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가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정철 지음, 김갑기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려서 집에 국문학 전집 비슷한 책이 한 질 있었다. 정여사가 여고 국어 교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에서 시작해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은 향가와 고려가요, 시조, 가사문학, 판소리 대본 등 갖은 우리 문학 전반이 실려 있었는데, 까까머리 소년이 하루는 우연히 그 전집을 꺼내 읽어보고 나름대로 대단한 흥미를 느꼈었나보다.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어쩌면 있던 사실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기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열서너 살 시절에 닥치는 대로 읽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 판소리 대본 등은 한 시절 소년으로 하여금 장래에 국문학 또는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가리가 더 커짐에 따라 물리, 화학과 수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 감에 따라 결국 방향을 바꿔버렸지만 우리 고문에 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엔 이과생들도 고문을 배웠고, 교과서에 나온 훈민정음과 <조침문>, <상춘곡>, <관동별곡>의 부분들을 달달 외우지 않으면 종아리를 맞던 시절이었다. 본고사 고문 문제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마치 수학의 로그 문제를 틀리는 것처럼 합격은 물 건너 간 거라고 하면서. 그땐 문법도 왜 그렇게 재미났었는지 몰라. 지금은 고문이나 문법, 다 잊었지만.


  <관동별곡>을 배운 고등학생 시절, 가사歌辭 속 풍경의 놀랍도록, 영웅적인 속도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한 번 보자. 고문 지원이 안 되어 그저 비슷하게 현대어로 적어보겠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도라다리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고 믈너나니 옥졀이 압패셨다.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셤강은 어듸메오 티악은 여긔로다.”


  계속 이어지지만 여기까지만 보자. 강호, 송강 정철이 사직하고 내려와 있던 전라도 담양 대나무 숲에 자연을 벗하는 병이 깊어 있었더니, 덜컥 관동 팔백리를 관장하는 강원도 관찰사를 하란다. 그래 성은이 망극할 수밖에. 연추문으로 대궐에 들어가 나중에 선조라 불릴 임금을 배알하고 경회남문을 바라 물러나는 송강의 손에는 왕명을 전하는 교지 한 장과 함께 옥으로 만든 관직의 패인 옥절이 들려 있다.

  다섯 마디에 작자는 전라도 담양 땅에서 한양까지 올라와 경복궁에 들어 왕을 배알해 사령장을 받았고, 다음 두 절 만으로 부임지인 원주 땅을 밟는다. 간단하게, 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로 돌아가니 횡성(섬강)은 어디인고, 여긴 원주, 치악산이로세. 딱 두 행, 한 문장으로.

  물론 이건 시라서 굉장한 축약이 가능했겠지만, 만일 같은 내용을 헨리 제임스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소설에서 묘사했다면 최하 3백 쪽, 원고지 천 매 가까이 필요했으리라.

  위의 인용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철 권위자인 역자 김갑기는 이를 풀어 이렇게 썼다.


  “자연을 사랑하는 버릇이 고치지 못할 병처럼 깊어져 물러나 쉬고 있더니, 강원도 관찰사의 명을 내리시니, 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갚을 길이 없구나. 연추문(延秋門) 달려들어가 임금을 뵙고 물러나니, 옥으로 만든 강원도 관찰사 신표가 앞에 서 있구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의 여강을 돌아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에 도착했다. 이곳 섬강은 어디쯤인가? 치악산은 바로 여기로구나.”


  해석문을 읽으면 내용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되 원문이 가지고 있는 운율을 전혀 살리지 못해 가사문학을 읽는 맛과 멋을 재현해내는 데는 실패한다. 3.4.3.4/2.4.3.4/2.4.3.4 //3.4.4.4/ 3.4.3.4 // 3.4.3.4/3.4.3.4의 율조. 이쯤 되면 이거, 과학 아닌가?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정철이 대단한 문인, 특히 시인이기는 했지만 역시 그의 정체성은 전형적으로 권력을 위해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치꾼이었다. <관동별곡>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임금에 대한 노골적인 아첨으로 시작해, 강원도 관찰사로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하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겠다고 다짐한다.


  “궁왕 대궐 터희 오쟉이 지지괴니

  쳔고흥망을 아난다 모라난다.

  회양 네 일홈이 마초아 가탈시고

  급댱유 풍채를 고텨 아니 볼 거이고.”


  철원, 예전 태봉국의 궁예 대궐을 지나며 보니 까마귀 까치가 지저귀는데 저것들이 천고의 흥망을 알까 모를까, 금강산 부근 회양 땅이 우연히 중국 회양과 이름이 같아, 나도 (중국 역사상 목민관으로 이름이 높은) 급장유처럼 선정을 베풀어 보겠노라, 하고 다짐하지만 정철의 깊고도 깊어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상은 숭왕崇王 사상. 때는 16세기말, 조선사에서 제일 유능하게 신하들끼리 싸움을 붙여 은근히 왕권을 세우는 방면에서 도가 튼 선조의 의도대로 반대파인 동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단연 최전선에서 눈썹을 휘날리고 백성이야 굶어 죽든, 노예상태로 빠져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던 정철은 <사미인곡>이나 <속미인곡>, <성산별곡> 그리고 <관동별곡>에서도 빠짐없이 태평성세만 노래한다.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각 고을을 한 곳도 빠짐없이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게 꼭 미덕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원주에 터를 잡고 각종 중대사를 다루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요새처럼 하루 만에 뚝딱 다녀올 수도 없는 원격지를 몇 달에 걸쳐 지붕 없는 가마를 타고 건들건들 흔들리며,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근여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 가나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백양 속에 가기 곳 가면

  누론 해 흰 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해 잰납이 파람 불 제야 뉘우찬 달 엇디리”  (정철, <장진주사> 전문)


  우리나라 최고의 술꾼 가운데 한 명 답게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자작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읊으며 유람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말이지. 이이에겐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고, 곳간 또한 풍족해서 요순시대에 필적해야만 했을 것이다.


  정철을 읽는 심사가 참 복잡하다. 마치 저 훗날 불란서의 조각가 “로댕”처럼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가 되라고 친구가 뜻과 관계없이 음가音價만 보고 지어준 호, “미당” 서정주를 보는 것 같다. 시 하나는 정말 절창 중의 절창이지만 딱 시 만 좋은 시인. 숱한 정치인들을 모진 고문 끝에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리고, 참형에 처하고, 곤장을 맞아 죽게 만든 정승 출신의 시인. 그래도 나는 이이의 시를 상찬할 수밖에 없다. 비록 유배를 간 강화에서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마셨으니 큰 시인의 관을 쓴 이의 자존심으로서는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가나 /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크게 유감은 아니었어야 하는데.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2-07-22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강이 부모 시묘살이를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해서 근처 송강 이름을 딴 지명이 많습니다.
가끔 산책하다 송강 시비공원도 지나는데 정철의 시조가 큰 돌에 여러개 새겨져 있어요.
저희 아파트 바로 뒤는 송강이야기공원이랑 이어지구요.
근데 골드문트님 십대초반에 시조 읽고 국문학을 전공할 결심을 하셨다니 역시 다르십니다. 👍

Falstaff 2022-07-22 16:20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고양 사시는군요!
그 동네 둘레길이 무척 부러운데요.

ㅋㅋㅋㅋ 애초에 창작 말고 우리 고전이나 한문학을 하고 싶었습죠. 그러다 집안이 망가져 물리, 화학, 수학하다 말면 취직이라도 하는데, 국문 한문 공부하다 말면 먹고 살지도 못한다고..... ㅋㅋㅋㅋ 세상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게 빵이잖아요.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과 쪽을 택했습죠. 뭐 인생이 다 그래요. ^^

mini74 2022-07-2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상춘곡 외우면서 맞은 세대입니다 ㅎㅎㅎ 아이들이 무지 싫어하는 분 중 꼭 정철이 들어가죠. 전 관동별곡에 임포 등 신선 이야기 좋아했어요 신선과 술이야기 뭔가 골드문트님과 어울립니다. 이게 시험문제로 나와서 그렇지 그냥 즐겁게 읽으면 참 좋은데 말이지요 ㅠㅠ

Falstaff 2022-07-22 16:22   좋아요 1 | URL
오, 상춘곡도, 조침문도 진짜 좋아요. 그때 지금처럼 좀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으면 정말 잘 외웠을 텐데 말입죠.
ㅎㅎㅎ 신선, 도교와 술. 정철의 <장진주사>도 좋고요, 이백의 <장진주>도 아주 절창입니다! 관동별곡에 이백이 그리 많이 등장하는지 이번에 읽고 깜놀 했답니다. ㅎㅎㅎ

바람돌이 2022-07-22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저 송강의 시 볼때마다 왕타령하는거때매 미치는줄 알았음다. 도저히 좋아할수 없는인데 역시ㅠ골드문트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라 시를 아셨군요

Falstaff 2022-07-22 16:25   좋아요 1 | URL
특히 <사미인곡>에서 ˝님˝을 왕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진짜 연애하는 내 님이라 생각하면 기가 막힌 연애시인데, 우리나라 학교 교육, 그거 문제예요. ㅎㅎㅎㅎ
고딩 때 이런 이야기 했다가 국어 선생께 장난이 분명한 귀싸대기 한 대 얻어 터졌습니다. 그분도 제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토닥이신 거니까 제 표현 ˝귀싸대기˝를 단어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

잠자냥 2022-07-22 09: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려가요, 한시, 가사 문학 참 좋아했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국문과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ㅋㅋㅋㅋ

제가 그 시절 정말 좋아했던 시는, 지금도 좋아하지만 정지상의 <송인>입니다. 아직도 외워요. ㅎㅎ

우헐장제초색다
송군남포동비가
대동강수하시진
별루년년첨록파

캬..... 특히 마지막 종장 다시 읽어도 좋네요...

雨歇長堤草色多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네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푸른 물결에 이별의 눈물이 더해가는데

mini74 2022-07-22 09:40   좋아요 3 | URL
헉 자냥님 저도 송인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김부식 싫어한 ㅠㅠ

잠자냥 2022-07-22 09:48   좋아요 3 | URL
정지상이라는 이름도 뭔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Falstaff 2022-07-22 16:28   좋아요 3 | URL
오, 그럼요, 우리나라 먹물들이 쓴 한시 가운데 멋있는 것이 을매나 많은데요.
정지상은 당대의 문장가 아닙니까요.
저는 정지상, 하면 귀신이 되어 화장실에서 김부식한테 빨강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하다가 철천지 원수 김부식의 부랄을 터뜨려 죽인 이야기가 젤 재미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7-23 2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관동별곡 배웠던 생각납니다.
저는 외우라고 해도 안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어서(바틀비^^)...
요즘에는 시경도 그렇고 옛시가 좋은듯요
감출듯하며 내보이는 감정이 있어요^^

Falstaff 2022-07-25 06:14   좋아요 2 | URL
오호, 그러셨군요. 한 시절의 레이디 바틀비. ㅋㅋㅋㅋ
아이고, 요새 길고 재미난 소설을 읽다보니 알라딘 로그-인 할 시간도 없어서 이제야 답글을 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