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시선집
신현정 지음 / 북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김사인은 자신의 시 <바보사막>을 이렇게 시작했다.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검붉게 술에 탄 얼굴”의 시인 신현정이 “앞자락 풀어헤치고 광화문 네거리 둥둥 떠 흘러” 갔다고도 했는데 그건, 그 강을 건너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을 해도 결국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저 예전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白首狂夫에 빗대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김사인은 이런 식으로 애도했다. 시의 제목 <바보사막>이 시선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을 제외하면 죽기 1년 전인 2008년에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신현정의 마지막 시집의 제목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품절이라 괜찮은 상태의 헌책도 구하기 쉽지 않지만.
  나도 시집은 주로 메이저 출판사에서 찍은 것들을 읽는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것들만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집이 나오고 또 사라진다. 신현정이란 시인도 얼굴만 익었을 뿐 그의 시 한 편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메이저 출판사 창비에서 나온 김사인의 시집 안에 위에 인용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시 <바보사막>을 읽고 신현정의 시집 한 권을 읽기로 작정을 했다.

 

  신현정은 1948년 왕십리에서 태어난다. 당시 서울 “특별시”에서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 모두 자유낙하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모았다가 한두 달에 한 번씩 나지막하게 “변소치알~, 변소치알~”을 외치는 (이렇게 얘기하면 그분들께 송구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에 썼던 말로 그대로 하자면) 똥 퍼 아저씨를 불러 화장실을 비웠는데, 이렇게 모은 분뇨를 가져다 버린 곳 가운데 가장 큰 곳이 왕십리였다. 그리하여 생긴 말이 “왕십리 똥파리”다.
  이이의 이력을 보자. 11번, 15번, 23번 버스 타고 가다가, 흰 폴라 교복 입고 다닌 성신사대부속여고 여학생들과 함께 동선동에서 내리면 바라 보이는 경동중학교를 졸업했단다. 고등학교는 어디를 다녔는지 나와있지 않지만,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경동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치고, 고등학교 다닐 때 서울대에서 주최한 전국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시 부문 최우수 상을 받아버린다. 제목이 <아기 새와 능금나무>란다. 내가 부모였더라도 참 고민이 컸을 거 같다. 당시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는 소위 5대 공립과 5대 사립이라고 해서 경동고등학교도 5대 공립 안에 포함되는 명문 학교였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대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떡하니 최우수 상을 받았으니 바람 하나는 제대로 들었을 터이다. 그러니 그냥 공부에 전념하면 소위 스카이 한 군데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 그냥저냥 중산계급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을,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아리 공동묘지 바로 옆댕이에 붙어 있던 미도극장 길 건너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해 오정희의 1년 후배가 된다. 하긴 스카이 졸업해봐야 지가 기껏 봉급쟁이밖에 더 하니?
  1967년에 입학했지만 당시엔 군 복무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 남학생들은 대강 8년 동안 학적을 유지했었다. 그리하여 1974년에 서라벌 중학교로 교생실습을 가서 소년 골드문트와 조우하는 행운을 누렸으며, 틀림없이 소년 골드문트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같은 해 <그믐밤의 수繡>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시인 협회에 이름을 등록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1975년에 서라벌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지만, 애재라, 골드문트와 다시 만나는 건 그가 죽은 다음 이 시집을 통해서가 유일하다. 그 다음부터는 세상 사는 일이 뭐 다 비슷비슷하게 비극적이니 그냥 취직해 살았고, 과 후배와 결혼을 했고, 특별하게 시를 썼으며, 얼굴이 벌겋게 탈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가, 그래서 그랬는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어차피 세상 하직하면 한 줄만 남는 게 인생이다. 신현정은 죽어서 시인으로 남았다. 나는? 학생으로 남을 예정.

 

  김사인은 신현정을 애도하는 시의 제목을 <바보사막>으로 했으니 이이의 대표 시가 이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 신현정의 오리지널 <바보사막> 전문을 옮겨보자. 미리 독자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신현정은 시행마다 한 줄을 떼어 썼다. 즉 한 줄 읽고 난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잠깐 있다가 다음 행을 읽으라는 뜻이지만 그렇게 시를 옮기면 지면, 아니지, 당신의 화면을 너무 많이 차지하게 되어 행과 행 사이의 빈 행은 삭제해버리고 그냥 행들을 연달아 쓰겠다. 다만 한 행을 읽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음 행을 감상하시기만 바랄 뿐.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리고는 난생 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전문)

 


  이 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막은 머나먼 여행길이라고 처음부터 단정을 하고, 시는 시작한다. 즉,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여행길을 끝까지 가는 일이니까, 사람에게 가장 힘든 여행길, 즉 한 세상 살아가는 걸 뜻하겠지. 낙타를 타고 해와 별을 따라. 근데 왜 바보일까? 없이는 갈 수 없을 낙타를 죽여 굳기름을 빼먹어서? 황금알을 한 방에 얻기 위해 암탉의 배를 가른 욕심쟁이처럼 사막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다리를 편하게 해줄 낙타를 찌르고 향연을 벌여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이 시에 대한 내 생각은 틀렸다. 그렇다. 당신 생각이 옳다.
  이 시선집의 특징은 신현정이 생전에 낸 시집 네 권에서 좋은 것들을 뽑아 찍었다. 1983년의 첫 시집 ≪대립≫, 2003년에 낸 ≪염소와 풀밭≫, 05년의 ≪자전거 도둑≫, 08년 ≪바보사막≫. 실린 순서는 거꾸로, 1부가 ≪바보사막≫에서 발췌한 것이고 4부가 ≪대립≫에서 뽑은 것이다. 1983년에 처음으로 시집을 찍었다고? 당시에 21세기의 신현정처럼 시를 쓸 수는 없었다. 이미 모더니즘으로 튼튼한 자리를 지켜온 중견시인이 아닌 바에 전(全)의 시대에 말랑말랑하게 자연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만큼 문학적 린치를 당했을 터이니. 그러나 신현정은 애초에 투쟁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나중에 노래할 사막조차도 처음엔 이렇게 애매하게 노래해야 했으리라.

 


  사막의 시간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온몸이 사막이 되어 사막을 가는, 한 방울의 물을 아끼며 먼 길을 가는 대상隊商의 고단한 얼굴과 함께 그것만이 소중한 시간, 모든 것 다 고요히 사막으로 정지돼 있는 사막의 시간은 오직 그것만이 시간인 한 방울의 물을 아끼는 사막의 시간.  (전문)

 

  그런데, 내가 읽기에 가장 좋았던 글들은 세번째 시집 ≪자전거 도둑≫에 있었다. 신현정 특유의 감수성이 잘 나타났다고 읽었다. 이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시를 소개한다. 역시 행과 행은 원래 한 줄 씩 띄어 있지만 붙여서 쓰겠다.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전문)

 


  요즘엔 다 아파트에 살아서, 나도 오래도록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시를 읽자마자 저 먼 옛 시절을 소환했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마당 펌프가나 수돗가에서 내의 차림으로 양치하고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발가락 사이에 비누칠도 하던 시절. 겨울이면 솥에 끓인 물을 한 바가지 들고 그거 하나로 찔끔찔끔 찬 기운만 없애 놓고 몸을 덜덜 떨면서도 씻을 거 다 씻던 광경. 나팔꽃이 피었다니 여름날 새벽이었나봐. 나도 지금 아파트 팔고 시골집 하나 사서 이사가면 세수하다가 하늘을 얼핏 올려다보고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시인이니까 하늘도 공연히 볼 뻔했다고 눙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이런 재주를 타고난 게 아니니까. 독자는 그저 시 읽고 아련하게 옛 생각 한 번 하면 그걸로 장땡인 거다.
  아, 신현정. 조금 더 살다 가지. 겨우 만 61년을 살고 가버렸다. 늙은 골드문트가 좋은 기운을 한 번 더 줬을지 어떻게 알고. 뭐 다 인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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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27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소년 골드문트에게 좋은 영향을 받은 시인이라니 궁금해집니다! 안타깝네요 정말 늙은 골드문트의 좋은 기운을 받았어야 하는데...

Falstaff 2022-01-27 10:14   좋아요 3 | URL
시는 제 타입이 아니라 약간 아쉬웠습니다.
소년 금순이가 좋은 기를 줘 등단까지만 한 걸로. 대신 교생 신현정에게 술 좋아하는 영향을 받은 걸로 하면 공평할까 싶네요. ㅋㅋㅋㅋ

mini74 2022-01-27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진 이린 시 참 좋네요. 나팔꽃 한 개 란 표현도 하늘을 공연스레 다 볼 뻔했다는 너스레도 ㅋㅋ 골드문트님 문학계의 산증인 같단 생각이 가끔 들어요 ㅎㅎ

Falstaff 2022-01-27 19:39   좋아요 1 | URL
그죠, 거 참, 재미있는 십니다.
저야 뭐. ㅋㅋㅋ 뒷담화 조금 알고 있다는 거 말고는 ^^;;;

coolcat329 2022-01-27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시인과 인연이 있으시군요.
왕십리 똥파리 ㅋㅋ 아 이런 이야기 참 재밌네요.

Falstaff 2022-01-27 19:4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어떻게 해서 대학에 갔는데, 집이 왕십리인 아주 독특한 선배가 있었어요. 아직도 친하게 지냅니다. 그 선배 앞에서 왕십리 똥파리 어쩌구저쩌구 했다가 ㅋㅋㅋ 재미난 추억이 있습니다.

coolcat329 2022-01-27 19:46   좋아요 2 | URL
네 ㅋㅋ제가 80년대 초딩이었는데 그때 왕십리 똥파리 엄청 유행이었어요 ㅋㅋㅋ

바람돌이 2022-01-28 0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는..... 제가요. 알라딘 서재지인님들이 <시와 산책>이라는 책 너무 좋대서 2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거든요. 책도 얇아요. 근데 2번 다 실패했어요. 안 잃히더라구요. 공감이 안가요. 아 정말 이토록 메마른 감성이라니....ㅠ.ㅠ

Falstaff 2022-01-28 07:48   좋아요 0 | URL
조금 오래된 시집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으세요.
제 경우에 국한해 말씀드리면, 시 읽는 건 정말 훈련이 필요하더라고요.
에휴... 저도 요새 우리 시 읽으면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랍니다. ㅠㅠ

hnine 2022-01-28 0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기새와 능금나무> 제목이 어째 처음 듣는 제목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기억은 나지 않고 ㅠㅠ

Falstaff 2022-01-28 07:50   좋아요 0 | URL
혹시 존 골즈워디의 <능금나무 아래서>를 연상하시는 거 아닌지요.
그 작품이 딱 청춘의 아리아리한 추억을 긁는 듯하잖습니까. ^^;;

hnine 2022-01-28 08:31   좋아요 1 | URL
아뇨, 말씀하신 <능금나무 아래서>는 대학생때 아마 극장에서 영화로 봤던 그 작품인 것 같네요. <썸머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던.
<아기새와 능금나무>는 훨씬 더 어릴때, 초등학생때였나, 창작동화집 같은 책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나질 않는거예요 ㅠㅠ

Falstaff 2022-01-28 08:33   좋아요 0 | URL
오 그럼 정말 이 시인이 써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로 그 시일 확률이 높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