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의 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사가 이번엔 한 에이레 사람의 전기를 썼다. 로저 케이스먼트. 이 책을 쓰기 7년 전에도 페루 태생의 화가 폴 고갱과, 스페인-프랑스 혼혈 외할머니이자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여성주의 운동가 플로라 트리스탕을 모델로 한 <천국은 다른 곳에>를 쓴 적도 있으니 별난 일은 아닐 터. <천국은….>을 통해 플로라 트리스탕이라는 여성 운동가를 처음 알았던 것과 같이 <켈트의 꿈>을 읽으면서 로저 케이스먼트를 알게 됐다.

  로저 케이스먼트는 1864년 9월, 더블린 교외 샌디코브에서, 8년간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기병연대 출신이자 자신의 아버지, 아들과 이름이 같은 로저 케이스먼트 대위의 딸(아그네스)-아들(찰스)-아들(톰)에 이은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난다. 케이스먼트 가문은 18세기 이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적이고 친 영국적 지역인 얼스터의 중심지 앤트림 카운티에 정착한 앵글로-아이리시 프로테스탄트로, 얼스터 지역은 벨파스트의 서남쪽에 위치해 현재도 아일랜드 공화국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 영토에 속해 있다. 당연히 성공회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지배를 받을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누렸던 우월한 지위 비슷한 것을 태어나서부터 은근히 향유했을 것이다. 이 가족이 살던 북부 에이레의 정반대, 섬의 최남단에 터를 잡고 살던 앵글로-아이리시 프로테스탄트 가문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윌리엄 트레버.

  로저 케이스먼트 대위는 영국사람이 아니라 가톨릭을 믿는 에이레 여인 앤 젭슨과 결혼했는데, 앤은 혼인을 위해 개신교로 개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어서 아들 로저가 네 살이 되던 때, 웨일스에 살고 있던 형제를 보러 갔다가 자식들로 하여금 가톨릭 영세를 받게 한다. 이렇게 로저 케이스먼트는 가톨릭 영세를 받은 성공회 교도가 되며, 이건 그의 삶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중요한 기재로 작용하지만 여기에 밝히지는 않겠다.

  그러니 주인공 로저 케이스먼트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약간 혼돈이 생겼을 수도 있다. 반half 잉글랜드, 반 에이레 인. 반half 성공회, 반 가톨릭. 이러한 가치의 혼돈은 천생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아버지 로저, 할아버지 로저 케이스먼트와 완전하게 다른 길로 접어서는 첫번째 핀트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자, 뜸은 그만 들이고 무엇이 다른지 확 말해버리자.


  로저 케이스먼트는 전직 영국의 영사로, 아프리카 콩고와 페루의 아마존에서 현지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행위, 수탈, 인신매매, 신체절단, 기아를 비롯한 노예상태가 각각 벨기에 레오폴드 2세와 영국에 법인을 둔 고무 채취 회사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음을 문명국 진영인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폭로해 식민지 내 원주민의 인권보호에 혁혁한 공을 세워 1911년에 기사Sir 작위를 받았고 (영국의 왕에게 작위를 받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작위 수여식에는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기는 했지만), 외무부에서 퇴직할 당시엔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도 받은 바 있는 성마이클-성조지 훈장도 서훈받는다. 그러나 콩고와 아마존에서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 점령의 실체를 진저리치게 절감한 케이스먼트는 영국 외무부를 사퇴하기 이전부터 에이레 독립 단체에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했던 바, 유럽 국가에 의한 유럽 지역의 식민지는 통치 중에 피식민지 국민들에게 가하는 학대의 잔혹성만 비교적 가벼울 뿐 기본적으로 그들이 아프리카나 아마존에서 원주민을 학대하며 갖은 부를 독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진리를 체득한 때문이었다.

  어머니 앤 젭슨은 로저가 아홉 살 때 죽고 만다. 아버지 케이스먼트 대위는 이에 몹시 상심해 네 아이들을 자신의 작은 아버지에게 맡기고 호텔에서 숙식하며 고통과 고독에 반 미치광이 생활에 접어든다. 영매, 카드점, 유리구슬을 통해 죽은 아내와 교신에 열을 올리다가 로저가 갓 열두 살이 됐을 때 결핵으로 아내를 따라가고 마는데, 종조부는 3년을 더 학교에 보내고는 이제 더 이상 케이스먼트 대위로부터 보조금 없이 교육을 시킬 여력이 없어 이모네 가족이 있는 리버풀로 이사한다. 여기서 평생 가슴 속 연인과 비슷한 친구로 지낼 외사촌 누이, ‘지’라는 애칭으로 부를 거트루드 베니스터와 친하게 되고, 이모부가 오래 근무했던 영국-서아프리카 상선회사 엘더 뎀프스터 라인에 입사한다. 케이스먼트 대위는 로저가 어렸을 때부터 군대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던 바, 백인이 밟아본 적이 없는 대자연의 통로를 개척한 일, 이 과정의 고통을 온몸으로 용맹스레 인내한 것, 자연의 장애물을 제거한 모험 등에 흥미가 많았던 로저 케이스먼트는 처음엔 회계일을 하다가 서아프리카에 세 번 다녀온 후, 회사를 그만 두고, 마치 프랑스 시인 랭보처럼 훌쩍 아프리카로 떠나버린다.

  로저 케이스먼트가 처음 생각했던 식민주의는 여전히 석기시대에 살며 때때로 식인의 습관마저 버리지 못한 원시상태의 원주민들에게, 원주민들을, 노예제와 식인이라는 악습을 끝내고, 아프리카 부족들을 야만의 상태에 가두었던 우상숭배와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 소위 3C, Christianity, Civilization, Commerce, 기독교, 문명, 무역이란 삼성위를 바탕으로, 콩고 영토에 무역을 개방하고, 노예제도를 철폐하고 이교도들을 문명화 하며, 기독교화 하기 위한 선한 행위였다.

  로저는 빅토리아 호수 부근에서 행적이 사라진 위대한 인도주의자 탐험가인 리빙스턴을 다시 발견한 웨일스 출신의 미국 기자이자 사실상 냉혹한 원주민 탄압자였던 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열광하여 그의 수하에서 일하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첫 발을 뗀다. 얼마 안 있어 스탠리의 정체를 확인한 로저는 그에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인해 대장은 때때로 회한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자기 땅에서 원주민에 가한 무자비한 폭력을 전 세계에 고발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동시에 콩고 현장과 원주민에 가하는 폭력에서 조국 에이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조국은 케이스먼트 가문의 성공회-잉글랜드가 아니라 어머니 앤 젭슨의 에이레였기 때문에.


  이 책은 7백 쪽을 넘어가는 장편소설이다. 위에 쓴 것은 첫번째 파트인 “콩고” 까지를 아주 짤막하게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작품에 관해 말해보자. 아주 솔직하게 쓰겠다. 가끔 솔직하게 쓰면 생각지도 못한 저 음침한 구석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눈두덩과 관자놀이를 때리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엣다 모르겠다, 한 번 더 돌 맞고 아프다 싶으면 이까짓 독후감 냅다 지워버리고 또 한 석 달 책 안 읽으면 된다.

  영어에 능숙하신 분은 이 책을 읽는 대신 위키피디아에서 “Roger Casement”를 검색해보시는 건 어떻겠나. 능숙하지 않은 분은 자동 번역기를 돌리거나 하다못해 나무 위키를 보시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을 듯하다. 그게 정가 25,000원, 적지 않은 돈과 7백 쪽이 넘는 분량을 읽기 위해 시간을 투여하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인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예컨대 콩고, 벨기에, 아마존, 아일랜드, 페루, 뉴욕, 런던, 스페인의 각지에서 숱한 사람과 도서관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시대별로 정리한 다음, 그래도 빈 곳은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적절하게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위대한 인권주의자이며 실천가, 민족주의자, 혁명가이면서 반역자이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로저 케이스먼트. 이이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 그윽한 회색 눈, 검은 곱슬머리, 맑은 피부, 고른 치아, 절도 있고 신중하고 깔끔하고 친절하고 자상. 아일랜드 억양이 두드러지는 영어를 구사해 놀림감이 되기도 함. 진지하고 끈기있고 말수가 적은 소년. 지적인 준비가 잘 돼있지 않지만 노력파. 내성적인 성격. 금욕적인 습관 때문에 친구가 거의 없음. 골초.


  로저 케이스먼트가 체포되고, 가택수색에서 일기장이 발견되고, 일기장 안에서 당시는 물론이고 향후 50년 동안 혐오범죄 가운데 하나였던 동성애적 취향이 드러나, 동성애를 향한 성적 갈등의 해소에 관한 약간 쑥스러운 이야기를 억지로 결점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케이스먼트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추호도 뜻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갖춘 정의남.

  일생을 통해 단 한 번, 전범국가 독일과 연합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펼쳐야 한다는, 판단의 오류를 겪었을 뿐인 무결점의 사나이. 그를 위한 연대기. 이를 위해 꽉 짜여진, 그래서 독자는 그냥 읽어주기만 하면 될 뿐 책을 읽으며 결코 머리 굴릴 기회를 주지 않는 친절함. 그리하여 주인공 로저 케이스먼트는 자신의 신념에 관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는데,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는가. 나는 전기물이 아닌 “현대” 소설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뭡니까? 그래도 명색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인데 말이지. 왜? 아예 논문을 쓰시지 그랬을까?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띈 문장 하나.

  “삶은 갑자기 소극笑劇으로 바뀌는 연극처럼 부조리한 것이 아닐까?”




* 요사가 아닌 다른 작가가 이 책을 썼다면 별 넷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전작들로 한껏 고양된 기대감에 미치지 못한 점이 나로 하여금 별 하나를 더 깎게 만들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2-07-01 0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사가 쓴 ‘소설’ 얘기 맞지요??
요사에게 던질 짱돌을 찾아야….

Falstaff 2022-07-01 06: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주인공을 너무 전형화 시켜서 오히려 반감이 생기더라고요. 아예 내놓고 전기나 평전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쓰기엔 또 소설가 특유의 창작욕이 내버려두지 않았던가 봅니다.
뭐 짱돌 씩이나요. 혹시 사셨어요? 그럼 몰라도. 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07-01 0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고 이 책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안타깝네요. 요사 예전 책이나 찾아봐야겠네요. ㅠㅠ

Falstaff 2022-07-02 08:08   좋아요 1 | URL
ㅎㅎ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특히 3부에서 더 그런데, 재미 없어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7-01 0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의 전기소설이군요.
이 책 비싸더라구요. ㅎ
요사가 썼기에 세개! 작가에 대한 골드문트님의 애정이라고 봐도 되겠죠?

Falstaff 2022-07-02 08:09   좋아요 2 | URL
옙. 그렇습니다.
제가 요사를 많이 좋아합니다. 번역해 나온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거든요.
전 <천국은 다른 곳에>가 제일 좋았답니다. ^^

포스트잇 2022-07-01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사가 왜 이 인물의 전기소설을 쓰고 싶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습니다.
궁금하고 기대하는 책을 먼저 읽어보신 분들의 이런 소중한 후기, 고맙습니다.^^

Falstaff 2022-07-02 08:12   좋아요 1 | URL
요사의 특기 가운데 하나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재자들을 한 명씩 돌려 까는 거였는데 이젠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하여튼 페루를 비롯한 그곳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거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학대를 지적하고, 반식민주의와 독립을 주장한 로저 케이스먼트라면 당연히 요사가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레이스 2022-07-01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안사고 기다렀는데... 일단 빌려봐야겠네요^^
이런 리뷰 넘 감사해요 ~

Falstaff 2022-07-02 08:13   좋아요 1 | URL
옙. 대출해 읽는 게 갑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