 비난의 고함을 치지만 그래도 끝까지 목발의 사나이가 하는 말에 반발하는 인물도 적지 않아, 이들의 대표를 두 명만 꼽는다면, ① 키가 크고 근육질이라서 군인처럼 보이는 테네시 주 출신의 감리교파 목사, ② 늙은 검둥이를 신뢰한다며 지갑을 열고 50 센트를 꺼내 주는 시골 상인이 있다. 상인이 지갑을 열 때 지폐와 함께 명함이 한 장 떨어지고 검둥이는 왼발로 이걸 슬쩍 밟아 아무도 모르게 손에 넣는다.
조금 있다가 등장하는 모자에 상장喪章을 꽂은 남자가 나타나 시골 상인에게 접근해 본격적으로 사기를 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스스로 ‘존 링맨’이라 부르는 모자에 상장을 단 남자는 아예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사기꾼임을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다. 이이가 성공적으로 사기 치고, 배턴을 이어 등장하는 두번째 사기꾼이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 이이는 젊은 성직자에게 다가가 또 한 번의 사기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늙은 검둥이 거지 기니가 책의 30페이지에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목록에 들어 있다. 검둥이 기니를 변호해줄 수 있는 남자로 꼽힌 인물을 소개하자면,
상장을 단 신사, 회색 코트에 흰 넥타이를 한 신사, 큰 책을 가진 신사, 민간요법사, 노란색 조끼를 입은 신사, 청동 명패를 단 신사, 보라색 예복을 입은 신사, 군인 같아 보이는 신사 등이다. 그런데, 역자는 페이지 아래에 각주를 달고 이렇게 써 놓았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전개될 각 에피소드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한 명이 변장했을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다.”
하여간 나는 읽으면서, 이들이 한 명이라는 쪽의 주장에 표를 던졌지만 어떻게 읽든 그건 독자 마음이다.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이것이 아니고, 저 위에서 얘기한 선장실 앞의 현수막에 이름을 올린 동부 출신 사기꾼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백인 남자인지, 늙은 검둥이 절름발이 거지 기니인지 끝내 종잡을 수 없었다. 검둥이 기니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좀 미진한 기분. 이 작품이 그렇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어딘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하여튼 직접 읽어봐야만 알 수 있는 그런 책. Confidence, 신뢰. 이 말이 한 2,197번 정도 나오는데, 나중엔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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