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오르 1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서원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다섯 번째 읽은 미셸 투르니에. 나는 쭉 뻗었다. 모두 두 권, 6백 쪽이 넘는 분량. 얼마나 더 읽으면 여태 읽은 것이 아까워서 악착같이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싶어 192쪽까지 갔다가, 한 문장이라도 더 진도를 나가면 눈알이 훅 쏟아지고 점심 때 먹은 돼지고기 김치볶음이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게 다 책이 지루해서는 아니다. 무슨 사무실 실내 온도가 27도냐고. 반팔 티셔츠에 구겨진 마 바지 입고 다니는 여름철 냉방온도가 24도이건만, (오늘은 2021년 12월 13일. 실외 최저기온 영하 11도) 스웨터에 기모바지 입은 한겨울이 27도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지. 고온 건조한 열악한 사무실 환경에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지독하게 철학적이고 광(빛)물리학적이고, 기독교적인, 장황한, 현학적인, 하이퍼레알리즘 적 변설에 나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이마에 땀 흐르고, 횡경막 부근에 땀 배고, 부랄 밑에 습기 차는데 도무지 알아채지 못할, 어떻게 하면 독자들의 뇌 속 백질과 회백질을 효과적으로 섞어 흔들어놓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철학적, 신학적 변설을 늘어놓으니 어떻게 살라고. 아이고, 내가 졌다.

 

  저 프랑스 땅 브르타뉴 바닷가의 피에르소낭뜨라는 곳에 마리아 ‘바르바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산다. 상선의 이등항해사였던 첫 남편과의 사이에 첫 번째 임신을 하고, 과부가 된다. 그래 에두아르 쉬렝이란 키 크고, 몸이 날씬하며 자세가 우아하고 세련된 데다가 생기기까지 기막힌 남자와 재혼하고, 본격적으로 계속 임신과 수유의 사이클을 돌고 있었다. 마리아는 임신을 하거나 젖을 먹일 동안만 안정되고 행복해하는 유형의 여성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았는지, 몇 명인지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장과 폴, 일란성 쌍둥이를 낳을 때 수상쩍은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출산기능을 멈추어 버렸다.
  아,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을 읽을 때, 이런 이상abnormal 인간이 등장하면 그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다분하게 우화적 인간, <마왕>의 주인공 아벨 티포주 같은 특별한 천성을 가진 역할로 보아야 적절하다. 이런 특성은 마리아의 쌍둥이 막내들도 마찬가지다. 장과 폴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성, 쌍둥이성, 하나가 A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도 동시에 A를 생각한다거나, 하여튼 원격 텔레파시 통신 비슷한 기능을 하는데, 이때 이들은 ‘아이올리스’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역시 진짜 그러리라고 여기면 괜히 독자들 골치만 아프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엄마를 제외한 누구도 쌍둥이들을 구별하지 못하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폴의 얼굴에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발적이고 단호한 모습이 어린 반면, 장의 얼굴에는 불안하고 개방적이며 호기심 많은 표정이 어렸다고 한다. 이걸 억지로 가져다 맞추면 폴은 나르치스, 장은 골드문트에 가깝다고 해도…… 되나?
  쌍둥이의 외할아버지가 이 브르타뉴 바닷가 동네에서 방직기 스물일곱 대를 갖춘 섬유공장을 하고 있다가, 외동딸 마리아가 재혼을 하고 자기도 힘이 빠지니 사위 에두아르 쉬렝에게 사장 겸 대주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래서 여태까지는 마리아의 출산능력을 마감시키고 태어난 장과 폴, 일란성 쌍둥이들의 쌍둥이성, 특이한 능력을 위주로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다가 갑자기 이들의 아버지 에두아르 집안 형제 이야기로 넘어간다.
  삼형제 가운데 첫째가 귀스타브로 렌느에 있는 대대로 살아온 집에 살고 있다. 아내와 딸 넷을 두었는데 우스꽝스러운 청교도적인 엄격함이 몸에 밴 인물로, 아내와 딸들이 자기 어머니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바람에, 어머니 바르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막내이자 셋째 아들 알렉상드르에게로 거처를 옮겼다. 알렉상드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 애인들과의 밀회를 즐긴다는 건 당연히 알지 못한 채.
  둘째이자 쌍둥이의 아버지 에두아르는 사업상 파리 생루이 섬 앙주 강변 아파트에 방을 하나 사놓고, 아내 마리아에게 실내장식을 맡긴 바 있으니, 은근히 파리에서 살고자 했던 것. 그러나 마리아는 집을 그럴듯하게 꾸미고는 얼른 피에르 소낭뜨로 돌아가 버렸다. 집과 아이들은 마리아에게, 섬유공장은 생산부장에게 맡기고 에두아르는 파리의 구매자에게 주문을 받기 위한 영업 사무실로 아파트를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만? 절대 아니다.
  카바레의 야간흥행 마지막 순서로 등장해 신비로운 시를 낭독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플로랑스에게 홀딱 반해 아파트로 데려온 일도 있다. 플로랑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에두아르를 몽마르뜨 언덕 가브리엘 거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간다. 창조적인 20년의 결혼생활 후에 자신의 존재가 균열이 나고 있으며, 애정에 대한 갈증, 특히 성적 갈망이 커지고 있지만 아내 마리아가 이런 방면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때가 1930년대. 열 받으신 여성분 계시면 시대를 감안해서 조금이나마 식히시기를. 그에게는 애정과 성이 삶에 대한 중요한 취향이다. 이런 인간도 있다. 그러나 마리아와 아이들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것도 틀림없다.
  피에르 소낭뜨는, 일단 마리아-에두아르와 쌍둥이 장과 폴이 사는 집 ‘카신’이 있고, 도로 건너편에 생트 브리지트 수도원 건물이 있는데, 한 쪽은 장애아동복지원이 사용하고, 다른 한 쪽은 에두아르가 사장이자 대주주로 있는 직물공장이 있다. 그래서 카신, 장애아동복지원, 직물공장, 이렇게 세 가지를 합해 피에르 소낭뜨라고 한다.
  카신의 수많은 마리아의 아이들과 장애아동복지원의 다운증후군을 비롯한 갖가지 장애아, 자폐아들은 어려서부터 스스럼없이 어울려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카신의 아이들이 공장에도 자유스럽게 드나드니 복지원 아이들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고, 직원들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일종의 해방구역이랄까. 이것도 투르니에 특유의 우화적 장치라고 보시면 될 듯.

 

  근데 2장으로 넘어가면 단박에 주인공이 알렉상드르 쉬렝으로 바뀐다.
  형제들의 아버지 앙트완 쉬렝은 처음에 건설과 해체 분야의 기업으로 시작해 말년엔 직물과 기성복 중개업으로 전환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큰 형 귀스타브는 기업을 도시 쓰레기 회수와 정화사업으로 선회했고, 하여튼 둘째 형은 섬유업에 종사해서, 그림으로만 보면 아버지의 첫 사업은 큰형이, 말년 사업은 작은형이 각기 이어서 한다고 오해했었다.
  이러다가 1934년 9월 20일에 격렬한 가을 폭풍이 브르타뉴 지방을 강타했고, 강풍을 맞은 기중기가 추락해 3톤의 쓰레기가 귀스타브를 덮치는 바람에 한 방에 큰형이 숟가락 놓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갑자기 전 일가가 회의를 열고 난데없이 알렉상드르, 알렉시를 귀스타브의 후계자로 선임해버린다.
  알렉시는 당시만 해도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지탄을 받던 동성애자. 종교와 이성애자 사이에서 그는 집행유예중인 죄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건강과 즐거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다. 알렉시는 여기서 중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렌느의 생 멜린이라는 베네딕트파 옛 수도원 안에 있던 티보르 중학교. 경이로운 권위로 둘러싸인 신비스러운 이름으로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욕망과 충족을 채워준 도가니로 기억한다. 특히 플뢰레 회. 알렉시가 모임에서 가장 어리고 가장 늦게 가입해서 작은 꽃이란 의미의 플뢰레뜨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이곳에서 만난 두 명의 특이한 인물, 토마 쿠섹과 라파엘 가네사. 토마 쿠섹은 어둠에 대한 정열이 가득한 신학에 뜻이 있어서 후에 파리의 성당 신부가 되어, 밤에 상대를 찾아 공원을 배회하다 경찰에 체포된 알렉시를 석방시키는데 힘을 보태게 된다. 토마의 검은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예수에 대한 육체적, 관능적, 성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단다. 타인을 거부하는 암시. 일종의 폐쇄회로 속에 스스로 틀어박히는 일, 또는 사색.
  반면에 라파엘 가네사는 힌두교 우상 ‘가네사’, 풍만하고 알록달록한 동양화 속의 인물로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이며 숭배의 대상. 코끼리 머리와 네 개의 팔, 분칠하고 번민하는 눈을 하고 토템으로 쥐와 함께 다니는 신에 관심이 많다.

 

  어떠셔. 여기까지 읽으면 대단히 재미있게 다음 이야기가 펼쳐지겠다, 싶지?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앞에서 너무 많은 우화를 깔아놓아, 그걸 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미셸 투르니에 선생이, 이 다음부터 얼마나 꼼꼼하고, 촘촘하게, 마치 자디잔 저인망 그물처럼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자 하니, 재미는 다음으로 하고 사람을 잡는다, 잡아.
  하, 정말 시작은 대단했고, 클라이맥스와 결론은 모르겠지만, 전개 과정에 펼쳐지는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은 단어에 치어, 나는 항복. 백기를 높이 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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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21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쌍둥이는 대체 어떻게 될까요.ㅎㅎ일단 저는 폴스타프님이 극찬하신 <마왕>부터 주섬주섬 담아놔야겠어요! 27도라니 거의 찜질방 중앙홀 정도는 되는듯 한데요?😅

Falstaff 2021-12-21 09:15   좋아요 2 | URL
옙. <마왕> 재미있습니다!
오늘도 사무실 온도 26.5 도예요. 아주 죽겄습니다. 하긴 뭐 이런 엄동설한의 염천지옥도 이번 겨울이 마지막이니 즐겨야 하겠지만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12-21 12: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정말 빽빽한 밀림같네요. 투르니에 소설은 한 권도 안 읽어봤지만 이상한 인간이 나오고 우화적으로 봐야하는군요.
192쪽 아깝지만 재밌는 책은 너무너무 많잖아요~~

Falstaff 2021-12-21 14:42   좋아요 3 | URL
투르니에, 좋은 작품 많아요. 골이 조금 흔들리는 것도 있고요. 이 책은 너무 흔들리더라고요. ㅋㅋㅋㅋ
아, 저도 쌍둥이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책을 덮어서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쿨캣님은 ㅎㅎㅎ 쌍둥이 얘기에 관심이 많으실 거 같은데요. (제가 다른 분하고 헷갈리는 건가요?) ^^;;;

coolcat329 2021-12-21 16:29   좋아요 0 | URL
네~쌍둥이나오는 소설이 흥미롭더라구요.
초보에게 투르니에 작품 추천하신다면 방드르디일까요? 마왕은 좀 어려울거 같아서요

Falstaff 2021-12-21 16:31   좋아요 1 | URL
제가 읽어본 투르니에는 만만한 게 거의 없더라고요.
전 <황금구슬>을 좀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왕>은 의미심장하고 재미있게 읽었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방드르디>는 읽은지 하도 오래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 책을 계기로 투르니에를 수집하게 됐습니다. ^^

coolcat329 2021-12-21 16:39   좋아요 1 | URL
<황금구슬>도 찾아보니 쉽지 않아 보이네요. 그래도 언제 읽는다면 요 책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12-21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이 백기를 들게 하다니 어떤 의미에서든 미셀 투르니에는 대단한 작가네요. ^^

Falstaff 2021-12-21 16:0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삼실이 너무 덥기는 했어도, 아휴, 책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투르니에 한테는 계속 덤벼들 겁니다. ㅋㅋㅋㅋㅋ

stella.K 2021-12-21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재밌을 것 같긴한데 문제는 도전 의식이 생기지 않네요.
더구나 절판도 됐다고 하니 굳이 애써 찾게될 것 같진 않고.
대단한 작가이긴한데...

Falstaff 2021-12-21 16:27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끝까지 읽을 수만 있으면요. ㅠㅠ
글쎄 2백 쪽까지 나갔는데 아직도 쌍둥이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