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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2008년에 발표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오지랖 넓고 무뚝뚝하게 친절한 올리브 할머니는 2019년, 여태까지 생존해 있어서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로 하여금 올리브 할머니의 74세부터 84세까지 노년의 십년 동안을 독자에게 다시 보고하게 했다. 그동안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대통령이 두 번 연임을 했고, 오렌지 껍질 색깔의 머리카락이 두드러지는 거구의 백인 대통령이 새로 집권을 했다. 전편 마지막쯤에서 올리브가 가슴에 머리를 뉘고 언젠가는 멈출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던 두 개의 하버드 박사 타이틀 소유자이자, 재수없는 공화당 지지자이자, 배불뚝이에다가 매사 조롱조로 말하는 것이 습관이어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별로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부자인 잭 케니슨과의 두 번째 결혼도, 올리브가 입방정을 떤 대로 드디어 심장이 멈춘 순간이 도래해 두 번째 과부가 되었다. 아들 크리스토퍼를 보자 하면, 각기 아비가 다른 큰아들과 큰딸을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 앤이 올리브의 친손자 리틀 헨리에 이어 한 번 사산을 하고 딸을 낳았는데, 또다시 임신할 계획을 세우는 중이며, 이번엔 욕조에서 출산할 계획이었지만, 이유는 모르겠고 단산을 하고 만다.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는, 큰 키에 건장한 체구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몸이 나이가 들면서 척추 사이도 좁아지고, 무릎도 뭐 그렇고 그런, 노화현상으로 인해 조금쯤 쪼그라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인생이 뭐 다 그런 거지 별거 있나. 근육의 탄력이 없어져 많은 나이든 여성에게 요실금이 찾아와 삶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올리브 할머니는 조금 더 실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지만 사실은 그리 드물지 않은 질병인 변실금 증세가 있어 여든이 넘어서는 일회용 시니어 언더웨어인 디펜더를 착용해야 외출이 가능한 형편이 된다. 노인의 몸으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직접 차를 몰고 다니던 미용실 앞에서 하루는 고개를 푹 수그려 경적을 계속 울리기에 미장원 여사님이 냅다 달려가 봤더니, 졸지에 심장마비가 와서 심 정지, 죽음의 상태를 거쳐, 집중치료실 신세를 지기도 하고,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이 매우 불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헨리와 함께 지은 집은 벌써 팔았고, 이제 다시 잭 케니슨의 집도 팔아 실버타운인 메이플트리 아파트에 입주해 노인들의 공동생활로 편입된다. 크리스토퍼만 신났겠지? 잭 케니슨의 집을 판 돈을 포함한 잭의 모든 동산과 부동산은 당연히 법적 배우자인 엄마가 갖고, 엄마 돌아가시면 그게 누구 거? 살아있는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겠어, 죽은 잭의 외동딸 캐시겠어. 이런 망할 생각은 하지 말자, 이거다. (나는 그런 복도 읎어요 글쎄.)
그런데 여기서 스트라우트는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에피소드가 좀 모자란다 싶었나보다. 그래서 그랬는지 올리브 할머니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도 책에 포함시켰다. 과부 엄마와 함께 사는 8학년 여자아이 케일리 캘러헌의 에피소드 <청소>와,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남편에게 이실직고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현직 검사 수잰의 이야기를 그린 <도움>은 올리브 이야기와 지극히 독립적이다. 완벽하게 한 작품으로 출간해도 좋은 단편소설이 될 <망명자들>은 2013년 출간한 장편소설 <버지스 형제>를 이어서 쓴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에피소드 <친구>는 1998년 작 <에이미와 이저벨>의 뒷이야기가 상당부분 포함되었을 것이다. 역자 해설을 보고 짐작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올리브>가 품은 열세 가지 에피소드의 공통점은 무대가 메인주의 크로스비 타운에서 벌어진다는 점. 포틀랜드에서 차를 몰고 한 시간 가량 걸리는 가상의 공간으로, 스트라우트의 대학시절 룸메이트 엘런 크로스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래서 에피소드와 공간을 섞어 제목을 <크로스비의 올리브> 정도로 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어디까지나 제목 짓는 건 작가의 권리니까 독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긴 하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이제 막 노년으로 행사하는 건장한 할머니의 따뜻한 좌충우돌, 그래서 젊은 시절의 찬란했던 사랑과, 불륜과, 열정과, 외로움을(하긴 열거하는 네 단어는 사실 같은 뜻의 말이긴 하지만) 추억하면서, 이제 노년에 이르러 그런 거 다 지나가는 거야, 달래기도 하고, 또는 지금 옆에 누워있는 원수 같은 배우자가 죽은 다음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함이라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하면, <다시, 올리브>는 여든을 좌우한 나이에 이르러서 과거의 폭풍 같던 단어들이 이젠 더 이상 상처로 와 닿지 않은 지경에 도달한다. 원수 같은 배우자를 정말로,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매장하는 경험 끝에 실제로 다가온 외로움이란 지옥을 체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완전히 타인의 경지에 이른 친자식과의 교류는 여전히 모래뿌린 아교 위 같았지만 그래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최후의 방법이 남아 있었으니, 부모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다. 그리하여 자식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확인하지만, 아쉽게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확인할 수밖에 없고, 부모의 가슴 속엔 저 먼 예전의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식에게 행했던 모진 일이 자식의 기억은 물론이고 부모의 심장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되살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올리브 키터리지는 자식이란 부모의 심장의 바늘이라고 정의한다.
삼십여 년 전에는 학생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위풍당당했던 올리브 키터리지는 과거의 학생 앞에서 이제 스스로 질려, 노인이 젊은이를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훨씬 상세하고 정확하게 젊은이가 노인을 해석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질리게’ 인식한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늙어버린 올리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심장마비, 사실은 심근경색이었겠지만, 심 정지 경험을 통해 죽음 이후의 상태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으며, 다시 살아난 것이 아쉬울 정도로 나쁘지 않으며, 노화에 이르러 인간이 약해지고, 추레해지고, 보잘 것 없어진다는 것, 심지어 변실금으로 인해 악취를 풍기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물론 아직 진짜 노년에 이르지 못한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선의에 입각해 묘사를 해서 그렇겠지만 이 조마조마한 늙음의 상태, 언제 죽음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태를 지극히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 역시 허튼 죽음의 침상이 아니라 지팡이를 짚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권유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겠지. (독후감을 다 쓰고 보니 역자 정연희도 역자해설을 이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
물론 미국의 부르주아 노인 이야기다. 이 가운데서도 바다가 면한 아름다운 가상의 도시 크로스비 타운의 돈 많은 늙은 과부. 노르웨이 관광을 위해 아낌없이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할 수 있는 재력이라면, 세상 어디서도 주변에 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는 한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이가 서른 살이 되자 부엌에서 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에 성공한 아버지를 둔 전직 중학교 수학교사 올리브 키터리지는 인생의 거의 모든 시기를 크로스비 타운의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간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는.
<다시, 올리브>는 처음부터, 아니 앞부분에서 예일을 나와 하버드에서 최연소 테뉴어를 역임한데다 돈도 무척 많은 부르주아 잭 캐니슨과 결혼을 해서인지, 아니면 나이 들어 운동능력이 현저히 떨어서인지, 전작과 비교해 보통의 사람들과 그리 많은 교류를 갖지는 않는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버지가 오늘 내일 하는 바람에 고향에 들른 옛 제자, 미국의 계관시인이란 영광을 딴 앤드리아 르리외와, 실버타운 메이플트리 아파트에 입주한 후 친하게 지내게 되는 ‘바지 입은 쥐 면상’ 이저벨 정도가 스스럼없이 올리브와 대화한다. 이게 전작과 가장 다른 점이다.
그래도 죽음에 임박한 노인들이 자주 선택하는 형식. 삶의 달관, 초월, 안식. 이딴 것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고, 늙음과 죽음과 죽음의 공포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 같은 실제적 모습에 집중하는 편이, 나는 훨씬, 훨씬, 훨씬 좋았다.